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 우두마을에서 지곡교를 지나 들어서면, 옛날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던 지곡(지실)마을이 백운산 일자봉과 봉강저수지를 안고 포근히 펼쳐진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붓 끝을 받쳐주던 고즈넉한 골짜기, ‘지실’의 문을 열며

땅의 지리적 명당과 유서 깊은 마을을 논할 때 예부터 빼놓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향토 자원이 있다.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운 터전을 일컫는 ‘10경(景) 8포(浦) 12실(室)’이다. 여기서 ‘실’은 깊은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골짜기나, 그 유연한 품속에 자리 잡은 명당 마을을 뜻하는 정겨운 우리말 고유어다.

사라실, 대실, 밤실 등 저마다 독특한 전설과 생업을 품은 12실 가운데에서도, 봉강면 지곡리(紙谷里)에 위치한 지곡마을은 단연 독보적인 문화적 위상을 차지한다. 해발 400m의 일자봉 산자락 아래 따스한 햇살을 받고 서 있는 이 마을은 예부터 우리말로 ‘닥실’ 혹은 ‘지실(紙室)’이라 불렸다.

한자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 민초들은 닥나무가 무성한 골짜기라 하여 입에서 입으로 ‘닥실’이라 불렀고, 기록을 숭상하던 선비들은 ‘종이 지(紙)’ 자에 ‘집 실(室)’ 자를 써서 ‘지실’이라 적었다.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단순한 자급자족형 농촌 마을에 머물지 않았다. 먹과 종이가 금보다 귀하던 시절, 백운산이 내어준 청정한 물줄기와 골짜기마다 지천으로 자생하던 닥나무(뽕나무)를 밑천 삼아 호남 기록 문화의 바탕이 되는 한지를 빚어내던 고귀한 ‘문명의 생산지’였다.

조선 시대인 1789년 작성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지곡촌(紙谷村)’으로 처음 명확히 기록된 이후, 1917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오늘날 지곡리(芝谷里/紙谷里)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마을 안길에 들어서면 여전히 닥나무 껍질을 삶던 아늑한 김과 선비들의 정갈한 묵향이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봉강저수지(백운저수지)의 넉넉한 물길 덕분에 대대로 풍요를 누려온 지곡마을의 황금빛 들판. 가울빛으로 물든 벼가 고개를 숙인 논 너머로 마을의 정겨운 집들과 백운산 줄기가 어우러져 전통 농촌의 고즈넉함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전해준다. 사진=문성식
백운산의 시원한 물길을 조절하며 마을의 풍요와 문화 생산을 도왔던 부현마을의 문행기. 물을 가두고 터트리며 벼를 키우고 닥나무를 삶아 한지를 만들어내던 옛 주민들의 지혜와 삶의 숨결이 굳건히 남아있다. 사진=문성식

백운산 계곡물에 씻어낸 한지, 호남 사림의 문향(文香)이 되다

지곡마을이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으뜸가는 한지 생산지로 손꼽히며 진상품을 내던 터전이 된 데에는 천혜의 자연조건이 바탕에 있었다. 한지의 원료가 되는 질 좋은 닥나무가 풍부했던 것도 이유지만, 무엇보다 백운산 골짜기에서 사계절 내내 흘러내리는 오염되지 않은 1급수의 차갑고 맑은 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닥나무 껍질을 벗겨 가마에 삶고, 이를 짓이겨 들틀에 걸러 세심하게 씻어내는 제지(製紙) 과정은 물의 투명도와 수온이 성패를 좌우한다. 지실마을 사람들은 백운산 맑은 물에 닥나무 섬유를 번갈아 씻어내며 질기고 고운 한지를 빚어냈다. 여기서 만들어진 한지는 결이 비단처럼 고르고 수백 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는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이 종이들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영·호남 의병들의 격문(檄文)과 군사 문서를 적어 내리는 혈맥이 되었고, 평시에는 호남 유학자들의 깊은 사상과 학문을 세상을 향해 퍼뜨리는 소중한 바탕이 되었다. 지실의 한지는 단순히 글씨를 받는 종이를 넘어, 시대의 기상과 유학의 도맥을 떠받치는 정신적 창구였던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마을의 이러한 역사적 내력이 현대에 이르러 특별한 인재 배출의 전통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마을 규모에 비해 유독 교사와 행정공무원 등 ‘글과 문서’를 다루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마을 어르신들은 이를 두고 “조상들이 밤낮으로 종이를 만지고 선비들의 글씨를 받쳐주던 영험한 기운이 마을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 덕분”이라며 소탈하면서도 깊은 자부심을 내보이곤 한다.

지곡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한지를 만들던 ‘지실(조실)’이라는 유구한 역사적 유래와 함께, 3대가 모여 살며 어르신을 존경하고 귀촌인들과 어우러지는 따뜻한 마을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지곡마을 골목길 담장에 그려진 ‘닥종이의 꿈을 품은 마을’ 벽화. 닥나무로 한지를 짓던 마을의 옛 유산과 자부심을 예쁜 그림으로 담아냈으며, 담장 위로 탐스럽게 열매를 맺어가는 감나무와 어우러져 한 가뭄의 정취를 더해준다. 사진=문성식

신재 최산두의 기상과 황현의 절의가 깃든 선비의 터전

지곡마을의 인문학적 깊이는 종이 생산이라는 장인 정신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일대는 기묘사림(己卯士林)의 거두이자 호남 유학의 대문장가인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선생의 사상적 유산이 깊게 서린 유학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웃한 부저리 저곡마을(닥실)과 지곡마을은 하나의 거대한 분지를 이루며 역사·문화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최산두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겨든 조문객들의 말(馬)이 들판을 가득 채워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하여 오늘날까지 이 넓은 평야를 ‘말들이(지곡들)’라 부른다. 마을 경계에 위치한 봉양재(鳳陽齋)는 최산두 선생의 학문과 의리 정신을 기리는 향사 공간으로, 지금도 매년 봄·가을 유림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구한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매천 황현(黃玹) 선생의 넋을 기리는 영모재(永慕齋) 역시 지실마을의 호국·선비 정신을 증언한다. 매천 선생은 이 지역 순흥안씨 문중의 효자 안진묵(安鎭默) 공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하여 직접 『효자안공행장(孝子安公行狀)』을 지어 현판으로 남겼는데, 이는 마을이 품은 유교적 도덕관과 지극한 효(孝) 전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와 어버이를 향한 지극한 효심이 이 고즈넉한 골짜기 안에서 한데 어우러져 온 것이다.

예부터 닥나무를 심어 정성껏 한지를 생산하던 지곡마을의 고즈넉한 골목길. 잘 정돈된 주택들과 마을 회관 부근의 따스한 안길 위로 백운산 푸른 산자락과 맑은 가을 하늘이 안겨 있어, 대대로 이어져 온 살기 좋은 마을의 평화로움을 전해준다. 사진=문성식
지실(지곡)마을에서 닥실(저곡)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당저마을 전경. 봉강저수지 축조로 일부 가구가 수몰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최근 저수지 일대가 휴양관광 테마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면서 정겨운 벽화와 정갈한 집들이 어우러진 휴식과 힐링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문성식

닥나무 골짜기에서 피어난 정겨운 삶, 「딸타령」과 민초들의 온기

지실마을이 품은 역사는 준엄한 선비의 글소리나 유학적 엄숙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기를 어르며 부르던 민초들의 다정한 노랫소리 속에도 지곡리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곡마을에서 전승되는 아기 어르기 소리인 「딸타령」은 남성 중심의 전통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막내딸을 향한 애틋하고 정겨운 사랑을 담고 있다.

“딸아 딸아 막내딸아, 곱게 먹고 곱게 커라.

오동나무 장농에다 구와장석 걸머주마.

삼사월에는 너물딸, 오뉴월에는 냉수딸,

동지섣달에는 숭늉딸… 어서 먹고 어서 커라.”

봄에는 입맛을 돋우는 나물처럼 상큼하고, 여름에는 갈증을 풀어주는 냉수처럼 시원하며, 겨울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숭늉처럼 부모의 삶을 보듬어주는 딸에 대한 애정 어린 노랫말은 참으로 정겹다.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종이를 말리던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가족을 지켜내고 삶을 긍정하던 지실 사람들의 따스한 심성이 노랫가락 위에 고스란히 얹혀 있다.

신재 최산두 선생의 태실이 있는 지곡마을의 닥나무와 백운산 맑은 물로 한지를 가공하던 저곡마을(닥실)의 수령 깊은 보호수와 정자. 우거진 녹음 아래 정겨운 어르신의 발걸음과 모빌리티가 어우러져 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따뜻한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광양 12실(室) 중 하나인 저곡(부현) ‘닥실마을’의 유래 안내판. 1482년 신재 최산두 선생이 태어난 역사적 터전이자, 닥나무가 많아 ‘닥실(저곡)’이라 불리며 한지 생산의 바탕이 되었던 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지명 변천사가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사진=문성식

백운저수지의 수몰 역사와 오늘에 피어난 ‘친환경 부추’

지곡리의 역사가 언제나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61년 광양읍의 젖줄이라 불리는 백운저수지(봉강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지곡리에 속했던 토점(사구마을), 작정, 조양, 당저마을의 수십 가구가 수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옹기를 굽던 토점의 가마터와 까치들이 둥지를 틀던 대밭은 물 아래로 잠겼지만, 마을 사람들은 터전을 넓히고 정을 나누며 수몰의 상흔을 지혜롭게 극복해냈다.

오늘날 지곡마을은 과거의 역사를 디딤돌 삼아 봉강면에서 가장 활력 넘치는 친환경 농업 공동체로 진화했다. 과거 백운산 맑은 물로 한지를 씻어내던 조상들의 장인 정신은, 이제 동일한 맑은 물과 풍부한 일조량을 바탕으로 전국 최고 품질의 ‘친환경 부추’를 재배하는 농가들의 고집스러운 정성으로 이어졌다. 잎이 넓고 향이 진한 지곡 부추는 전국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며 마을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잔잔한 물결 아래 수몰의 아픔과 옛 추억을 품고 있는 봉강저수지(백운저수지)의 전경. 1961년 저수지 축조로 토점, 작정, 조양, 당저 등 정든 자연마을들이 물 아래로 잠겼지만, 호숫가를 따라 형성된 지실(지곡), 닥실(저곡) 등 주변 마을들은 백운산 산자락과 수변 풍경이 어우러져 여전히 고즈넉하고 아늑한 풍광을 자랑한다. 사진=문성식
백운산 봉강계곡의 맑은 물이 봉강저수지로 흘러들어 들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시절, 풍요로운 수확을 함께했던 부현(저곡)마을 농가의 옛 벼 탈곡용 풍로. 손때 묻은 붉은 녹 자국 속에서 고되었지만 넉넉했던 그 시절의 온기와 옛 추억을 외로이 간직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닥나무 향 대신 흐르는 정겨운 안길을 걸으며

세월이 흘러 한지를 찧던 맷돌 소리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고, 닥나무를 삶던 가마터는 사라졌다. 그러나 백운산의 푸른 기운과 신재 최산두 선생의 기상, 그리고 이웃을 보듬는 정겨운 삶의 온기는 여전히 지실마을 안길마다 훈훈하게 흐르고 있다.

한지 위로 붓글씨를 써 내려가듯, 오늘을 살아가는 주민들이 정성껏 써 내려가는 지곡리의 새로운 역사는 여전히 푸르고 청정하다. 닥나무 향 대신 친환경 부추 향과 사람 냄새가 가득한 지실마을의 고즈넉한 안길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삶의 진정한 휴식과 인문학적 여운을 건네주는 소중한 길목이다.

[다음 회차 예고] <길 위의 광양사> 제6부 광양의 문화를 찾아서

그동안 광양의 땅과 마을에 깃든 지명을 따라 걸어온 <길 위의 광양사>가 제50회를 기점으로 큰 전환점을 맞아 제6부 ‘광양의 문화’의 문을 엽니다. 남도의 젖줄 백운산과 섬진강이 품어낸 유학의 기상과 선비 정신, 민초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던 구전요와 풍속, 그리고 오늘날까지 손끝으로 이어져 내려온 무형유산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굽이마다 빛을 발해온 광양 고유의 예향과 정신문화의 정수를 찾아 떠납니다. 다음 제51회에서는 백운산의 맑은 기운을 머금고 천년의 세월을 이어온 광양 문화의 깊은 뿌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조명할 예정이니, 선조들의 지혜와 멋이 흐르는 새로운 기행길에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동행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