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리 공원" 폐양곡 창고와 빈집을 새롭게 단장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인서리공원’의 전경입니다. 근대 건축의 흔적이 깃든 옛 공간과 현대적인 예술 감성이 어우러져,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원도심의 새로운 활력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낡은 시간 위에 덧칠한 새로운 꿈

망덕포구의 알싸한 바닷바람에서 시작해 윤동주와 정병욱의 문학적 우정이 깃든 가옥, 독립의 함성이 드높았던 장터, 그리고 지난 회차에 돌아본 광양서초등학교의 100년 노거수까지, 우리는 숨 가쁘게 광양의 근대를 달려왔다.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먼지 쌓인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의 뿌리이자 격동의 삶터였다.

이제 제3부 ‘근대의 기억들’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여정으로, 이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거미줄 같은 골목길 사이로 촘촘히 내려앉은 ‘광양읍 원도심’에 선다. 한때는 인구 감소와 신도심 개발로 인해 활력을 잃고 쇠락해가는 변두리로 여겨졌던 이곳이, 최근 ‘도시재생’이라는 거대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격조 높은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와 낡은 유산을 파괴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하며, 그 위에 세련된 문화적 가치를 덧입혀 과거와 현재가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광양읍의 골목길. 이 길 위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미래를 읽어낼 수 있을까.

“우채국 거리” 광양읍 원도심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진행 중인 도시재생 기반시설 정비 현장입니다. 우체국을 중심으로 성당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새롭게 단장되며, 낡은 도심이 걷기 좋고 안전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진=문성식
“인서리공원” 고풍스러운 한옥의 멋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인서리공원 내 카페 ‘Aat’의 모습입니다. 오래된 골목의 정취를 간직한 채 예술과 휴식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여, 원도심을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문화적 영감을 선사합니다. 사진=문성식

사라짐 대신 살림을 선택한 근대 건축의 미학

과거의 서구식 도시 개발이 ‘전면 파괴와 대규모 건설’이라는 효율성의 논리였다면, 광양읍 일대에서 펼쳐지는 변화는 ‘기억의 보존과 창조적 활용’이다. 광양시가 국토교통부 공모사업을 통해 추진해 온 광양읍 도시재생사업은 ‘골목과 한옥, 문화로 다시 가꾸는 광양삶터’를 목표로 삼았다. 주거·역사재생, 녹색재생, 상가재생 등의 촘촘한 전략 아래, 옛 관공서와 노후 생활한옥, 방치된 폐창고들은 허물어지는 대신 매력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기자가 직접 걸으며 취재한 원도심 도보 문화벨트의 거점들은 저마다 독특한 건축적 가치와 역사적 서사를 품고 있었다.

광양역사문화관: 1943년 일제강점기 말기에 완공된 옛 광양군청 건물을 리모델링한 원도심의 이정표이다. 붉은 벽돌과 정형화된 현관 포치 등 전형적인 근대 관공서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긴장감을 준다. 과거 수탈과 행정 지배의 공간이었던 이곳은 현재 광양의 유구한 역사와 인물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시민 전시관이자 교류의 장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인서리공원과 ‘인서리01’: 오랫동안 버려져 허물어져 가던 폐양곡 창고와 오래된 빈집, 그리고 퇴락한 골목길을 정비해 만든 도시재생의 기념비적 공간이다. 근대 건축 특유의 두꺼운 목재 보와 거친 벽돌 벽의 뼈대는 그대로 살려 세월이 주는 중후함을 남겨둔 채, 현대적인 조명과 아늑한 인테리어를 더해 갤러리, 판화실, 아트숍, 카페 등이 밀집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부활했다.

광양읍성 정채봉과 동외마을 골목길: 과거 광양읍성의 흔적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동외마을 주변 골목은 광양이 낳은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정채봉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을 담은 테마 길로 조성되었다. 낡은 돌담과 마당,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작가가 유년 시절 바라보았을 광양의 하늘과 맑은 정서가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우체국과 성당거리: 근대기 광양읍의 소통과 신앙의 중심축이었던 우체국 인근과 성당거리는 낡은 상가들이 정비되고 걷기 좋은 거리로 정돈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옛 건물들 사이로 청년 작가들과 문화 활동가들이 둥지를 틀면서 원도심을 잇는 활기찬 동맥 역할을 해내고 있다.

도립미술관과 광양예술창고: 옛 광양역 부지에 들어선 전남도립미술관과 이경모 작가의 아카이브가 구축된 광양예술창고는 이 도보 여행의 정점이자 웅장한 피날레이다. 남부 물류의 거점이었던 철도 폐창고가 지역 문화예술을 선도하는 거대한 거점으로 재창조된 모습은 공간 재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증명한다.

특히 광양읍 원도심은 평지 지형과 풍부한 수자원 덕분에 마당과 우물을 필수로 갖춘 ‘광양식 개량 생활한옥’이 고유하게 발달한 곳이다. 1970년대를 전후해 지어진 이 생활한옥들을 허물지 않고 수리해 게스트하우스나 문화 거점으로 활용하는 ‘한옥가꾸기 사업’은 향후 한옥자산진흥구역 지정을 거쳐 광양만의 독보적인 건축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준비를 마쳤다.

“문화원” 고풍스러운 근대 건축미를 간직한 광양문화원 전경입니다. 정겨운 아이들 조형물과 푸른 은행나무가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교차하는 이곳은, 지역의 뿌리 깊은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지켜가며 시민들과 소통하는 문화 거점입니다. 사진=문성식
“정채봉 거리” 동외마을 골목길에 조성된 정채봉 작가의 문학 벽화입니다. 작가의 유년 시절 추억이 담긴 작품 ‘우리읍내’의 풍경을 전통 민화 기법으로 그려내어, 골목을 지나는 이들에게 광양읍의 옛 정취와 따뜻한 문학적 감동을 선사합니다. 사진=문성식

주차장 대신 낭만도시재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원도심 골목을 걷다 보면 상인들과 주민들 사이에서 “수백억 원을 들여 고작 한옥 수리하고 골목길에 화단 가꾸는 게 전부냐, 당장 차 댈 대형 주차장이나 넓은 도로를 뚫어달라”는 푸념 섞인 목소리도 마주하게 된다. 당장 눈앞의 상권 활성화가 급한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도시재생은 낡은 것을 통째로 부수고 새로 짓는 과거의 무지막지한 ‘재개발’과는 결이 다르다. 만약 원도심마저 신도심처럼 콘크리트 빌딩과 아스팔트 주차장으로만 채운다면, 과연 외지인들이 ‘광양읍만의 매력’을 찾아 이 오래된 골목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광양읍 도시재생은 1970년대 생활한옥의 독특한 멋을 살려 청년들의 일터로 만들고, 자투리 땅을 소통의 숲으로 바꾸는 ‘심폐소생술’이다. 게다가 관청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아니라,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주민 주도형’ 사업이다. “장사 안된다”는 걱정의 돋보기를 잠시 내려놓고, 이 품격 있게 다듬어진 골목길에 어떤 재미난 이야기와 아이디어를 채워 넣을지 함께 고민할 때다. 주차장 면수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원도심만의 ‘말랑말랑한 문화의 힘’이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오래된 미래를 걷는 즐거움

제3부 연재를 마무리하며, 빛바랜 원도심 골목길 위에서 다시금 운동화 끈을 조여 본다.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광양읍 골목은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인생의 지도와 같다. 누군가에게는 털레털레 걷던 첫사랑과의 수줍은 산책로였고, 누군가에게는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던 치열한 생존의 일터였다.

스산했던 옛집들이 고유의 나이테를 유지한 채 청년 작가들의 감각적인 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웅장해진다. 도시재생의 진짜 묘미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게 아니라, 우리가 깜빡 잊고 지냈던 ‘광양다운 것’의 가치를 보란 듯이 부활시키는 데 있다. 우리 시니어들이 거리에 나와 젊은이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옛골목의 역사와 추억을 구수하게 들려주고, 청년들은 그 이야기를 밑거름 삼아 갤러리와 카페에서 새로운 감성을 피워내는 것. 과거와 미래가 한 골목에서 정겹게 어깨동무를 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세대 공존’이 아닐까 싶다.

“예술창고” 옛 광양역 철도 폐창고를 리모델링하여 시민들의 문화 예술 거점으로 변신한 ‘광양예술창고’의 모습입니다. 산업 시대의 흔적을 예술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곳은, 과거 물류가 흐르던 자리에 이제는 문화와 예술의 온기가 채워지며 원도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오일시장” 현대적인 시설로 새롭게 단장한 광양 5일시장의 전경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원도심에서 지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깔끔한 주차 시설과 쾌적한 장터 환경을 갖추어 시민들의 발길을 다시금 모으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기억은 힘이 세다, 3부를 마치며

이른 봄 망덕포구의 처연한 노을에서 시작해 숨 가쁘게 달려온 <길 위의 광양사> 제3부 ‘근대의 기억들’은 오늘 이 정겨운 골목길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가 밟아온 이 길들은 과거로 사라지는 끝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새로운 출발선이다. 모진 풍파 속에서도 선조들이 지켜낸 근대의 유산들은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가장 정확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그 흔적을 보듬는 도시는 결코 늙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동안 길 위에서 피어난 광양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 이제 기자의 발걸음은 잠시 숨을 고른 뒤, 광양의 더 깊은 숨결을 찾아 ‘자연’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여정으로 향합니다. 제3부에서 가슴속에 아로새긴 근대의 기억들은 이제 우리가 걸어갈 광양의 산과 강, 그 푸른 길을 비추는 영원한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시니어 기자로서 광양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여정이었다.

[다음 제31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는 더욱 푸르고 웅장한 여정을 이어갑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제4부 [광양의 자연]의 첫 시작인 제31회에서는, 광양의 젖줄이자 수많은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산 ‘백운산(白雲山)이 품은 위대한 생태계’를 찾아 대자연의 품으로 길을 떠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