[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④] 영웅은 시대를 넘어

2024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16일)은 광양현감 어영담이 서거한 지 4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을 소개 받고, 1590년대 남해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수많은 영웅들을 알게 됐고, 까마득히 먼 옛날 그들의 희로애락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난중일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과 수많은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삶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 이라는 그림을 애써 담담한 수채화처럼 꺼내 보고자 합니다.

[싣는 순서]
제1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①〕 과거로부터의 영웅 초대
제2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②〕 영웅들의 만남
제3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③〕 영웅들의 활약
제4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④〕 영웅은 시대를 넘어
번외편 : 〔난중일기를 읽고〕 영웅을 기다리며…

옛 광양현 동헌 터. 현재는 광양매일시장이다. 현재 광양역사문화관은 일제강점기 땐 광양군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는 아전들의 사무실인 작청(作廳)이었다. 동헌(東軒)은 지방관인 수령이 직무를 보는 관청 건물이다. 광양문화원 백한희 연구과장에 의하면, 옛 광양현 동헌 터는 지금 광양역사문화관 뒤편 KT건물 옆, 광양매일시장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어즈버,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간 데 없다. 사진=박준재

“甲午年 四月初九日丁巳, 晴, 朝畢式, 出草榜, 大雨, 漁助防將棄世, 痛嘆可言.”
“1594년 음력 4월 9일. 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붙였다. 큰 비가 왔다. 조방장 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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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에서 장수 어영담이 서거한 날의 기록이다.

이날 이순신은 ‘성씨+직책+기세(棄世)+통탄가언(痛嘆可言)’ 6자로 애도(哀悼)했다. ‘기세(棄世)’는 국어사전에서 ‘세상을 버린다’는 뜻으로, ‘웃어른이 돌아가심’을 이르는 말이다. ‘통탄가언’은 짧지만 그때 심경을 말한 것으로 절절한 애도의 마음이 깊게 묻어 있다.

어영담 장군 서거 4일전 최천보가 작고했다. 甲午年 四月初五日癸丑, 陰, 曉崔天寶逝. ‘새벽에 최천보가 죽었다.’ 그날의 기록이다. ‘시간(새벽)+성명+서(逝)’ 1자로 애도했다. 최천보는 흥양현감을 지냈다. 난중일기에 4번 가량 기록이 있다. 한산도 승첩 계본에서 적의 수급 3급을 벴다는 공적도 있다. 그럼에도 사실만 기록했다.

난중일기 기록 특징은 표현이 구체적이고 간결하다. 그런데 어영담 서거에는 그때 감정을 오롯이 드러냈다. 그래서 뭇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고 이순신은 ‘정운 장군’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유독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광양현감 어영담은 전염병으로 서거했다. 이순신 장군과 마지막 만남은 “1594년 3월 26일.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 같다. 조방장(어영담), 방답첨사가 와서 만났다…”는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고 13일 후 서거했다. 이로 보아 전염병을 오래 앓다 서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는 전염병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을 비켜나지 못했다.

한편, 전쟁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다. 오늘날 캠핑을 며칠 가더라도 올망졸망 물건들과 적지 않은 금액이 소요된다. 하물며 ‘전쟁은 돈으로 한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의 모든 것들이 투입되는 것이 전쟁이다. 어영담 현감 서거 시점을 기준으로 조선수군은 어떤 환경에서 전쟁을 치렀는지는 임진장초와 난중일기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임진장초(1592년 12월 10일) 계본 : 작년 6~7월 군사 6만 명과 많은 군량이 서울 등지로 갔으나 모두 잃어버렸고, 지금 4만 명의 군사들도 먹고 입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추위에 얼고 있는데 또 북상을…, 현재 방위군에 근무하고 있는 자들도 태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들입니다. 1척의 전선에 130여명의 군사가 필요한데, 충당할 방법이 없습니다.

▷임진장초(1593년 4월 6일) 계본 : 진영에 전염병이 퍼져 사망자가 계속 늘어납니다. 명군이 남쪽으로 오는데, 이런 병약하고 굶주린 군졸을 거느리고 적들과 전투를 벌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임진장초(1593년 5월 10일) 계본 : 격군(노 젓는 병사)을 보충할 수 없고, 배를 정비했어도 병사들이 굶주려 쇠약해서 노를 젓고 배를 조정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임진장초(1593년 8월 10일) 계본 : 수군은 먼바다에 진을 친 지 5개월이 되어 군정이 풀어지고 예민한 기질도 꺾였고,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진중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더구나 군량이 부족하여 계속 굶게 되고, 결국 병이 나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군사의 정원은 계속 줄고 보충할 사람이 없습니다.

신이 거느린 수군도 6,200여 명 중 작년부터 지금까지 병사자가 600여 명입니다. 남아있는 군졸들도 조석으로 먹는 것이 불과 2~3홉이라, 고달픔이 극도에 달해 활을 당기고 노를 젓기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임진장초(1593년 윤11월 17일) 계본 : 1년 넘게 바다에 머물고 굶주린 군졸들이 오래전 병들고 극도로 지쳐서 겨우 숨만 붙어 있습니다. 사망자도 거의 절반이 됐습니다. 장차 구제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당장 날씨가 추워져서 귀신같이 변한 참혹한 꼴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바다에 머물러 굶주림, 추위에 견디기 어려운 데다가 전염병이 지난 봄, 여름보다 심하게 번져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계속 죽고 있습니다. 앞날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난중일기(1594년 1월 19일) :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었다.

▷난중일기(1594년 1월 20일) : 추위가 살을 도려내는 듯하여 여러 배에서 옷 없는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 않으니, 더욱 민망하다.

▷난중일기(1594년 1월 21일) : “녹도만호가 병사자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보고했다.

*자료 : 임진장초(1594년4월20일), ‘방비군을 결석시킨 여러 장수들을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계본’ 中에서. 1594년 1월~4월까지 통계다. 사망자와 환자의 수치에서 심각한 전염병 상황을 말해준다. 자료정리=박준재

당시 조선이 맞서 싸운 것은 왜적뿐만이 아니었다. 훨씬 더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전염병, 기근, 추위였다. 특히 전염병 상황은 이미 병영(兵營)이 아니라 병동(病棟)이었다. 전쟁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김성우 대구한의대교수의 ‘임진왜란과 1593∼1594년 계갑대기근(2020)’에 따르면, 1592년 겨울~1594년 여름 조선은 대기근의 광풍에 휩싸였다. 기근은 양식 부족, 영양실조, 면역력 저하, 전염병 창궐, 사망자의 대량 발생이라는 연쇄 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이 무렵 도둑질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토적들이 곳곳에서 발호했다.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람까지 나타나는 등 참담한 사회상이 이어졌다. 2년에 걸친 ‘계갑대기근’으로 경상도 성주, 거창, 함양, 초계 등지 양반 50%가 사망했다. 피지배계층인 노비와 상민들의 사망률은 이보다 훨씬 높았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의 대기근, 전염병 등의 폐해는 1593∼1594년도에 최고조의 기승을 부린다.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도 이를 운용할 병사들이 없다. 특히 활 쏘는 사수와 노 젓는 격군은 매우 힘든 직종인데 병사를 충원할 방안이 없었다.

임진장초(1594년 4월 20일)엔 “떠도는 무리를 모아 격군에 충당하니, 오래 굶주린 사람들이라 중병이 없어도 곧 죽어 버립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수수깡 같은 인력과 물자를 가지고 1594년도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조선수군과 백성들의 뼈를 갈아 만든 승리였다. 만약 이 당시 웅포해전(2월), 2차 당항포 해전(3월), 장문포 해전(9월)에서 패했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사뭇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①일본이 남해안 제해권을 확보했다. ②일본은 서해안을 통해 한양까지 보급로를 확보했다. ③도요토미는 조선정벌 플랜B를 적용하여 조선 남부지역 4개 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혹은 강원도)를 차지했다. ④곧이어 1616년 건국한 청나라는 조선 북부 4개도를 흡수했다. ⑤현재 한반도 인구 절반은 일본어를, 나머지 절반은 중국어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이 지나친 억측은 아니다.

약소국의 유구한 역사는 곧 유구한 고난을 의미한다. 그 나라가 이어졌다면 아무리 오래 된 역사라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에 맞닿아 있다. 그 옛날 영웅들의 활약이 1590년대 남해안 바닷가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우리에게 투영되고 이유가 그것이다.

*KBS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장면, 앞줄 왼쪽부터 녹도만호 정운(안승훈 배우), 광양현감 어영담(김진태 배우), 사도첨사 김완(박철민 배우). 사진=드라마 스틸컷

영웅은 시대를 넘어

정걸 장군(1516~1597) : 이충무공 태어나기 1년 전 무과급제, 32년 군선배, 31세 연상, 수군절도사 20년 선배였다. 임진왜란 때 78세 고령, 화려한 공직생활 전력에도 이충무공 휘하 참모장수로 활약했다. 장군의 아들과 손자도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장군은 이미 500년 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고흥군 안동사와 고양 행주서원에 정걸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미지=참한역사신문(ichn.co.kr)
이미지=매일일보(m-i.kr)

‘이충무공의 조방장 정걸’, ‘왜구 물리친 숨은 주역 ‘정걸 장군’ 아세요?’, ‘화포전술 경험 살려 충무공 도와… 관직 떠난 80세’, ‘한산・행주대첩의 숨은 영웅, 정걸 장군’, ‘정걸 장군, 그는 16세기 동북아 최강의 조선 수군을…’, ‘이순신의 스승 정걸(권율도 살렸네?)’. 인터넷에서 ‘정걸 장군’을 검색하면 뜨는 헤드라인이다. 정걸 장군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전남 고흥의 향토부대인 7391부대 2대대(대대장 배용인)가 2015년 11월 25일 ‘정걸대대’로 부대명칭을 변경했다. 명칭 변경은 잊힐 수 있는 지역 출신의 호국영웅들을 상기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부대원들의 호국의지를 높이려고 공모를 통해 이뤄졌다.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이 지역 역사적 인물이다. 사진은 고흥군 통합방위협의회(의장 고흥군수 공영민)가 지난 2월 6일 설 명절을 맞아 정걸대대 장병을 위문하는 모습이다. 사진=고흥군

전남 고흥의 향토부대인 7391부대 2대대를 2015년 ‘정걸대대’로 부대명칭을 변경했다. 명칭 변경은 잊힐 수 있는 지역 출신의 호국영웅들을 상기하고, 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부대원들의 호국의지를 높이기 위해 공모를 통해 이뤄졌다.

정운 장군(1543~1592) : 녹도만호 정운은 직책에 정성을 다했고, 담략이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변이후 나라를 위해 제 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 지키는 일에 전보다 배나 더하므로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운 등 2~3명이었습니다.

3번 승첩 시 언제나 앞장섰으며, 이번 부산 싸움에서도, 몸을 던져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했습니다. 종일 교전하면서 사력을 다해 활을 쏴서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한 바, 이는 정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 나올 무렵 총탄을 맞아 전사한 바, 그 늠름한 기운과 순결한 정신이 쓸쓸히 없어져서 뒤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다면 참으로 뼈아픈 일입니다. (임진장초, 1592년 9월 11일)

*부산시 사하구청 주최 ‘정운 장군 향사’, 사진=사하구청.

‘부산시민의 날’은 매년 10월 5일(음력 9월 1일)이다. 이날은 부산포 해전 승전일이자, 정운 장군 전사일로 시민들의 뜻을 모아 정했다.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에 소재한 ‘정운공순의비’는 부산시지정기념물 제20호다. 매년 음력 9월 1일 사하구가 주최하여 ‘정운 장군 향사’를 거행하고 있다. 고흥에서도 ‘정운 장군 향사’를 거행하고 있다.

*사진=고흥군청. 쌍용제전과 정운 장군 동상

또한 1996년 5월 17일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 SS-067을 ‘정운함’으로 지정하여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자료 : ‘제4차 부산포 승첩 계본, 임진장초(1592년 9월 17일)’ 中에서. 정운 장군과 함께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한 영웅들. 흥양(전남 고흥), 능성(전남 화순), 추모의 마음을 담아 이름을 새겼다. 이미지=박준재

▶ 김완 장군(1546~1607) : 이순신 사람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영웅이다. 할 말은 하고 할 일은 하는 상남자 스타일. 난중일기에서 첫 만남은 대충 이미지였다. 그러나 옥포,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무궁한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충무공이 한양 압송되어 고초 후 백의종군을 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할 때, 대부분 충무공 휘하 장수들은 사직을 하거나 근무지를 옮긴다. 그러나 김완 장군은 원균 휘하에서 조방장으로 칠천량 해전에 출전했다. 무장으로서 또 다른 애국심의 발로라고 보인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비롯한 패주 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선조실록 91권, 선조 30년 8월 5일 4번째 기사)’에서, 도체찰사 이원익은 “처음부터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金浣) 뿐이었습니다.”고 발언했다. 기록으로 보아 김완 장군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김완 장군은 그때 칠천량에서 전사하지 않고 왜적과 싸우다 바다에 빠져 포로가 됐다. 이후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탈출하여 약 9개월 후 부산 다대포에 도착했다.

삶의 방식에 있어 자기주관이 확실한 장군으로 추정된다. 찰나의 실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쟁터에서 상당한 담력과 무예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전공과 행장을 보여줬다.

*경북 영천시 임고면 소재 동린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 사진=문회재청 국가유산포털
*동린각 충의사 內 충무공과 김완 장군 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원종훈1등에 책록 됐다. 고향인 경북 영천군 임고면에 이 충무공과 김완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동린각을 세웠다. 동린각은 정조 9년(1785년) 5월 소실되어, 정조 11년(1787년) 재건됐다. 1960년 자양면 성곡동으로 이전 복원했다. 이후 영천댐 수몰지구가 되어 1976년 7월 현 위치로 다시 이전 복원했다. 동린각에서는 매월 4월 후손들에 의해 추모제가 거행된다.

▶ 무의공 이순신 장군(1546~1607) : 임진왜란 후에도 조선시대 공무원으로 여러 지역과 직종으로 나라에 봉사했다. 근무지역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 서울시 등지였다. 현재의 관점으로 직종과 직위는 경찰청장, 해군사령관, 육군사령관, 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나무위키 자료에 따르면, 2000년에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은 바로 ‘무의공’의 이름을 따서 ‘SS-068 이순신함’으로 명명되었다. 이 잠수함은 우리나라 최초로 잠대함 유도탄을 탑재한 잠수함이다.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호’와 함께 우리 바다를 지키고 있다

*광명시(시장 박승원)는 지난 18일 무의공 이순신의 이름을 딴 잠수함 ‘이순신함 함장(중령 김관수)’이 방문해 무의공(武毅公) 이순신 선양회 회원들과 만남을 가졌다. 사진=광명시

이순신함 신임 함장은 광명시에 소재한 ‘무의공 이순신 묘’를 참배했다. ‘무의공 묘’는 광명시 일직동 KTX광명역 앞 서독산 자락에 위치한다. 광명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 나대용 장군(15561612) : 이순신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자원으로 종군하여 군관이 된다.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초반부터 나대용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대용은 인물평이 까다로운 충무공 마음에 단박에 들 정도로 인품과 능력이 뛰어난 인재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순신 휘하 장수들 특징은 하나 같이 전투에서는 ‘돌격 앞으로 정신’으로 임한다. 자연스레 부하 병졸들도 ‘물러서는 법’을 모르고 신명을 다해 싸웠다. 또 다른 특징은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가 많았다.

판옥선과 무기제작 전문가 정걸 장군, 해양 내비게이션 광양현감 어영담, 병참의 달인 배흥립. 거북선과 전함제작의 귀재 나대용 장군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전투능력이 뛰어난 무장이며, 각자의 필살기가 있다는 점이다. 무패는 그냥 얻은 행운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우수한 병장기 지원 없는 정신력 혹은 사기(士氣) 만으로는 단말마적 승리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회성 승리에 불과하다. 장기적 전투에서는 성능이 우수한 병장기와 이를 능숙하게 운용하는 인재가 없다면 지속적인 승리는 불가능하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기록에서 보여 주듯이 1593∼1594년도 국가적 대기근과 전염병 폐해는 국가와 병영을 초토화 시켰다. 영양부족으로 병사들이 화살을 쏘지 못하고, 노을 젓지 못하고, 병력을 충원하지 못했다. 조선수군 와해와 다름없다.

당시 시대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던 1594년 해전에서의 승리는 기적이었다. 여기엔 조선수군의 우수한 병장기와 장병들이 밑바탕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대용 장군은 조선 최고의 선박 기술자였다. 그가 만든 거북선과 전함은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기술적 우위를 갖게 하여 승리를 견인했다.

*나대용 장군을 모신 소충사. 소충사는 매년 4월21일 나대용 장군 추모제을 열고 있다. 추모제는 ‘과학의 날’인 4월21일로 정했다. 그 이유는 평생을 군함 건조에 몰두하여 그 당시 가장 독창적이고 우수한 군함을 발명한 나대용 장군의 창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진=나주시청
*나주시에 소재한 나대용 장군 동상. 이외에도 나대용 장군의 생가와 묘소도 전라남도 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사진=나주시청
*나대용 잠수함. 사진=(사)대한민국잠수함연맹

위키백과에 따르면, 나대용함은 대한민국 장보고급 잠수함이다. 림팩 2002에 참가하여 총 10척 10만 톤의 함정을 가상 격침했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 최초로 하푼 잠대함 미사일을 발사하여 60km 떨어진 곳에 있는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 송희립 장군(15531623) :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사람들은 그를 ‘이순신의 그림자’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발발부터 형(대립)과 동생(정립) 3형제가 시종일관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순신이 1597년 해임될 때도 상경하여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난중일기에도 3형제는 백의종군과 복귀 후에도 여전히 이순신의 지근거리에서 다양한 지시를 수행하는 기록이 보인다. 옥포해전 출전 당위성, 노량해전 승리전략을 이순신이 만족해하는 답을 하는 제시하는 등 지략과 무공을 갖춘 무장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송희립은 노량해전에서 이마에 총상을 당했음에도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하자 벌떡 일어났다. 이순신 아들과 조카 등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시신을 싸서 초둔(草芚)으로 덮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대신하여 갑옷을 입고 기와 북채를 들고 전쟁을 독려했다. 수세에 몰렸던 명나라 진린 도독을 구하는 등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묘도 이순신 대교 홍보관, 조명연합수군 테마역사 공원 內 앞쪽 우측 ‘이순신 장군, 뒤쪽 우측 송희립 장군, 앞쪽 좌측 진린 도독, 뒤쪽 좌측 등자룡 장군 동상’. 사진=박준재

1601년 양산군수, 다대포 군수에 제수 받았다. 1611년에는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고흥 ‘세충사’에 제향 됐다. 그 외 장군의 호국충절을 기리는 곳은 ‘제동서원’, ‘충무사(순천, 한산, 고흥)’, ‘무광사’ 등에도 배향 됐다. 육군 상무대에도 이순신과 정운 장군 동상과 함께 송희립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24년 4월 묘도에 준공된 ‘조명연합수군 테마역사 공원’에도 송희립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묘도 이순신 대교 홍보관, 조명연합수군 테마역사 공원 內 ‘송희립 장군 동상’. 화살을 쏘는 방향이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시마스 요시히로의 일본군이 진입해온 남해 관음포 방면이다. 사진에 보이는 이순신 대교 주탑에서 좌측이 광양항, 우측이 노량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사진=박준재

▶ 광양현감 어영담(1532~1594) :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1594년 왜선 30여척을 격파한 공적이 인정되어 통정(通政)에 가자되었다(정3품으로 품계를 올림). 1594년 전염병에 걸려 한산 통제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무공신에 책록 되었다.

어영담 현감의 무예와 담력 그리고 공적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른 영웅들에 비해 불행한 가정사가 눈에 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어영담은 장남 어응해(魚應海), 차남 어응린(魚應麟)을 두었다. 그러나 아들들이 자식을 두지 못해 대가 끊어졌다. 첫째 숙부 어침(魚沉)의 두 아들 어영수(魚泳洙)와 어영기(魚泳沂) 또한 아들이 없었다. 둘째 숙부 어혼(魚渾) 또한 아들이 없었다. 결국 호군공파는 어영담의 아들 대에서 절손되었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보면 어영담 광양현감의 차남 어응린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꾸준히 군무(軍務)에 종사했다. 난중일기(1595년 1월 초6일)어응린(魚應麟)과 고성현감이 왔다. (1595년 11월 18일)어응린이 와서, “고시니 유키나가가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로 나갔는데 거처를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 (1597년 6월 26일)어응린과 박몽삼 등이 왔다. (1597년 6월 27일)아침에 어응린, 박몽삼 등이 돌아갔다.

*망덕포구 윤동주 시정원에서 선소마을 유상각 방면으로 가면 ‘광양선소터 표지석’과 ‘광양현감 어영담 추모비’가 있다. 동그란 모양의 기념비가 ‘어영담 추모비’. 2015년 3월 광양 선소 임진왜란 호국선양회가 추모비문을 지었다. 사진=박준재

어쨌든 사람들은 말한다. 광양현감 어영담의 무예, 담력과 공적은 다른 장수들과 견주어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거의 잊힌 건 절손된 가문에서 돌봐 주는 이, 기억해 주는 이 없으니 묘마저 망실됐다. 그리고 세월의 무상함이 그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2024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16일)은 광양현감 어영담 서거 430주년이다.

 

난중일기 1594(1월부터 서거까지) : ‘광양현감 어영담관련 기록

▶1594년 1월21일. 맑다 [양력3월12일] 아침에 본영의 격군 742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현감(어영담)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만호가 “병들어 죽은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고 보고했다.

▶1594년 2월3일. 맑다 [양력3월24일] 광풍이 세게 일었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1594년 2월4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3월25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 우조방장(어영담)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1594년 2월5일. 맑다 [양력3월26일] …우조방장(어영담) 및 우우후․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1594년 2월7일.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8일] 아침에 우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만났는데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1594년 2월8일. 맑다 [양력3월29일]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어영담)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10시쯤 헤어졌다.

▶1594년 2월9일. 맑다 [양력3월30일] 순천 부사, 우조방장(어영담), 우후, 사도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사천현감, 하동현감, 소비포 권관도 왔다.

▶1594년 2월11일. 맑다 [양력4월1일] 우조방장(어영담)도 와서 함께 취했다.

▶2월 15일 (갑자) 맑다. [양력4월5일] …순천부사, 우조방장(어영담), 우우후, 발포만호, 여도만호,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1594년 2월16일. 맑다 [양력4월6일]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장(어영담), 우수사 우후, 사 첨사, 발포만호,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송전, 원문에는 이름 없음) 등과 활 12순을 쏘았다. (*활1순(巡)은 화살 5번 쏘는 것을 말한다)

▶1594년 2월17일. 맑다 [양력4월7일] 순천부사, 우조방장(어영담)이 와서 활 5순을 쏘았다.

▶1594년 2월19일.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양력4월9일] 활터 정자에 올라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어영담)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도 왔다

▶1594년 2월20일. 안개 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4월12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1594년 2월21일. 맑고 따뜻하다 [양력4월11일]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담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보았다고 보고했다.

▶1594년 3월2일. 맑다 [양력4월21일] 아침에 방답첨사, 순천부사,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다.

▶1594년 3월3일. 맑다 [양력4월22일] … 저녁 무렵 순천부사․ 좌조방장․ 우조방장(어영담)․ 방답첨사, 가리포첨사, 좌우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6시쯤 벽방 척후장이 보고한 내용에, “왜선이 오리량과 당항포 등지에 정박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전령을 내려 수군을 소집 시켜 흉도 앞바다에 진을 치게 하고, 정예선 30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1594년 3월5일. 맑다 [양력4월24일] 겸사복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다. 우조방장 어영담이 긴급 보고한 내용에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17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1594년 3월23일. 맑다 [양력5월12일] 기운이 여전히 불편하다. 방답첨사, 흥양현감, 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만났다. 견내량 미역 53동을 캐어 왔다.

▶1594년 3월26일. 맑다 [양력5월15일] 따뜻하기가 여름 날 같다. 조방장(어영담), 방답첨사가 와서 만났다… (이순신과의 마지막 만남, 이순신은 20일간 전염병 증세를 앓았으나 이날부터 호전됐다)

▶1594년 4월9일. 맑다 [양력5월28일] … 큰 비가 왔다. 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세상을 떠났다. 이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참고자료

▷난중일기, 다빈치 지식지도, www.davincimap.co.kr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2

▷임진장초, 충무공 이순신,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sillok.history.go.kr

▷임진왜란기 조선수군 진영 전염병의 발생 실태와 영향, 나승학 교수, 청주대학교, 2017.

▷임진왜란과 1593∼1594년 계갑대기근, 김성우 교수, 대구한의대, 2020.

박준재 기자
박준재 기자
▪︎광양시니어신문 기자 ▪︎보호관찰소/소년원/위치추적관제센터에서 근무 후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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