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지죄’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말 그대로 뜻은 ‘남은 복숭아의 죄’다. 그 내용은 우제항 엮음 ‘고사성어’ 책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위나라에 ‘미자하’라는 신하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미자하는 집으로부터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급한 미자하는 왕의 허락을 받은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왕의 수레를 타고 집에 다녀왔다.

당시 위나라 국법에는 왕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다리를 자르는 형벌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벌을 주기는커녕, 참으로 효성이 깊은 신하라고 칭찬했다.

또 어느 날 왕이 미자하의 과수원을 방문했다. 마침 복숭아를 먹고 있던 미자하는 너무 맛있다며, 먹고 있던 나머지 반쪽을 왕에게 주었다. 왕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왕은 미자하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기에 자기가 먹어야 할 것도 잊고, 내게 주겠는가 하며 칭찬했다.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늙어갔다. 왕의 총애도 멀어졌다. 이때 미자하는 벌을 받게 됐다. 왕은 미자하에게 죄를 주는 이유에 대해, “미하자는 왕의 수레를 거짓말을 하여 허락 없이 탔고, 자기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왕에게 먹게 하는 불경(不敬)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이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랑을 받는 이유가, 죄를 받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행위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이 참으로 원시적이고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도 이 같은 관점은 여전히 통하고 있다.

지난 달 22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아시안컵 대회 4강 경기를 앞둔 전날 밤, 이강인 선수와 손흥민 주장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각종 매체는 이강인이 ‘주먹을 날렸다’고 보도했다. 이에 이강인 측은 ‘아니다 투닥거린 건 맞지만 형한테 주먹으로 때린 사실은 없다’는 해명이 있었다.

그럼에도 소동은 전국적으로 큰 파동을 일으켰다. 이강인 선수를 향한 지탄이 산더미처럼 커졌다. 이강인 선수 인성문제, 과거행적으로 번졌다.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가정교육 잘 시켜라’는 등 비난 악플이 쏟아졌다.

상황은 점점 이강인 선수에게 불리하게 흘렀다. 이강인이 모델인 브랜드를 불매운동하겠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광고 영상과 포스터가 내려졌고, 프로모션이 조기 종료됐다. 재계약을 앞둔 치킨 브랜드는 계약 연장을 포기했다. 이강인을 모델로 기용하는 기업 게시물에 공격적인 댓글이 이어졌다.

결국 이강인이 사과를 했다. 그럼에도 국민적 공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아마 64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하려는 기회가 날아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또 우리에게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아직도 강하게 작동되고 있다. 나이도 어린 것(?)이 일을 저질렀으니 잘못의 원인을 이강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도 당연한 듯하다.

이런 기류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던 이천수의 분석은 눈길을 끈다. 우리가 29억원을 주면서 감독을 선임하는 것은 선수들을 하나로 만들어 좋은 성적을 내게 하는 것이다. 감독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다. 그런데 선수들이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우는 것을 보고도 개입하지 않았다면 리더십 부재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축구협회도 잘못이 크다는 지적이다. 주위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 감독을 선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축구협회가 평소와 다르게 선수 간의 불화를 이례적으로 재빠르게 인정한 것은 정몽규 회장에게 향하는 비판 여론을 돌리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번 이강인 소동을 보고 ‘여도지죄’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잘잘못을 누구에게 따질 것인가는 좋은 방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계기로 이강인 선수가 더 성숙해지고 발전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게 우리 모두에게 훨씬 큰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결론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좁다고 한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 땅에는 재능이 탁월한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난다.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피아니스트 임윤찬처럼 일찍이 알려져 국민들을 기쁘게 해준 젊은이도 있다. 비록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보배 같은 젊은이들은 더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축복이다.

23살 이강인 선수도 우리의 보배다. 이번 실수로 이강인을 내친다면 우리 모두의 잘못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어릴 적부터 축구에 관해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이강인은 고작 10살 때 축구유학을 떠났다. 축구유학을 통해 공을 다루는 기술은 당연히 일취월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기술(?)도 그만큼 성장했을까? 아니다. 집을 떠나 아동기, 사춘기, 청년기 인생 대부분을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매사에 이기고 싶은 마음이 유독 강한 나이어린 운동선수로 한번쯤은 받아 줄 아량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에게 기회를 주고 차분하게 기다려 줘야 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번 소동이 이강인에게 삶을 반추하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 이강인은 더러운 이름을 오래도록 후세에 남긴다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의 삶을 살 수도 있다. 반면에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긴다는 ‘유방백세(流芳百世)’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선택은 이강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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