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매화 향기처럼 고결했던 마지막 선비
우리는 지난 시간, 백운산 자락의 험준한 산세에 몸을 숨기고 총칼을 들어 침략자들에 맞섰던 의병장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구국의 길이 오직 무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날카로운 붓끝으로 역사의 진실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무너져가는 국권 앞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목숨으로 증명해낸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광양이 낳은 불세출의 문장가이자 사학자인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선생입니다. 오늘은 봉강면 석사리에 자리한 매천 생가와 역사공원을 찾아,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다”며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그의 고결한 삶과 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을 되짚어봅니다.


관직 대신 ‘역사의 증인‘을 선택하다
매천 선생은 1855년 광양현 봉강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던 그는 1888년 생원회시에 장원급제하며 실력을 증명했으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조정의 모습에 절망했습니다. “어찌 나를 귀신 나라의 무리에 들어가게 하느냐”며 관직을 마다한 그는 구례의 작은 서재 ‘대월헌’에 은거하며 붓을 들었습니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편년체 사서입니다. 단순히 공식 기록을 옮긴 것이 아니라, 당시 떠돌던 소문과 친일파들의 준동, 일제의 침략상을 날카로운 비판 의식으로 담아냈습니다. “매천의 붓 아래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역 없는 비판을 가했던 그의 기록 정신은 오늘날 구한말 역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보물 같은 사료가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구실“,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접한 매천 선생은 통분하며 9월 8일 자결을 결심합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겼습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찌푸리네 /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제는 망해버렸구나 /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렵구나”
선생은 9월 10일 새벽,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벼슬 한 번 하지 않은 ‘백성’이었기에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으나,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했는데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며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결이 아니라, 선비로서의 ‘언행일치’와 ‘인(仁)’을 완성하는 숭고한 저항이었습니다.


매천의 정신이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매천의 순국은 당시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조선 사회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선비와 지식인을 일깨웠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순국에 감동하여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시네”라는 추모시를 남겼고, 그의 저서들은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독립 의지를 다지는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기록의 힘을 증명하다, 선생이 목숨을 걸고 남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수집한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첩인 『수택존언』은 항일 투쟁의 객관적 증거가 되어 오늘날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교육 구국의 실천, 자결 전, 그는 구례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하여 신식 학문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는 무력 투쟁 못지않게 실력을 키워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그의 선견지명을 보여줍니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어른의 무게
“매천 생가 마루에 앉아 선생의 초상화를 마주하니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새삼 느껴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지식만큼 책임지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 시니어들은 이 사회의 산증인이자 지식인입니다. 매천 선생이 붓으로 시대를 깨웠듯,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삶의 지혜를 정직하게 후대에 전수하고, 잘못된 것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벼슬도 없던 ‘백성 황현’이 보여준 당당한 기개는, 우리가 남겨야 할 뒷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현장 스케치, 광양 봉강면 석사리 매천 유적지
매천 역사공원, 묘지 앞의 능수매화나무는 선생의 지조를 상징하듯 묵묵히 자리를 지킵니다. 조부부터 아들까지 4대가 나란히 잠든 묘역은 단아하면서도 엄숙합니다.
생가(봉강면 매천로 829), 초가 5칸의 소박한 생가에는 선생에 관한 서책과 생활도구가 남아있습니다. 생가 마루에 남은 빗물 얼룩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나, 보수 안내문은 이 소중한 정신을 대대로 이어가려는 우리 세대의 수고와 정성을 느끼게 합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가 마주한 그 소박함이 오히려 선생의 청렴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듯했습니다.
마치며, 매화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천 선생은 자결 전 독약을 마시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죽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구나”라며 자신의 무력함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야말로 그를 위대한 성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만은 팔지 않겠다는 그의 선비 정신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으며 고뇌하던 매천의 진심이, 오늘을 사는 우리 광양 시민들의 가슴 속에도 은은한 매화 향기처럼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다음 제20회 예고]
매천 황현 선생이 ‘붓’으로 시대를 기록했다면, 붓 대신 ‘카메라 셔터’로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대목을 포착해낸 거장이 있습니다.
한국 사진계의 선구자, 이경모(李慶模, 1926~2001) 작가입니다. 여순사건의 비극부터 평범한 이웃들의 얼굴까지, 렌즈를 통해 ‘역사의 목격자’가 되었던 그의 치열한 삶을 조명합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기록으로 남긴 이경모 작가의 이야기, 다음 호에서 이어집니다.
[참고 정보]
장소: 광양시 봉강면 매천로 829 (매천 황현 생가 및 매천역사공원).
주요 저서: 『매천야록』, 『오하기문』, 『매천집』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