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 출신 독립운동가 황병학 의병장은 일제강점기 백운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순국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미비하고 기념 시설도 흩어져 있어 역사적 재조명이 시급하다. 기자는 현장을 탐사하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며 잊혀진 그의 흔적을 추적했다. 황병학 의병장의 생애와 업적은 지역 공동체가 반드시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잊혀진 의병장을 찾아서
잊혀져 가는 광양 의병활동을 주도한 황병학 의병장, 구전 되어온 황병학 의병장의 의병활동을 진술해 줄 사람들을 찾기에는 지금도 어려웠다.
진상면 두꺼비 산란지 비촌저수지에서 취재 중 우연하게 황병학 의병 백운산전투비를 발견했다.
황병학 의병은 1905년 일제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만행을 좌시할 수 없어 일제를 척결하고자 광양 일대의 의병을 수합하여 백운산에 주둔했다. 1908년 일본군의 본진이 있던 망덕포구를 기습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수척의 왜선을 불태웠으며, 다수의 총기를 노획했다. 이후 일본군의 강한 압박으로 1909년 의병을 해산하고 여수, 순천, 고성 등지에서 피신 하다가 고흥 출신 기산도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1919년 황병학은 만주로 망명하여 용정, 영고탑, 홍개호, 흑룡강 등지에서 독립군 부대에 가담하여 전투 활동을 하다가 1923년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지령을 받고 국내 잡입 중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발각, 평양 형무소에서 4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55세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 공적으로 1968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1977년 묘소를 진상면 비촌에서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기록 없는 문화원과 초라한 안내판
황병학 의병장의 기록을 찾기 위해 광양문화원을 찾았으나 몇 줄의 문장 중 망덕포구 전투 기록을 확인했다. 광양문화원 안내에 따르면 “황병학 의병장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서 “혹시 시청에 가면 모르겠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망덕포구에서 황병학 의병장의 전투기록을 찾아 헤매던 중 망덕포구 전어잡이 안내판이 설치된 데크 계단 왼편에 있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황병학 의병 전투지-망덕포’ 안내판만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근래 윤동주 유고시집 보존가옥과 배알도, 배알도 수변공원을 연계한 많은 관광객이 망덕 포구를 찾고 있지만, 의병활동으로 일어나 망덕포구에서 일제 만행을 처단했던 황병학 의병장을 대부분 관광객들은 지나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팀과 보고서, 현장조사로 이어지다
광양시 문화예술과 문화재팀에 황병학 의병장에 대한 기록이나 현충시설에 대한 문의 결과, 특별히 관리되는 것은 없고 인터넷 검색 결과 “2012년에 실시한 국가수호자 독립운동 사적지 및 격동기 현장 기초 조사 보고서인 ‘광양의 호국항쟁 사적 조사 연구용역 최종 보고서’에 기록이 있으니 파일을 보내주겠다”라고 말했다. 보고서에서 황병학을 검색하고 자료 내용에 따라 현장조사를 했다.
비석은 있으나, 의병장 표기조차 혼재
광양읍 유림회관 비석군에 세워진 비석은 2017년 광양향교에서 ‘의사 황병학 선생 추모’ 시제로 제4회 전국한시백일장 대해 기념 비석이다. 진상면 비촌마을 황병학 의병 백운산 전투비 내용과 같았으며 특이점은 의병장이 아닌 시제가 ‘의사 황병학 선생’으로 표기된 것이다.
광양향교 뒤편 우산웰빙테마공원에 있는 독립유공자 추모탑은 “광양시 출신 독립유공자 25인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분들의 공헌과 희생을 항구적으로 존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2009년에 건립되었다”라고 안내 되어 있다.
광양의 대표적인 독립유공자 황병학 의병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았고 이 탑에서도 25인 중 두번째 줄에 각인되어 있다. 이 독립유공자 추모탑도 공원 심층부에 세워져 있어서 일반인들은 접근이 어렵고, 운동 겸 산책하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다.
묵백리 전투지와 사라진 기억
옥곡면 묵백리(먹뱅이) 의병 활동 기병지를 찾아 묵백리 일대를 탐사하고 마을 탐문 결과 삼존마을에서 87세의 할아버지가 “부두마을의 의병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지만 어디인지는 모른다”라는 증언을 듣고, 부두마을 주민 탐문, 일대 조사를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옥곡 면사무소에도 황병학 의병장에 대해 설명 해 줄 직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곳 묵백리 일대는 황병학 의병장 기병활동은 물론 순천에 주둔 중인 일본군이 백운산에서 활동 중인 의병을 토벌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특공대를 편성하여 옥곡원 뒷산에 매복하였다가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퇴각시키는 전투가 있었던 곳이나 조사기록이 없고 전해 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생쇠골 야철지, 입산통제로 접근 불가
진상면 황죽리 구황마을에서 생쇠골이 어디인지 수소문 했으나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해서 자료에 근거해서 백운산 억불봉 등산로 입구 찾았으나 입산통제 기간이라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백운산 억불봉 등산로 입구에서 2.5km 올라가면 생쇠골 야철지가 있다.
이곳 야철지에서 황병학 의병장은 야철로를 설치하고 아래 평촌마을에서 채취한 철광석과 솥 등의 고철을 구입해서 철을 제조한 다음,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작한 장소로 야철지 주변에는 석회석, 규석, 철광석, 쇠똥(슬래그), 쇠붙이 등의 잔재물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입산통제가 해제되면 이곳을 탐방 관리실태를 조사하여 생쇠골 야철지의 역사적 가치를 알릴 예정이다.
수몰된 고향과 흩어진 비석들
진상면 비촌마을은 황병학 의병장이 태어난 마을로 수어천 계곡 주변에 150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건넛마을이 철광석을 채굴하여 솥을 만들던 평촌마을이 있었다.
1974년 수어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어 일부는 산쪽에 있는 현재의 비촌마을로 이주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실향의 아픔을 안고 객지로 이주하였다.
수몰 전 마을에 있던 창원 황씨 제각 지원재를 현재의 위치 진상면 비촌길 3으로 이설하고 황병학의 후손들이 건립한 지원재 앞에 비석군에는 의사황병학기념비, 회산황씨유허비, 의사운정황공순모기적비가 있다.
이곳은 백학로 길 옆이나 안내판이 없어서 대부분 지나치기 쉽다. 제각 지원재는 수어천댐 건설로 수몰된 비촌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설했으나 기와지붕 누수로 천막가림으로 방치되고 있었고 비석 둘레 일부도 파손 상태이다.
평촌마을에는 황병학 의병장 후손은 살지 않고 있고, 그의 당숙인 황순모(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의병 선봉장의 후손이 살고 있다.
한 후손은 “제각 지원재 기와지붕 누수방치 건은 지원재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광양시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서 “할아버지 의병 활동에 대해서는 진상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께서 잘 알고 계신다”라고 귀띔했다.
진상면지편찬위원회의 기억 수호자
진상 면사무소에 황병학 의병장에 대한 자료와 관내 의병활동 지역 자료를 요청했으나 “면사무소에는 관련자료가 없다면서 진상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께 가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전화번호를 주셨다.
진상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태상 전 교장은 진상면에서 태어나 진상면에서 교직을 은퇴했다. “재직 중에도 학생들과 함께 황병학의병장 등 진상면 격동기 유적을 찾아 탐사했었다”라고 했다.
그는 1997년 6월 순천대학교가 생쇠골 야철로 조사팀 일원으로 참여했고 그때 탐사 결과를 별도의 사진첩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태상 전 교장은 “황병학 의병장에 대해 찾는 사람도 없고, 점점 잊혀져 가는 역사자료를 정리하여 보관하면 누군가는 찾아서 세상에 알릴 날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면서 찾아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생쇠골 야철로에 대한 설명과 서슴지 않고 보관 중인 자료를 대여 해 주셨다.
관심 없는 행정, 사라지는 이름
황병학 의병장은 일제 강압기에 광양에서 대표적인 의병활동과 독립활동을 한 인물이지만 광양시민의 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1990년대에 잠깐 광양시장의 관심으로 2개의 비석이 추가로 세워지기도 했었지만, 의사 황병학, 황병학 의병 등 명칭조차 혼돈되어 있고, 광양읍과 진상면에 뿔뿔이 흩혀져 홀로 서 있는 비석은 역사적 가치를 낮추고 있다.
광양시도 광양시 의회도 관심에 소홀한 현실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황병학 의병장에게는 죄송하기 그지없다.
기자의 작은 소망이 큰 물결이 되어 자랑스러운 광양의 황병학 의병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생쇠골 야철지 후속 기사 취재를 다짐한다.
다음은 2012년에 실시한 ‘광양의 호국항쟁 사적 조사 연구용역 최종 보고서’에서 발췌한 황병학 의병장 기록이다.
진상면 비촌에서 살던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의 주도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그는 종숙인 황순모(黃珣模, 1873~1908)를 비롯하여 동지인 백학선(白學善)·고견(高堅)·구례의 한규순(韓圭順) 등과 힘을 합해 백운산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세는 의병의 유격투쟁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백운산의 남서쪽에는 조계산, 북동쪽으로는 지리산으로 연결되며, 섬진강과 광양만을 통해 해상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등 지리적 조건이 구비된 까닭이었다.
1908년 음력 7월 하순, 백운산 먹뱅이(묵백리)에 모인 약 200명 내외의 의병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액이 머리까지 박두했으니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는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는가”라고 맹세했다. 이 자리에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황병학은 32세의 나이로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황순모는 선봉장을 맡았다.
당시 황병학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로는 위의 인물 외에도 진상면에서 농사를 짓던 이치관·황민순·이인열·정석구·김홍석·문기홍·김군익·김응백 등을 들 수 있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청장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농사를 짓거나 산포수들이 많았다.
의병장 황병학은 백운산 먹뱅이 계곡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의 부호로부터 군량과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또한 의병의 취약점인 화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무기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야철로를 백운산 억불봉 아래의 생쇠골에 만들었다고 전한다. 당시 광양지역의 의병들은 철광석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생쇠골 바로 아래 평촌마을에 농기구와 솥 등을 만들던 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촌 마을의 철점은 흔히 점터 혹은 점골로 불렸으며, 채광한 굴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무쇠를 구입하여 백운산 본진으로 운반, 그곳에서 대장간을 차리고 창과 칼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대오를 정비하고 무기를 확보한 의병장 황병학은 먼저 망덕 포구를 차지한 일본 세력을 쫓아내기로 했다. 급습을 당한 일본 어부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며, 일제 군경은 곧바로 황병학 의병부대의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광양 옥곡원의 일본 군경을 공격하는 등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이 과정에서 왼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활동케 한 다음, 자신은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여 부상을 치료했던 것으로 전한다.
어느 정도 몸이 완쾌되자 황병학은 다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는 대규모의 군경을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의병에 대한 회유공작도 병행했다. 의병장의 부상으로 상당수의 의병들은 크게 동요되었고, 일부는 몰래 빠져나간 경우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비촌 마을에 사는 황씨 일족들의 곤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즉, 황씨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협박과 폭력을 휘둘렀으며, 황병학과 황순모의 집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에 황병학 의병부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황병학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광양만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다. 그의 종숙 황순모·한규순 등 몇몇 의병들은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한 나머지 귀순했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묘도에 잠적 중이던 황병학 의병부대도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백학선 등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이를 악물고 악전고투를 하다가 일제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전개되던 1909년 후반에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황병학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재기를 노리던 중 삼일운동을 맞았다. 민중들의 만세시위에 고무된 그는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우국지사 기산도를 만났다. 고흥에 은신 중이던 기산도는 5적 암살단을 결성하여 매국노 이근택을 살해 하려던 우국지사였다. 황병학은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 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그리하여 평안도까지 함께 올라 갔으나 황병학만이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1927년 평양 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었다. 고향 비촌을 둘러본 후 발길을 돌리려던 그를 병마가 붙들었다. 오랜 항일투쟁의 여독과 고문의 후유증이 깊었던 그는 1931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