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민생 경제의 모태이자 서민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의 장날 풍경. 2016년 현재의 위치인 광양읍 백운로로 이전하여 대대적인 현대화 사업을 거친 이후에도, 매월 끝자리 1일과 6일이 되면 고향의 산과 바다에서 길러낸 풍성한 물산과 사람 냄새 나는 정(情)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일제강점기 가혹한 수탈 속에서도 민족 자본의 명맥을 지켜내고 3·1 만세 운동의 불길을 피워 올렸던 역사적 현장인 광양 오일장은, 오늘날에도 지역민의 삶과 애환을 품어 안은 채 가장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으로 맥박 치고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닷새마다 삶의 심장박동으로 깨어나는 민생 경제와 소통의 중심지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우리 민초들의 삶을 지탱해 온 가장 뜨거운 생명력의 복판에는 늘 ‘오일장’이 있었다. 닷새마다 열리는 광양의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적 공간을 넘어, 고단한 삶의 위로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주고받던 거대한 소통의 광장이었다. 오늘날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으로 현대화된 광양읍 오일장의 발자취는 고대 마로현 시절의 포구 교역에서 시작되어 조선 시대 읍성 아래 보부상들의 발길을 거쳐 근현대사의 격변을 온몸으로 겪어온 산증인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역의 실핏줄 역할을 해오며 민생 경제를 지탱해 온 광양 오일장의 역사와 그 속에 녹아 있는 서민들의 애환을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이야기로 복원해 본다.

포구와 읍성이 빚어낸 광양장시의 역사적 변천

광양 장시의 역사는 고대 해상 물류의 중심지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 시기 ‘우두머리’ 혹은 ‘높은 곳’을 뜻하던 광양의 옛 지명 ‘마로(馬老)’는 섬진강 하구와 남해안을 잇는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이 시기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연스러운 물물교환이 광양 장시의 아득한 모태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광양(光陽)’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이후,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운船)이 드나들던 포구를 중심으로 상업적 기능과 영·호남 교역망이 활성화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장시는 광양현 관아의 치소가 있던 ‘광양읍성(光陽邑城)’ 주변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북쪽 백운산의 임산물과 남쪽 남해안의 해산물, 서쪽 호남평야의 곡물이 모여드는 길목이었기에, 영남의 소금과 생선이 섬진강 물길을 거쳐 광양읍성 아래로 모이고 백운산의 약재가 봇짐에 실려 영남으로 넘어가는 물류 거점이 되었다. 이 중심에 전국의 장터를 누비던 보부상들이 있었으며, 구한말 매천 황현 선생과 같은 지식인들도 이 장터의 활기를 보며 시대의 변화를 관조하곤 했다.

근대에 접어들며 장시는 공간의 큰 변화를 겪는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시장세 징수를 통한 식민지 세원 확보와 조선인들의 사상적 회합을 감시하기 위해 장터를 제도권 안으로 묶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광양 오일장은 물자와 사람이 모여들던 구 광양역(현재의 광양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주변 철로변 공터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통제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장터는 해방 이후인 1964년 목성리 일대에 정기 시장으로 정식 개설되었고, 2016년 현재의 위치로 현대화 사업을 거쳐 이전하며 오늘날의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기 식민지 수탈의 경제학과 장터의 생존 공식

일제강점기 광양 오일장은 식민지 상권의 침탈과 농촌 사회의 고초가 교차하던 서글픈 현장이기도 했다. 일제는 광양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쌀을 비롯하여 백운산의 목재와 광물의 수탈을 본격화했다. 산미증식계획 등 식민지 농업 정책에 따라 조선인 농민들이 수확한 많은 양의 곡물이 저렴한 가격에 매입되어 구 광양역 철로를 통해 부산항으로, 다시 일본 본토로 유출되었다. 이에 따라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은 장날이 되면 채소 몇 가닥이나 땔나무 묶음을 짊어지고 나와, 목숨을 연명할 잡곡과 바꾸기 위해 척박한 흥정을 벌여야 했다.

조선인 상인들을 압박한 것은 물자 수탈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대지주와 일본 상인의 이익을 대변하던 식민지 금융조합은 조선인 영세 상인들에게 문턱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당장 물건을 떼어올 밑천이 없던 상인들이 고리대에 노출되자, 민초들은 자생적인 금융 대안인 ‘장터 계(契)’를 조직했다. 닷새 동안 품을 팔아 모은 동전 몇 닢을 신용 하나로 모아 순번대로 목돈을 쥐여 주었던 이 신뢰의 경제 연대는, 식민지 경제적 압박 속에서도 민족 자본의 실핏줄을 지켜낸 강력한 생존 무기였다.

정보의 유통로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광장

신문과 정보가 제한되고 언론에 대한 일제의 검열이 삼엄했던 시절, 광양 오일장은 살아있는 뉴스 센터의 역할을 했다. 인근 순천, 하동, 여수 등지에서 장배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모여든 장꾼들과 보부상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외지의 정세를 전하는 민중의 전령사였다. 장터 귀퉁이 옹기전이나 포목전 뒤편에서 나직하게 오가던 소식들은 단순한 야사를 넘어 민족의 자각을 깨우는 정보의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 응집력은 1919년 광양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기미년 만세운동의 불길이 번져갈 때, 광양의 선각자들은 수많은 인파가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최고의 거점으로 ‘광양 장날’을 선택했다. 1919년 4월 초, 장꾼들의 봇짐 속에 숨겨져 장터로 유입된 독립선언서가 군중에게 전해졌고, 흥정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장터는 거대한 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일제 헌병의 탄압으로 많은 민초가 피를 흘리며 연행되었지만, 광양 오일장의 흙바닥은 상업적 공간을 넘어 불의에 항거한 민족의 자존심이 새겨진 ‘독립의 광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현대식 시설 속에서도 옛 장터의 따뜻한 정(情)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의 내부 전경. 눈비와 더위를 막아주는 쾌적한 아케이드 아래로 상인들이 정성껏 진열한 투박한 먹거리와 제철 농산물들이 대형 마트의 바코드와는 다른 정겨운 인간미를 풍깁니다. 가판대 너머로 이웃의 안부를 묻고 흥정을 주고받는 손님과 상인들의 모습 속에는, 근현대사의 모진 고비마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버텨왔던 우리 선조들의 상부상조 정신과 공동체적 유대감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장날을 맞아 제철 농산물과 곡물이 빼곡히 들어선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의 정겨운 노점 거리. 대형 마트의 규격화된 바코드 대신, 투박한 대야에 담긴 물산과 자전거를 끌고 장터 길을 지나는 어르신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100년 넘게 이어져 온 광양 민초들의 소박한 삶의 궤적과 여전한 사람 냄새가 묻어납니다. 사진=문성식

오일장의 인문학 ()과 덤, 식문화의 위로

현대의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이 규격화된 수치와 바코드로 대변된다면, 광양 오일장은 인간 중심적인 ‘정과 덤’의 문화를 고수해 왔다. 채소를 파는 노점 할머니들이 저울눈이 멈춘 뒤에도 투박한 손으로 한 움큼을 더 얹어주는 ‘덤’은 경제학적 손실이 아닌, 고단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던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의 실천이었다.

광양 장터만이 가진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장터 한쪽을 가득 채운 ‘즉석 김 구이 골목’이다. 이는 태인도에서 세계 최초로 김 양식을 시작한 광양의 역사를 증언하는 식문화의 산실이다. 또한, 가마솥에서 하얀 김을 피워 올리던 ‘장터 국밥’은 고된 장사 길의 시름을 달래주던 서민들의 안식처였다. 국밥집 탁자 앞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없었으며, 뜨끈한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며 서로를 위로하던 행위는 장터가 만들어 낸 가장 따뜻한 공동체적 연대였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사라지지 않는 사람 냄새를 찾아서

현대식 아케이드 시설을 갖춘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의 깔끔한 통로를 걷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으로 옛 장터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자욱했던 흙먼지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장날은 단순히 찬거리를 사러 가는 날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나섰던 장터 길에서 맛본 알사탕 하나에 온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해했던 추억의 공간이었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물건이 집 앞까지 배달되는 초디지털 시대가 되었지만, 광양 오일장에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의 온기’가 완강하게 남아 숨 쉰다. “조금 더 얹어주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봉지를 꾹꾹 채워주는 시골 노점의 풍경은, 우리가 격동의 현대사를 넘어올 때 서로를 지탱해 주었던 따뜻한 온정의 연장선이다. 대형 마트의 바코드에는 역사가 없지만, 광양 장터의 투박한 손바닥 위에는 100년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버텨낸 서민들의 눈물겨운 생존사가 새겨져 있다. 장터는 여전히 우리 지역의 살아 숨 쉬는 가장 위대한 역사박물관이다.

해누리 광양 5일 시장 주변 인도를 따라 정겹게 형성된 노점 거리의 활기찬 풍경. 붉은 대야에 담긴 싱싱한 수산물과 노점 할머니가 정성껏 다듬어 놓은 파 한 묶음 너머로 장터를 찾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집니다. 손가락 하나로 물건을 사는 편리한 디지털 시대라지만, 가판대 너머로 눈빛을 나누고 정을 주고받는 이곳 노전 거리에는 기계가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정겨운 ‘사람의 온기’가 여전히 완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해누리 광양 5일 시장 인근이자 광양읍 교통의 중심축인 오일장 로터리 전경. 과거 구 광양역 철로변에서 시작해 2016년 현재의 위치로 시장이 이전해 오면서, 이 일대는 사람과 물자가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광양 경제의 핵심 혈맥이자 소통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정겨운 전통시장과 활기찬 현대식 도심 도로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흐르는 풍경입니다. 사진=문성식

마치며, 오늘도 광양 장터는 희망을 판다

광양 오일장의 역사는 곧 위대한 광양 민초들의 끈질긴 생존사다. 닷새마다 어김없이 깨어나 대지 위로 활기를 뿜어내는 이 장터의 심장박동이 멈추지 않는 한, 고난을 극복해 온 우리의 역사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구겨진 돈을 세며 이웃의 안부를 묻고 정겨운 사투리 인사를 건네는 그 소박하고도 숭고한 풍경 속에,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고귀한 기억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내일도 장날의 아침 해가 떠오르면, 광양 장터는 여전히 물건이 아닌 ‘내일의 희망’을 팔 것이다.

[다음 제28회 예고]

광양 오일장의 정겨운 활기를 뒤로하고, 다음 회차에서 우리는 근대 교통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이별과 만남, 그리고 격동기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던 역사의 현장으로 향합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과 해방 전후의 격동을 고스란히 안은 채 광양의 근대 통로가 되어주었던 곳, ‘제28회 근대 교통의 애환 — 구 광양역(폐광양역사)의 발자취와 철길에 얽힌 기억들’ 편이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바랍니다.

[광양시 정기시장 및 상설시장 현황]

시장명유형장날위치주요 특징 및 명물
해누리 광양 5일 시장오일장끝자리 1, 6일광양읍 백운로 31964년 개장, 즉석 김 골목, 80년 전통 뻥튀기집
옥곡 5일 시장오일장끝자리 4, 9일옥곡면 큰골1길 2-26백운산·섬진강 유역 매실, 재첩 등 농산물 중심
진상 5일 시장오일장끝자리 3, 8일진상면 학연로 1-4수려한 전원 풍경 속 소박한 시골 장터 정취
중마시장상설시장매일 운영중동 중심가현대식 수산물 점포 밀집, 싱싱한 활어 구매 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