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하늘과 땅, 사람을 잇고 민초의 삶을 지켜온 신령한 그늘
마을 입구나 나지막한 언덕배기, 혹은 동네 어귀에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서 있는 거목을 우리는 ‘당산나무(堂山木)’라 부른다. 수령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느티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소나무들은 단순한 수목(樹木)을 넘어 마을의 수호신이자 수호림으로 민초들과 호흡을 함께해 왔다.
광양시는 산림보호법에 따라 느티나무와 팽나무 등 노거수 약 149그루를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광양 땅 곳곳에 자리 잡은 당산나무들은 지형의 결함을 보완하고 액운을 막아내는 ‘비보림(裨補林)’이자 ‘수구막이’ 역할을 맡아왔다. 거친 세파 속에서 마을 전체를 감싸 안아주던 따스하고 묵직한 당산나무의 결마다 서린 민초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Ⅰ. 한 고을의 안녕을 감싸 안은 신령한 울타리
호북마을 할매 당산나무 — 호랑이를 막던 성터의 수호신
연일 폭염경보가 이어지는 푹푹 무더운 여름날, 이른 아침 호북마을 도심 속 휴식처를 찾았다. 짙푸른 숲 그늘이 드리워진 정자와 당산나무, 아담한 놀이터가 어우러진 쉼터에는 이미 몇몇 주민들이 찾아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조선시대 광양읍성을 축조할 당시 동·서·남쪽에는 문을 두었으나, 북문만큼은 만들지 않고 벽을 쌓아 폐쇄했다. 바다와 접한 지형적 요인과 더불어 북쪽 백운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호랑이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처럼 성의 북쪽에 위치해 호랑이를 대비한다는 의미를 담은 ‘호북(虎北)’마을에는 마을의 허한 기운을 막고 안녕을 지켜줄 비보림(裨補林)으로서 도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 곧 ‘할매 당산나무’를 심고 정성껏 모셔왔다.
38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이 팽나무는 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오래전 부패한 부위를 정밀 치료하고 자람터를 정성스레 정비한 덕분에, 지금은 한층 풍성해진 초록 지붕을 뻗어 올리고 있다. 오늘날 우산각인 ‘호북정’과 놀이터가 어우러진 쉼터에서 당산나무는 그 수려한 가지를 넓게 펼친 채, 뛰놀거나 쉬어가는 마을 사람들을 자상하고 든든한 품으로 보듬어 안아주고 있다.

세풍리 해창마을 팽나무 — 관군의 사기를 북돋운 호국의 울타리
광양읍 남서쪽에 자리한 세풍리(世豊里) 해창(海倉)마을은 본디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집을 짓고 길을 내어 ‘돌고지’라 불리던 해안가 마을이었다. 1925년 간척사업을 거치며 바다가 기름진 들녘으로 변하고 곡식을 적재하던 조창이 들어서면서 ‘해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마을회관 옆을 우뚝 지키고 서 있는 수령 440년의 팽나무는 변함없는 자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높이 20m, 가슴높이 둘레 5.6m에 이르는 이 팽나무는 해창마을의 든든한 당산나무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마을의 평안과 만복을 빌며 굿판(해창메구)을 벌일 때, 제사 음식에 쥐가 먼저 손을 대면 액운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마을 민초들이 이 당산나무 주변을 돌며 꽹과리와 북을 울려 왜적과 맞서 싸우던 관군에게 강렬한 사기를 불어넣었다는 전승은, 이 나무가 단순한 보호수를 넘어 호국의 염원과 민족의 단합이 집결하던 신성한 울타리였음을 일깨워준다.

Ⅱ. 학문의 숭고함과 신령한 절개를 품다
광양향교 은행나무 — 500년 유학의 정신을 품은 행단(杏檀)
광양향교 명륜당과 대성전 옆에는 수령 520여 년에 달하는 웅장한 노거수 은행나무가 당당히 서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檀)’의 유래처럼, 향교의 은행나무는 유교와 학문의 숭고함을 상징한다.
자체 향으로 벌레를 타지 않는 은행나무의 특성은 옛 유생들에게 ‘불의에 물들지 말고 바르게 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수백 년간 유생들의 글소리와 지역의 학맥을 지켜본 은행나무는, 매년 11월이 되면 한옥의 기와지붕과 어우러져 황금빛 낙엽 장관을 이루며 광양의 인문학적 깊이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하조마을 용란송과 본정 소나무 — 기암과 어우러진 신령한 절개
성불계곡과 반월계곡이 만나는 봉강면 하조마을 입구에는 용의 알을 닮은 둥근 바위를 품고 용틀임하듯 자란 ‘용란송(龍卵松)’이 있다. 수령 160~170년, 가슴높이 둘레 2.6m의 소나무로, 용 비늘을 닮은 껍질이 거대 바위를 포옹하듯 감싸 안은 형상이 단연 이채롭다.
용이 알을 품고 승천할 것이라는 전설과 함께, 나무에 간절히 소원을 비면 이루어지고 마을에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다는 속설이 전해져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한편 광양읍 사곡리 본정마을 산86번지 능선에 자리한 전라남도 보호수 소나무 역시, 모진 세파를 견뎌낸 푸른 절개로 광양 들녘을 굽어보며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Ⅲ. 호국의 역사와 민초의 삶을 품은 생명의 숲
유당공원 이팝나무 — 읍성을 감싼 군사보안림과 희망의 쌀밥
조선 중종 23년(1528년) 광양현감 박세후가 광양읍성을 쌓을 당시, 멀리 바다에서 성이 보이지 않도록 심었던 군사보안림이 바로 유당공원의 모태다. 성은 사라졌으나 팽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자리를 지킨 ‘광양읍수와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35호)’는 조상들의 풍수 지혜와 방풍림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한다.
초여름 입하(立夏) 무렵, 나무 전체를 하얗게 뒤덮는 꽃이 마치 흰 쌀밥(이밥) 같다 하여 이름 붙은 이팝나무는 배고픈 민초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현재 유당공원과 인동숲을 아우르는 광양읍수는 그 역사적·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구역이 확대·보존되고 있으며, 수백 년 동안 바닷바람과 태풍을 막아주던 초록 울타리로서 시민들에게 더없이 안락한 휴식처를 내어준다.
이러한 수호림의 역사적 숨결은 광양읍 내우마을로도 이어진다. 오랜 세월 마을의 안녕과 희로애락을 지켜온 내우마을 느티나무 군락은 마을의 든든한 당산이자 주민들의 정겨운 쉼터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아가 임진왜란 참전 의병 형제의 혼이 서린 봉강면 신촌마을(형제의병장마을)의 당산 팽나무 역시 백운산 자락의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져,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수호목이자 생태 자원으로 우리네 삶의 자리를 풍요롭게 채우고 있다.


Ⅳ. 시니어, 오래된 고목 아래서 시대의 지혜를 묻다
정월 대보름이면 왼새끼 금줄을 둘러치고 한 해의 무사태평을 빌던 당산제(堂山祭)의 함성은 도시화의 물결 속에 조금씩 옅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선다고 해서 마을이 완성되지 않듯, 공동체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 땅의 역사를 함께해 온 당산나무 아래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당산나무는 무수한 풍상을 견디면서도 군소리 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태풍에 가지가 꺾여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푸른 순을 틔워내는 그 진중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준다. 청춘의 피땀으로 이 고장을 일구어낸 어르신들의 삶이 바로 당산나무의 나이테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바람이 불면 당산나무의 수만 가지 잎사귀들이 사각거리며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소박하고도 숭고한 울림을 가슴에 담으며,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삶의 지혜와 공동체의 따스한 온기를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다음 회차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제40회에서는 백운산이 품은 천혜의 치유 공간, ‘백운산자연휴양림’으로 찾아갑니다.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생태적 가치와 휴식의 미학, 그리고 지친 현대인에게 전하는 인문학적 치유의 메시지를 깊이 있게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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