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장터의 함성과 서늘한 갱도를 지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푸른 바다로
지난 회차에서 사곡리 갱도의 서늘한 눈물로 아픈 노동사를 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섬진강 맑은 물과 남해의 푸른 파도가 격렬하게 몸을 섞는 곳, 광양만 태인도(太仁島)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늘날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검은 반도체’로 우뚝 선 대한민국 ‘김(海衣)’의 고향이 바로 이곳 광양 태인도입니다. 17세기 중엽, 한 몰락 양반이 고안해 낸 작은 아이디어는 인류 최초로 바다를 ‘채집’에서 ‘경작’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룩했습니다. 절망의 시대를 창의적인 지혜로 돌파해 낸 세계 최초의 김 시식지(始殖址), 태인동 궁기마을의 위대한 서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K-푸드의 신화 ‘검은 반도체‘의 유래
오늘날 한국의 김은 전 세계 120여 개국에 수출되며 고려인삼을 뛰어넘는 독보적인 ‘수출 효자’ 상품입니다. 종이처럼 얇은 김 한 장에는 단백질, 칼슘, 미네랄, 각종 비타민이 농축되어 있어 인류 최고의 천연 영양제로 평가받습니다. 전 세계에 부는 ‘K-김밥’ 열풍도 이 풍미와 영양 덕분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자연산 김을 채취해 먹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인류가 인공적으로 김을 ‘양식(養殖)’하기 시작한 시발점은 1640년대 바로 이곳 광양 태인도였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김 양식(1692년)보다 무려 50년 앞선 독자적 기술이었습니다. 즉, 광양은 세계 최초의 김 양식 발상지이자, 우리가 매일 쓰는 ‘김’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유서 깊은 문화 자산의 중심지입니다.


선비의 지조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실천한 김여익 공
광양 태인도에 인류 최초의 해양 경작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인물은 해은(海隱) 김여익(金汝翼, 1606~1660) 공입니다. 그는 뼈대 있는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청년기에 이괄의 난으로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어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던 중,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성리학적 대의명분과 선비의 지조를 목숨처럼 여기던 그는 오랑캐의 세상에서 고향을 지킬 수 없다며 인조 18년(1640년), 35세의 나이에 광양만의 외딴섬 인호도(현 태인도)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방의 은둔지에서 무기력한 글 읽기나 관념적 사유에만 침잠하지 않았습니다. 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먹거리를 풍족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두텁게 한다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참된 선비 정신을 발휘한 것입니다. 척박한 섬 환경에서 굶주리는 주민들의 고단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실천적 태도는 곧 바다 위에서 거대한 기적을 낳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섬꽂이 양식법‘과 ‘건조법‘의 창안
태인도에 정착한 김여익은 어느 날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갯벌에 표류해 있던 나뭇가지에 검붉은 해초가 빼곡히 붙어 자라는 풍경을 발견했습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풍미를 지닌 그것이 자연산 ‘해의(海衣)’임을 알게 된 그는 ‘바다에 나뭇가지를 인위적으로 꽂아두면 대량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듬해 가을, 그는 밤나무와 대나무 등을 베어다가 마을 앞 애기섬 주변 갯벌에 촘촘히 꽂아두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김 포자들이 나뭇가지에 착상하여 한겨울 동안 무성하게 자라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김 양식법인 ‘섬꽂이 방식(섶양식)’의 탄생입니다.
그는 수확한 김을 짚으로 엮은 ‘발장’ 위에 고루 펴서 말린 뒤 사각형 모양으로 떼어내는 ‘건조법’까지 세트로 개발했습니다. 섬진강 하구가 실어 나르는 풍부한 영양염류와 남해안의 따스한 일조량이 결합한 천혜의 생태적 조건을 혜안으로 꿰뚫어 보고 완벽한 제조 기술로 정착시킨 것입니다.


“태인도 김 씨가 만든 것“, ‘김‘이 된 스토리텔링
우리가 ‘해의’ 대신 ‘김’이라는 고유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 왕실과 얽힌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양식 성공으로 풍성해진 해산물을 인근 하동 장시에 내다 팔자, 사각형 마른 해초의 맛에 반한 사람들이 “이 음식을 만든 이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상인들은 “광양 태인도에 사는 ‘김 씨(金氏)’가 만든 것”이라 답했고, 백성들은 자연스레 이를 ‘김’이라 불렀습니다.
이 소문은 궁궐까지 닿았습니다. 수라상에 오른 김의 맛에 매료된 인조 임금이 정식 이름이 없다는 신하들의 말에 탄복하며, “이 음식을 만든 김여익의 성을 따서 정식으로 ‘김’이라 부르도록 하라”고 명명 전교를 내렸습니다. 한 인간의 창의적 성취를 기려 국가 최고 통치자가 그의 성씨를 음식 이름으로 하사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찬란한 역사입니다.
상업 경제의 물줄기를 바꾼 광양 김의 위상
김 양식의 성공은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흔들고 상업 교환 경제로 이행하게 만든 기폭제였습니다. 주민들은 강력한 상품 작물을 손에 쥐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기록을 보면, 당시 활발했던 광양 읍내장의 핵심 유통 품목으로 ‘광양 김’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태인도해의수세책(1861년)》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양 김은 왕실에 바치는 중요한 세금 품목이자 중국 사신들에게 선사하는 국가적 선물이었습니다. 1921년 《조선일보》 기사에 기재된 김 한 톳의 가격은 오늘날 화폐 가치로 10만 원이 훌쩍 넘는 초고가 귀빈 식품이었습니다. 어촌에서는 김 양식 서너 줄만 잘 가꾸어도 자식 대학 유학 비용과 딸 혼수품을 마련할 수 있어 ‘바다의 화폐’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라진 어장과 영모재(永慕齋), 金(김)과 鐵(철)의 조우
찬란했던 광양 김의 번영은 1981년 11월, 광양만 일대에 대규모 광양제철소 건설이 확정되며 거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낙지 모양으로 바다에 다리를 뻗고 있던 아름다운 섬 태인도는 매립 공사로 인해 육지와 연결되었습니다. 340년 동안 이어져 온 전국 최고 규모의 김 양식장은 하룻밤 사이에 차가운 콘크리트와 거대한 고로 아래로 매립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인류 최초로 김(金)을 생산하던 바다 위에, 오늘날 세계 최대의 철(鐵, 원소기호 金)을 생산하는 제철소가 들어선 현실은 묘한 역사적 상념을 불러일으킵니다. 다행히 지역 사회의 노력으로 김여익 공을 기리는 제각인 영모재(永慕齋, 전남기념물 제113호)와 사당 인호사를 중심으로 1987년 공식적인 ‘광양김시식지’가 복원되었습니다. 옛 양식장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전 세계 K-푸드 신화의 발상지라는 명맥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문화 콘텐츠로 깨워야 할 선조의 이용후생(利用厚生) 정신
우리 시니어 세대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맨손으로 황금빛 갯벌을 일구어 자식들을 키워냈던 부모님들의 강인한 ‘생활 생명력’을 몸소 체험하며 깊이 체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380여 년 전 이 차가운 바다 위에서 일궈낸 해양 개척사는 단순히 책 속에 박제된 은둔자의 신화가 아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뿌리입니다.
그동안 광양시가 기념탑을 세우고, 김 시식지 성역화와 영모재 정비, 그리고 간헐적인 전통 보존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적 명맥을 묵묵히 이어온 노력은 충분히 값지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제철소 건립으로 실제 어장과 옛 마을들이 사라진 오늘날, 이 위대한 역사적 유산이 기념비적인 박물관식 관람과 하드웨어적 유지 관리에만 머무는 것은 시니어 기자의 시선에서 깊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제는 차가운 석조물과 박제된 공간을 넘어, 전 세계가 열광하는 K-푸드의 원류라는 독보적인 자산을 현대적 감각의 ‘소프트웨어 혁신’으로 확장해야 할 때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상시로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체험형 에듀테인먼트 콘텐츠를 구축하고, 광양 김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담은 미식(美食) 융복합 축제를 기획하며, 현대적인 스토리텔링을 입힌 고부가가치 가공품을 개발하는 전방위적 ‘문화 브랜딩’에 광양시와 유관 기관이 더욱 공세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이처럼 과거의 문화 자산을 현대의 실용적 가치로 환산해 내는 역동적인 시어야말로, 선조들이 남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적 선비 정신을 오늘날 가장 온전하게 상속하는 길이자 사라진 고향의 흔적을 채워나가는 따뜻한 예의일 것입니다.
[다음 제26회 예고]
태인도의 당당한 해양 개척사를 뒤로하고, 다음 회차에서는 산업화의 거친 물결 속에 섬 전체를 내어주어야 했던 이웃 섬으로 향합니다. 1980년대 광양제철소 건립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눈물 어린 이주의 역사를 써야 했던 민초들의 애환, ‘금호도 이주민과 광양제철소가 만든 시대의 명암(明暗)’ 편이 이어집니다. 국가 발전의 화려한 그늘 뒤에 숨겨진 이주민들의 가슴 저린 희생과 정착사를 집중 조명할 예정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광양 김 시식지 관련 역사적 지표 및 문화 자산 현황
| 구분 (유적 및 장소) | 역사적 의미 및 관련 내용 | 시대적 배경 및 변천 | 현재 상태 및 위치 |
| 광양 김시식지 | 인류 최초로 김 양식법을 창안한 역사적 발상지이자 문화 자산 | 1640년 정착 ~ 1987년 기념물 지정 | 광양시 태인동 김 시식지1길 57-6 (전남기념물 제113호) |
| 영모재 (永慕齋) | 최초 창안자 김여익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서 깊은 제각 | 1919년 건립 ~ 후속 보수 완료 | 시식지 내 위치 (묘표 등 역사 자료 보관) |
| 인호사 (仁湖寺) | 김여익 공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추모 제례를 올리는 사당 | 김 시식지 성역화 사업 시 건립 | 시식지 내 위치 (매년 음력 10월 향사 봉행) |
| 용지 큰줄다리기 | 김 양식의 풍작과 안녕을 기원하며 이어온 대동 축제 | 일제 말기 중단 ~ 1993년 고증 복원 | 용지마을 큰줄다리기 보존회 주관 (정월대보름 재현) |


![[광양시니어클럽, 세대 잇는 따뜻한 손길(하)] 보육시설 및 아동시설봉사단](https://gy-senior.com/wp-content/uploads/2026/05/우렁각시3인방-1-1-218x150.jpg)

![[기자수첩] “사계절 넘은 아름다움 담다”…광양 ‘일곱계절’ 정원 이야기](https://gy-senior.com/wp-content/uploads/2026/06/일곱계절-덩굴장미-218x15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