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③] 영웅들의 활약

2024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16일)은 광양현감 어영담이 서거한 지 4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을 소개 받고, 1590년대 남해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수많은 영웅들을 알게 됐고, 까마득히 먼 옛날 그들의 희로애락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난중일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과 수많은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삶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 이라는 그림을 애써 담담한 수채화처럼 꺼내 보고자 합니다.

〔싣는 순서〕

제1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①〕 과거로부터의 영웅 초대
제2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②〕 영웅들의 만남
제3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③〕 영웅들의 활약
제4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④〕 영웅은 시대를 넘어
번외편 : 〔난중일기를 읽고〕 영웅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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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영웅을 만든다.

이순신 사람들 혹은 휘하 참모들은 특출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전라좌수군은 영웅들의 집합소였다. 이순신 사람들 특이점은 군 선배, 연장자, 지체 높은 집안 출신 혹은 과거 더 높았던 직급을 따지지 않고 기꺼이 이순신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 아집과 집착을 버릴 줄 아는 큰 어른들이었다.

또 다른 그룹은 군관(조선시대 하급 무관)이다. 임진왜란 때는 전시라는 특수상황에서 무과시험 없이 자원한 사람 중에 재능 있는 민간인을 군관으로 임명했다. 이순신 장군 휘하에도 수많은 군관이 자원했다. 이들은 후일 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 당시 전라좌수영은 인재 블랙홀이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주는 공정, 엄격함과 신뢰감 그리고 모여드는 인재들이 갖는 국난을 대하는 비전이 의기투합 된 것은 아닐까.

난중일기를 보면 어떤 때는 이순신 장군과 참모들은 단순한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이라는 이미지로 설정된다. 그러다가 동일 목적을 가지고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동지적 결사체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순신 장군도 ‘정운을 이대원 사당에 배향해 주길 청하는 계본’(임진장초, 1592년 9월 11일)에서 “…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 이순신(李純信), 어영담(魚泳潭), 배흥립, 정운 등과는 함께 같이 죽을 것을 기약하고,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고 계획을 세워 추진했습니다.”고 썼다. (*계본 : 조선 시대 임금에게 큰일을 아뢸 때 제출하던 문서)

전쟁 수행을 앞두고 이보다 좋은 팀워크는 없다. 어른다운 어른들과 재능이 뛰어난 군관들이 모여 조선좌수군을 환상적인 팀으로 만들었다. 이 팀의 활약은 1598년 노량해전 남해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소설 삼국지 부럽지 않은 영웅들의 활약이 있었다.

덕분에 한반도 역사는 수백 년이 흘러도 지울 수 없을 만큼 큰 생채기 하나를 덜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 덕을 보고 있다.

조방장 정걸 장군(丁傑, 15141597)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助防將)이 됐다. 그때 나이가 78세였다. 이순신 장군보다 31세 많았다. 1544년 무과 급제했다. 이순신이 태어나기 1년 전이었다. 1576년 무과 급제한 이순신 장군보다 32년 군 선배였다.

조규택(계명문화대 군사학부) 교수에 의하면, 공직생활이 화려했지만 전관예우를 바라지 않고 이순신 장군의 군무(軍務)를 챙겼다. 특히 과거 전투 경험을 되살려 판옥선, 화전, 철령전, 대총통 등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든 당사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을묘왜변과 행주대첩 승리에도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부산포 해전도 치밀한 공격준비를 거쳐 실시한 것으로 정걸 장군의 전략가적 사고와 노련한 경험이 전승에 큰 힘이 됐다. 아들(정연)과 손자(정홍록)도 의병으로 왜적들과 싸우다 순국했다.

국난을 당해 엄청난 노령임에도 한 세대나 어린 후배 장수의 부하로 기꺼이 일했다. 최전선에서 그동안 자신이 공직생활에서 쌓았던 모든 경험과 재능을 쓰는 백전노장. 또 이기기 위해서라면 대선배에게 배울 줄 아는 이순신 장군. 조선수군이 왜 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순천부사 권준(權俊, 1548?) 1579년 무과 급제했다. 이순신 장군보다 3년 군후배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 순천부사 권준, 광양현감 어영담은 3인방이나 다름없다.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한 1592년부터 1594년 어영담 현감이 서거할 때까지 순천부사는 이순신 장군과 70여 차례 만났다. 그 중 셋이서는 40여 차례 만났다. 주로 군사적인 논의부터 사적인 술자리 모임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만남이 계속됐다.

*이순신 장군(박해일 분)이 활을 쏘는 장면, 사진=영화 ‘한산: 용의 출현’ 스틸컷.

난중일기를 읽다 보면 모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활쏘기다. 활쏘기가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라고는 하나 활을 참 많이 쏘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 위력을 알게 됐다. 근접전에서 당시 조총 성능보다 나은 연사와 속사가 가능했다. 게다가 국궁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강해 왜장 여럿을 보내 드릴 수 있었다.

당항포 승첩 계본(임진장초, 1592년 6월 14일), “왜선은 큰 배 9척과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있었습니다. 큰 배는 높이가 3~4장이나 될 듯한 층루가 우뚝 솟았고, 밖으로는 사면에 붉은 비단 휘장을 둘렀고 ‘황’자가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안에 왜장이 붉은 양산을 세우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배 밑을 들이 받고,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쏘고 이어서 천자, 지자총통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렸습니다. 이 때 순천부사 권준이 돌진하여 활을 쏴서 왜장(도쿠이 미치유키)을 맞추자 배 아래로 떨어졌고,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왜장의 수급을 벴습니다.“

이 왜장선에서 소비포 권관 이영남이 양민 여자 2명을 구했다. 그 중 ‘억대’라는 여자가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15일전 왜적에게 잡혀 왜장에게 시집가 늘 한곳에 있었습니다. 왜장은 키가 컸고, 나이는 30세 가량 됐습니다. 부하들이 명령을 어기면 용서 없이 목을 벴습니다.”

“접전할 때 왜장이 앉아있는 층루에 화살과 총탄이 퍼부어져서 처음엔 이마를 맞고도 안색이 태연했는데, 곧 화살이 가슴 한 복판을 관통하자, 제정신을 못 차리고 떨어졌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국궁의 파괴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광양현감 어영담과 사도첨사 김완도 활을 쏘아 왜장을 잡은 적이 있다. 전투 과정에서 지휘관이 활을 쏘아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우리 병사에게는 사기진작이, 적들에게는 엄청난 공포감이 됐을 것이다. 아무튼 평소 활쏘기를 연마한 이유가 있었다.

이 외에도 권준의 활약은 많다. ‘한산도 승첩 계본(1592년 7월 15일)’에도 “순천부사 권준은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고 바다 가운데서 왜장과 그 부하들 수급 12급을 벴습니다”라는 기록도 있다.

예로부터 왜적들의 악랄함에 대한 공포가 깊었다. 그러나 ‘한산도 승첩 계본(임진장초, 1592년 7월 15일)’에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구한 경상도 인동현(현재 구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살았던 우근신 소년을 조사하니, “소인과 누이동생은 산으로 피난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서울로 갔습니다…

… 왜적들은 우리 군사와 싸울 때 우리 군사가 싸우려 하지 않으면, 칼을 휘두르며 힘차게 날뛰지만, 우리 군사가 활을 쏘고 돌격하면, 반드시 피하며 물러섭니다. 이때는 왜장이 아무리 싸우도록 엄하게 명령해도 두려워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진술로 보아 왜적들의 습성은 몸서리 쳐질 정도도 잔인했지만 실상은 왜구들도 불리하면 꽁무니를 뺐다.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은 그만큼 일본군을 압도했다.

후일 순천부사 권준은 출전한 해전에서도 많은 공을 세워 1595년 원균의 뒤를 이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그리고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자 같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휘하에 다시 재직한 의리남(義理男)이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 1539~1597) 이순신 장군보다 6살 연상이다. 1567년 무과 급제했다. 9년 군선배였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임진왜란 발발 전 일본침략을 우려하여 북방에서 무용이 뛰어난 장수를 남쪽으로 배치했는데, 그때 낙안군수로 제수됐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출전에 관한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난중일기에 처음 등장하는 낙안군수 신호의 모습은 다소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난중일기(1592년 음력 5월 1일) “수군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진해루에서 방답첨사(이순신), 흥양현감(배흥립), 녹도만호(정운)을 불러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義士)들이라 할만하다.”

난중일기(1592년 음력 5월 2일) “…남해현령, 첨사와 여러 만호들이 왜적침입 소식을 듣고 도망쳤고, 병기들도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여러 장수들은 기꺼이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신호)만은 피하려는 것 같아 한탄스럽다.“

출전을 앞두고 여러 장수들은 분기탱천하여 의기투합했는데, 낙안군수 신호 태도는 미지근했던 듯하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남 못지않은 무공을 자랑했다.

옥포해전 승첩장계(1592년 음력 5월 10일) “7일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왜적 수급 1급을 베고, 칼과 갑옷 등 왜장의 물건들을 접수했습니다…, 8일 … 적진포에 이르자 왜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13척이 있었는데…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의 학익진도 장면. 사진=영화 스틸컷

한산도 승첩 계본(임진장초, 1592년 7월 15일) “8일 ‘학익진’으로… 적선 2~3척을 깨뜨리자 적들이 사기가 꺾여 도망치려 하였습니다. …낙안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사로잡아 수급 7급을 벴습니다. 11일 …낙안군수 신호… 등은 접전할 때마다 몸을 잊고 먼저 돌진하여 승리를 거뒀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부산포 승첩 계본(임진장초, 1592년 음력 9월 17일) “낙안군수 신호, 녹도만호 정운, 방답첨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등이 돌진하여 왜 선봉 왜대선 4척을 깨뜨려서 불살라 버리자, 왜적들은 헤엄쳐 육지 도망쳤습니다. …깃발을 올리고 북을 치며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였으나, …왜의 전선이 470여 척 있었지만, 두려워서 감히 나오질 못했습니다.“

후일 낙안군수 신호는 사후 원종공신 1등에 임명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됐다.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15461608) 이순신 장군보다 1살 적다. 1572년 무과 급제하여 4년 군선배였다. 이순신 장군은 배흥립을 가장 믿고 의지한 장수 중의 한 사람이라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도 썼다. 배흥립은 1597년 충무공이 백의종군 할 때, 복직됐을 때, 힘들 때, 좋을 때, 늘 함께했다. 의리남이다.

배흥립은 1590년대 남해안에서 최장기간 해전을 치른 경력의 소유자다. 이순신이 해임되고 복직될 때까지 약 5개월간 본의 아니게 남해안을 떠나 있게 되었다. 그런대 배흥립은 이때도 원균의 휘하에서 칠천량 해전에도 참가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에 의하면,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도망가고, 전라우도수군절도사와 충청도수군절도사가 전사했다. 이때 배흥립은 분전하여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이후 노량해전까지 참여했으니, 이순신 장군과 첫 전투부터 마지막 전투까지 함께한 장수였다.

‘난중일기(1595년 6월 6일)’에 “송희립이 들어왔다. 도양장의 농사 형편을 물어보니, 흥양현감(배흥립)이 애를 많이 써서 추수가 잘 될 것 같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배흥립은 전라좌수영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 국어대사전) 경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군량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이외에도 1592년 임진왜란 직전 흥양현감에 제수된 후, 이순신 장군 지시에 따라 전함을 많이 건조해 전란에 대비했다. 배흥립은 전투에서는 적진에 돌진하여 앞장서 싸운 명장, 평시에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전략적 행정가였다.

그 후 배흥립 장군은 1600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듬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 이순신 장군보다 2살 많다. 1570년 무과 급제하여 6년 군선배였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로워 주위의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다. 1591년 녹도만호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2월 19일부터 관할구역 순찰을 시작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순찰 평가는 대부분 크게 만족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녹도만호 정운이 맡은 지역의 시설관리와 병기 운영을 보고 이순신 장군은 매우 흡족해했다.

난중일기에서 녹도만호 정운 행적을 쫓아가면, 참된 군인 표본을 보여준 어른을 볼 수 있다. 기개는 대쪽 같은 선비와 같았고, 용맹은 항우와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경상우도에서 원군을 요청했을 때 이순신 장군은 잠시 멈칫했다.

이때 정운 장군은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놔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출전을 주장했다.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아는 전형적인 무장으로서 당연한 자세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이 주장을 수용하고 출전했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처신은 용의주도했다. 지역 사령관으로서 왕의 재가 없이 위수지역을 벗어난 병력이동은 후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사령관 혼자 결정하여 병력을 이동시키면 윗사람들은 위험한 인물이라 여기고 탐탁지 않을 것이다. 외부요청과 내부결정으로 움직여야 대의명분이 생긴다. 이순신 장군의 멈칫은 그냥 멈칫이 아니었다.

옥포해전에서 녹도만호 정운 장군 작전위치는 함대 맨 뒤였다. 그런데 다른 전투선이 감히 왜적을 공격하지 못하자 정운 장군이 선봉장으로 나서 왜선 2척을 깨뜨리는 전공을 세운다. 이외에도 당포해전과 한산도 대첩에서도 큰 전과를 올려 조선수군의 핵심 장수가 됐다.

그러나 부산포 해전에서 적을 추격하던 도중 대조총에 관통상을 당해 순직했다. 이순신 장군은 계본을 올려 사당에 배향해줄 것을 청하고, 직접 제문을 지어 추모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드문 일로 얼마나 정운 장군을 아꼈는지 알 수 있다.

1604년 병조참판, 1796년(정조 20)에 병조판서 겸 의금부 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 공신에 책록 되었다.

‘KBS역사저널 그날’에서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조선수군의 전과를 소개하는 장면. 사진=프로그램 스틸컷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이순신 장군보다 9살 적다. 1578년 무과 급제하여 2년 군후배였다. 1592년 방답진(현, 돌산읍 군내리)첨절제사로 부임했다. 양녕대군 후손이며, 선조와 14촌 형제간이다.(자료, 나무위키)

부하 이순신은 출중한 무예와 재능을 지녔다. 충무공 이순신이 부하 이순신을 얼마나 배려했는지는 조정에 올리는 계본에서도 나타난다.

계본(임진장초, 1592년 음력 6월 14일) “6일 방답첨사 이순신이 24~25세 되는 왜장이 화려한 군복을 입고 칼을 잡고, 부하 8명과 함께 항전하며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보고 활을 쏘았습니다. 왜장은 화살 10여 대를 맞고, 몹시 울며 물에 꼬꾸라져서 곧 수급을 벴습니다.”

계본(임진장초, 1592년 음력 9월 11일)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변방수비에 온갖 힘을 다하고, 사변 후에는 더욱 힘을 써 4번이나 앞장서서 적들을 무찔렀습니다. 특히 당항포 접전 때는 왜장을 쏘아 수급을 벤 공로가 뛰어납니다.

다만 적을 사살 하는데 만 전력하고, 수급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습니다. 이번 포상의 글월 중에 이순신 홀로 이름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권준 이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당상으로 승진되었지만, 아직 이순신(李純信)만이 임금의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포상하는 명령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선조는 부하 이순신을 ‘절충장군’에 특진시켰다. 1594년 충청도수사로 임명했다. 이후 충무공이 통제사로 복직하자 부하 이순신도 경상우수사로 등용된다.

노량해전에서 척후장 임무를 맡아 왜적선 10여 척을 격침 시켰다. 충무공 전사 후, 임시 통제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명나라 진린 제독은 충무공 후임 통제사로 천거 했다.

난중일기(1597년 음력 4월 1일). 충무공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고 감옥에서 석방된 날의 기록이다. “옥문(獄門)을 나왔다. …이순신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줬다…” 부하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 석방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출소하자마자 술병을 들고 바로 찾아가 위로의 술잔을 나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포도대장 겸 도총관, 황해도병마절도사, 전라방어사, 함경도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했다.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인조는 좌찬성을 증직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내린다. 인터넷에서 ‘무의공 이순신’으로 검색해야 한다.

사도첨사 김완(金浣, 15461607) 충무공보다 1살 적다. 1577년 무과 급제하여 1년 군후배였다. 전라좌수영 휘하 장수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난중일기(1592년 음력 3월 20일) “사도첨사(김완)에게 공문을 보냈는데, 혼자서 수색했다고 했다. 한나절 동안에 내나로도, 외나로도, 대평두와 소평두 섬을 모두 수색하고 그 날로 돌아왔다”고 엉터리 보고를 하여 충무공 이순신을 휘하 참모 중에서 가장 먼저 화나게 한 장수다.

요즘같이 쾌속정이 없는 상태에서 그 먼 거리를 돌아 수색을 마쳤다는 건 누가 봐도 믿을 수 없었다. 사도첨사 김완이 이런 보고를 상관에게 눈 깜짝하지도 않고 하는 것은 뱃심이 대단하거나 혹은 생각이 아주 짧은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사도첨사 김완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여러 해전에서 엄청난 무공과 전과를 자랑한다.

당항포 승첩장계(임진장초, 1592년 음력 6월 14일) “2일 …이 때 순천부사 권준이 돌진하여 활을 쏴서 왜장을 맞추자 배 아래로 떨어졌고,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왜장의 수급을 벴습니다. 7일 …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격파하고 적의 수급 20급을 벴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사학자 임용한 박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은 전국시대 100년간 내전을 거치면서 그들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따라서 해전을 치루는 방식도 ‘등선육박(登船肉薄)’ 전술을 선호했다. 일단 갈고리 등으로 상대방의 배를 가까이 붙이고 넘어가 그들이 좋아하는 칼싸움으로 승패를 가렸다. 그래서 왜군은 기를 쓰고 배를 붙이려 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조금 먼 거리에서는 각종 총통, 즉 함포사격으로 배를 깨뜨렸다. 더 가까워지면 국궁의 연사와 속사 기능을 발휘하여 왜군들에게 충분한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기를 쓰고 등선육박을 하지 못하도록 피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거북선 지붕의 철침도 적들의 등선육박 전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김완 장군이 등선육박하여 왜장의 수급을 벴다는 것은 무공에 자신이 있으며, 담력이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전과는 ‘한산도 승첩장계(임진장초, 1592년 음력 7월 15일)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격파하고, 왜장을 비롯하여 수급 16급을 벴다“는 기록이 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후 김완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방장으로 출전하여 전투 중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귀국했다. 이로 인해 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받았다. 칠천량 패전 원인을 두고 원균을 비난하다가 선조에게 찍혀 파직당해 왜란이 끝난 후에야 함안군수로 재직하다 서거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거북선이 등장하는 장면. 사진=영화 스틸컷

군관 나대용(羅大用, 15561612)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였다. 고향 나주에서 거북선을 연구하던 나대용은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을 찾아갔다.

나대용의 능력을 알아본 충무공은 그를 선박 건조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대용 자신을 알아주고 신뢰하는 충무공을 만나 당시 세계 최고의 전투선인 거북선을 만들 수 있었다.

난중일기(1592년 음력 4월 18일) “순찰사의 공문이 왔다. ‘발포권관이 이미 파직됐으니, 가장(假將, 전장에서 장수의 결원이 생겼을 때, 임시로 직무를 맡기는 장수)을 정해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바로 정하여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인물평이 깐깐하기로 유명한 충무공이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나대용을 그 자리에 바로 천거했다는 것은 평소에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난중일기(1592년 음력 5월 29일) “…접전할 때, 적의 탄환이 왼편 어깨를 맞히고 등을 뚫었으나 중상에 이르지 않았다. 신의 군관인 나대용도 탄환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불행하게도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 장군 모두 총상을 당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1593년 여름 무렵 여러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총상으로 입은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흘러 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년 넘게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나대용 장군은 한산도 해전에서도 부상을 당했다. 1594년 강진현감 제수, 이어 금구, 능성, 고성 현감을 역임했다. 1611년에는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전쟁 부상이 재발하여 1612년 서거했다.

군관 송희립(宋希立, 15531623) 충무공보다 8살 적다. 1583년 무과 급제하여 7년 군후배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정걸 장군,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 건조와 수군 교육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1591년 충무공의 직속 군관이 되어 여수 지역에서 생활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희립은 형제(형 대립, 동생 정립)들과 함께 충무공 휘하에서 핵심참모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발발부터 노량해전까지 가장 오랫동안 충무공을 보좌했다. 사람들이 충무공의 ‘좌정운, 우희립’이라고 할 정도로 송희립 장군을 ‘이순신의 그림자’라고 했다.

송희립은 총무공이 해임된 후 한양 압송 때 상경했다. 이순신이 투옥돼 고문을 받을 때도 종사관 정경달, 무장 황대중과 함께 대궐 앞에서 무죄를 주장하고 상소를 올린다. 이때 우의정 정탁도 적극적으로 이순신 구명에 나선다. 결과 이순신은 사형을 면하고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된다.

송희립 3형제(형 대립, 동생 여립)는 변함없이 이순신 백의종군(1597년 음력 4월 1일) 이전과 이후에도 지근거리에서 이순신을 보좌한다. 심지어 적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내용도 난중일기 기록에 보인다.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이순신이 송희립에게 노량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묻자, 송희립은 조선군과 명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것은 노량해전으로 나타났다.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10시경. 조명연합함대 선제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되었다.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명나라 진린이 왜군의 집중포화로 위험에 처했다.

이때 이순신과 송희립 장군이 구출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노출되어 송희립은 중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새벽 2시경 전사했다. 송희립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숨기고 갑옷을 대신 입고 기와 북채를 들고 싸움을 독려하여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9년 선무원종일등공신, 1601년 양산군수, 다대포첨사, 1611년 전라좌수군절도사로 임명됐다.

어머니가 영웅을 만든다. 송희립 장군 3형제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참전하게 된 것은 홀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자식들에게 말씀하셨다. “집안일보다 나라 일을 먼저 돌봐야 한다.” (임진장초, 1592년 음력 6월 14일 계본 中에서)

이순신이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떠나는 뜻이 싫어 탄식하지 않으셨다. (난중일기, 1594년 음력 1월 12일) 영웅이 곧 어머니다.

영웅이 영웅을 만든다.

 

난중일기 1593년 하반기 : ‘광양현감 어영담관련 기록

▶1593년 7월7일. 맑다 [양력8월3일] 순천부사, 가리포첨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나고, 군사 일을 논할 때 각각 가볍고 날랜 배 15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보내어 탐색하기로 하였다.

▶1593년 7월8일. 맑다 [양력8월4일] 남해로 왕래하는 사람 조붕에게서 듣건대, “적이 광양을 친다”하여, “광양 사람들이 벌써 고을 관청과 창고를 불 질렀다”고 한다. 해괴함을 이길 길 없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어영담)을 곧 보내려고 하다가, 길 가다가 들은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사도 군관 김붕만에게 알아보도록 했다.

▶1593년 7월9일. 맑다 [양력8월5일] 남해 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광양, 순천이 이미 다 타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광양현감(어영담), 순천부사와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 등을 보냈다. 밤 1시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정을 알리는데, “실은 왜적 들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들이 왜놈 옷으로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불 질렀다”고 했다.

▶1593년 7월17일. 비가 내렸다 [양력8월13일] 몸이 대단히 불편하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왔다.

▶1593년 7월19일. 맑다 [양력8월15일] 저녁에 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광양현감(어영담)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비참하고 통탄함을 이길 길이 없다.

▶1593년 7월20일. 맑다 [양력8월16일] 병마사의 편지 및 공문과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다. 그 통첩의 사연을 보니,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광양)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본들 무엇 하랴! 통탄할 일이다. 충청수사, 순천부사, 방답첨사, 광양현감(어영담)․ 발포만호․ 남해현령 등이 와서 만났다.

▶1593년 7월24일. 맑다 [양력8월20일] 순천부사, 광양현감, 흥양현감이 왔다.

▶1593년 7월26일. 맑다 [양력8월22일]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가 왔다.

▶1593년 7월28일. 맑다 [양력8월24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1593년 7월29일. 맑다 [양력8월25일] 순천부사, 광양현감, 사도첨사, 흥양현감, 방답첨사를 불러와서 이야기했다.

▶1593년 8월2일. 맑다 [양력8월27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났다.

▶1593년 8월4일. 맑다 [양력8월29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1593년 8월6일. 맑다 [양력8월31일]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 광양현감, 보성군수, 발포만호, 이응화 등이 와서 만났다.

▶1593년 8월8일. 맑다 [양력9월2일]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 흥양현감 등을 불러 들여 복병 등에 관한 일을 같이 논의했다

▶1593년 8월10일. 맑다 [양력9월4일] 탐후선이 들어와서 임금님의 분부(宥旨)와 비변사의 공문과 감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이 방답첨사와 같이 왔다. 순천부사, 광양현감도 왔다.

▶1593년 8월15일. 맑다 [양력9월9일] 오늘은 추석이다. 우수사,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 광양현감(어영담), 낙안군수, 방답첨사, 사도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 이응화, 이홍명, 좌우 도영공 등이 모두 모여 이야기 했다.

▶1593년 8월16일. 맑다 [양력9월10일] 광양현감(어영담)이 명절음식을 갖추어 왔다.

▶1593년 8월18일. 맑다 [양력9월12일] 우영공, 정영공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순천부사, 광양현감도 와서 만났다.

▶1593년 8월20일. [양력9월14일] 아침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 광양현감, 흥양현감이 왔다

▶1593년 8월26일. 맑다가 비 오다 했다 [양력9월20일] 경상 우수사 원균이 왔다. 조금 있으니 우수사 영감과 충청수사 정걸 영감도 같이 모였다. 순천부사, 광양현감․ 가리포첨사는 곧 돌아갔다.

▶1593년 9월5일. 맑다 [양력9월29일] 충청수사 정걸의 배 곁에다 배를 대어 놓고서 종일 이야기했다. 광양현감, 흥양현감 및 우후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1593년 9월9일. 맑다 [양력10월3일] 식후에 모여 산마루에 올라가 활 3순을 쏘았다. 우수사,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모였는데, 광양현감은 아프다고 참가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비가 내렸다. (*활1순(巡)은 화살 5번 쏘는 것을 말한다)

참고자료

▷난중일기, 다빈치 지식지도, www.davincimap.co.kr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2

▷임진장초, 충무공 이순신,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sillok.history.go.kr

박준재 기자
박준재 기자
▪︎광양시니어신문 기자 ▪︎보호관찰소/소년원/위치추적관제센터에서 근무 후 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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