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서론-광양의 동과 서, 교육의 등불이 동시에 켜지다
지난 14회에서 살펴본 광양읍권의 술재 박희권 선생이 백운산 봉강천변의 거연정을 중심으로 근대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면, 섬진강 줄기가 굽이치는 다압면에는 감호정(鑑湖亭)을 세운 김지섭(金之攝, 1798~1862)이 있었습니다.
광양의 서쪽(읍권)과 동쪽(다압권)에서 동시에 타오른 교육의 열풍은, 광양이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구한말 정신적 자립을 꿈꾸던 ‘지식의 성지’였음을 웅변합니다. 오늘은 거울 같은 섬진강 물결 위로 선비들의 고뇌가 점철된 감호정으로 길을 나섭니다.
김지섭의 ‘사유’가 낳은 공간, 마을의 누추함을 학문으로 씻다
전남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염창마을 산등성이에 오르면 맑은 강물을 거울삼아 서 있는 ‘감호정(鑑湖亭)’을 만납니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닙니다. 조선 후기 광양의 선비 김지섭에 의해 1839년(기해년) 창건된 지성의 요람입니다.
그는 비록 화려한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고향을 향한 애정만큼은 누구보다 깊었습니다.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 고향의 ‘지적 자치’에 전념한 그는 “마을의 누추함을 씻고 후학을 양성하겠다”는 일념으로 감호정을 세웠습니다.
당시 중앙 정치가 혼탁해지고 지역 교육이 소외되자, 그는 사립 교육 기관인 ‘서숙(書塾)’으로서 감호정을 개방했습니다. 이곳에서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인간의 도리를 설파한 것은 공교육(향교)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섬진강 변방 마을에 학문의 기운을 불어넣은 진정한 ‘지적 자치’의 실현이었습니다.
『매천야록』의 산실, 감호정 마루에서 쓴 ‘지식인의 양심’
김지섭이 구축한 감호정의 네트워크는 아들 김응란(金應蘭) 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룹니다. 감호정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매천 황현입니다. 그는 감호정의 2대 주인 김응란과 형제 같은 교분을 나누며 이곳을 안방처럼 드나들었습니다.
기록의 탄생- 매천은 구례와 이곳 감호정을 오가며 수많은 선비와 시국을 논했습니다. 그 치열한 담론의 결과물이 바로 한국 근대사의 보물인 『매천야록(梅泉野錄)』입니다. 즉, 감호정은 매천이 중앙 정치의 부패상과 민중의 여론을 꼼꼼히 수집하던 ‘지성적 정보 센터’였던 셈입니다.
중건기에 담긴 비장미- 1900년 매천이 쓴 ‘감호정 중건기’에는 “그대는 어찌 나에게 도깨비 같은 나라의 미치광이 장난을 하라는가”라며 관직 제안을 거절했던 그의 서슬 퍼런 지조가 서려 있습니다. 감호정 마루는 그가 썩어가는 세상을 향해 붓을 휘두르기 전, 마음을 다스리던 사유의 요람이었습니다.


영·호남 지식인의 허브, ‘광제사‘와 문화적 저항
김지섭이 닦아놓은 토양 위에 그의 손자 김응란은 시사(詩社)인 ‘광제사(光霽社)’를 결성했습니다. “시가 있으므로 모임이 있다”는 그들의 정신은 암울한 시대에도 문화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사회적 질서가 되었습니다.
초월적 교류- 이곳에는 광양뿐 아니라 하동, 남해, 사천, 순천, 구례, 남원에 이르는 영·호남 지식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명실상부한 남도 문인들의 ‘지성적 허브’ 역할을 한 것입니다.
문화 플랫폼- 정기적인 백일장과 시회(詩會)가 열렸던 감호정은 당시 광양을 중심으로 한 ‘남도 지성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들이 나눈 시문은 단순한 문학을 넘어, 국권 침탈의 위기 앞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려는 ‘정신적 방어선’이었습니다.
광양 최초 근대 교육의 산실, 다압동광학교로의 계승
김지섭의 교육 철학은 20세기 초 근대 교육의 물결 속에서 찬란한 결실을 봅니다. 감호정에서 길러진 인재들과 그 교육적 토양은 1907년 3월, 광양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다압동광학교(多鴨東光學校)의 설립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광양읍의 희양학교(현 광양서초등학교)보다 6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섬진강 변방의 작은 정자에서 시작된 배움의 열기가 어떻게 지역 근대화의 선봉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김지섭이 심은 ‘가르침의 가치’가 세대를 거쳐 지역 사회를 깨우는 등불이 된 것입니다.
■ 광양 교육의 입체적 대비– 광양읍권 vs 다압권
| 구 분 | 광양읍권 (거연정) | 다압·섬진강권 (감호정) |
| 중심 인물 | 술재 박희권 | 김지섭 (손자 김응란) |
| 교육 성격 | 전통 유학 기반의 근대 교육(사립학교) | 서숙 기반의 인문·지성 네트워크(시사) |
| 현대적 결실 | 광양서초등학교 (1907.9) | 다압동광학교 (1907.3) |
| 사회적 역할 | 지역 내 인성 함양 및 인재 양성 | 영·호남 지적 교류 및 역사 기록(매천야록) |



족보바위 아래 흐르는 인고의 세월
감호정을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족보바위(설통바구)는 김지섭 가문과 마을 주민들이 겪어온 현대사의 풍파를 묵묵히 증언합니다. 전란 중 가문의 뿌리인 족보를 바위틈에 숨겨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절박함은, 선비에게 가치관이 목숨보다 소중했음을 보여줍니다.
여순사건의 아픔 속에서도 마을과 감호정이 폐허를 딛고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김지섭이 심어놓은 ‘가르침의 의지’가 후손들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붓은 꺾여도 정신은 강물처럼 흐른다
김지섭이 세운 감호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광양의 선비들이 난세를 견디고 미래를 준비하던 ‘사유의 용광로’였습니다.
기자는 감호정 대문 돌계단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다봅니다. 인근 산수유가 붉게 물들 무렵, “지식인 노릇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떠난 매천 황현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 길을 묵묵히 닦았던 김지섭의 의지가 매천의 목소리와 겹쳐 강물 위로 흐릅니다.
주인들은 가고 보이지 않지만, 홀로 자리를 지키는 감호정은 여전히 섬진강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정자에 깃든 사유와 질서를 현대적 가치로 새롭게 피워내는 일입니다.
현장에서 감호정을 지키고 있는 김지섭의 후손, 올해 여든다섯의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기자의 손을 붙든 노부부는 간절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자신들이 눈을 감기 전, 감호정이 ‘광양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것을 보는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감호정이 가문의 소유를 넘어, 지역사회의 공동 자산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숭고한 염원이기도 합니다.
김지섭이 터를 닦고, 매천이 기록하며, 후학들이 학교를 세웠던 이 길. 15회차 연재를 마무리하며 기자는 깨닫습니다. 광양의 교육은 화려한 건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집요한 사유‘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참고 정보]
감호정 위치-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금천리 염창마을 산등성이에 위치
특징-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조망이 일품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건물 내부에는 매천 황현이 쓴 ‘감호정 중건기’를 비롯하여 당대 문인들의 시판(詩板)이 다수 걸려 있어 ‘문학적 기록 보관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본다.
주변 볼거리- 족보바위(설통바구), 매천 황현 생가 및 사당, 하동 송림과 섬진강 자전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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