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생가 정면. 사진=한재만
매천 황현선생 생가, 매천헌. 사진=한재만
매천 소품과 초상화(현재). 사진=한재만
매천 소품과 초상화(변경 전). 사진=한재만
매천헌 좌측 후면에 있는 매천정. 사진=한재만
광양시지 1권 2편에 등재된, 농민을 우선하는 황현선생 글. 생가옆집 담벽에 적혀있다. 사진=한재만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 매천헌에 전시된 선생의 초상화가 새롭게 제작돼 설치됐다. 2024년 8월 18일, ‘[기자수첩] 매천(梅泉)·황현(黃玹) 선생 생가 방문, 발자취를 회상하다‘란 기사로 소개한 바도 있다.

[기자수첩] 『매천(梅泉)·황현(黃玹)』 선생 생가 방문, 발자취를 회상하다

매천·황현 선생의 생가에 초상화가 새롭게 제작돼 설치됐다는 내용을 접하고, 지난 5월 8일 ‘매천헌’을 다시 방문했다.

2024년 8월 17일 취재 당시, 매천 황현 선생의 생활 유품과 초상화가 매천헌 작은 방(2)에 있었다. 당시 매천 선생의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초상화(그림)를 액자화하여 방(2)에 세워 보관했다.

이 초상화는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된 원본의 복사본이다. 애국지사의 초상화로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본 기자를 마중한 해설사도 같은 생각을 전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후 본 기자는 지인(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지인은 여러 경로를 통해 문화재청 보물 제1494호 초상화 사진(나무위키 제공)을 광양시 최상종 국가유산팀장에게 전달했다.

광양시 국가유산팀은 전달받은 초상화를 인쇄·액자화하여 최근 매천헌 생가 작은 방(2)에 초상화 액자를 교체했다. 기존 초상화 액자는 옆 방(3)에 현재 보관 중이다.

매천 황현은 장수 황씨 가문 출신으로,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1855년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현재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758번지)에서 태어났으며, 1910년 9월 10일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자택에서 향년 54세로 생을 마쳤다.

황현은 1855년(철종 6년)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시대 명문가 중 하나인 장수 황씨 가문 출신으로, 직계 조상 중에는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15대조)와 임진왜란의 명장 황진(10대조)이 있다.

황현은 11세에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 1816~1868)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883년(고종 20년)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해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졌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황현은 이후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귀향했다.

이후 황현은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모시고, 영재(寧齋) 이건창 형제와 창강(滄江) 김택영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쌓았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이를 높이 평가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전라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주한 황현은 그곳에서 16년을 지내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 등 격변의 시대를 직접 체험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과 견문을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저술했다.

『매천야록』은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구한말 시기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황현은 구한말 재야 문인으로도 존경받았다. 그는 농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그 정신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의 : 광양시 국가유산팀(061-797-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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