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바다와 강이 교접하는 갯목, 시(詩)를 품고 미래를 낚다
전북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 오백 리 물길이 마침내 남해의 거친 파도와 몸을 섞는 곳,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외망마을은 지형적 숙명이 빚어낸 호남의 탯줄이자 문명의 교차로다. 이곳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의 풍요로움을 넘어, 내륙의 다압 섬진진과 구례, 곡성으로 이어지던 유일한 수로 길목이자 영호남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바다로 나가는 배에게는 마지막 보루였고,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이들에게는 호남의 속살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었던 셈이다.


망을 보던 투박한 땅에서 덕을 바라보는 유교적 포구로의 변천
망덕포구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긴장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본래 우리 고유어로는 ‘망을 보기에 알맞은 땅’이라는 뜻의 ‘망뎅이’ 혹은 ‘망댕이’라 불렸다. 이는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을 조망하는 뜻도 있었지만, 남해를 타고 들어오는 왜구의 침입을 감시해야 했던 포구의 군사적 긴장감을 반영한다. 조선 시대를 거치며 이 투박하고 직관적인 고유어는 유교적 덕목을 갈망하는 ‘망덕(望德)’으로 승화되었고, 망덕산 안쪽은 내망(內望), 바깥쪽은 외망(外望), 옛 조선소가 있던 자리는 선소(船所)로 세분화되며 포구 마을의 체계를 갖추었다.
약 220년 전 진주강씨 일가가 터를 잡으면서 본격화된 외망마을의 역사는 늘 물길과 함께 흘렀다. 현대적 도로가 없던 시절, 바닷물은 정병욱 가옥의 문턱 앞까지 바짝 차올랐고 선창은 만선의 기쁨을 싣고 온 배들로 활기가 넘쳤다. 섬진강의 영양분과 남해의 염분이 교차하며 길러낸 강굴(벗굴)과 재첩, 그리고 가을이면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돌아오는 전어는 이 터전이 하사한 축복이었다. 1998년부터 시작되어 지역의 대표 명물로 자리 잡은 전어 축제의 뿌리 역시, 험한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들이 고단함을 달래며 부르던 ‘전어 뱃노래’ 속 공동체의 유대와 강인한 삶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망뎅이’에서 ‘망덕’으로 이어진 지명의 변천은 단순한 한자화가 아니라, 군사적 긴장감과 생존의 공간이 유교적 가치관과 주민 공동체의 온화한 삶터로 이행해 간 깊은 인문학적 서사를 보여준다.


천자봉조의 기운과 의병의 호국혼이 서린 민초들의 터전
망덕포구를 병풍처럼 둘러싼 망덕산은 이 땅을 신성시했던 민초들의 염원이 집약된 거대한 풍수적 상징체다. 이곳의 핵심은 왕비가 조정을 하객으로 받는 형상이라는 ‘천자봉조혈(天子奉朝穴)’ 명당 설화다. 풍수지리적으로 망덕산은 ‘왕비’를, 뒤편의 천황산은 ‘왕’을 상징한다. 여기에 왕비를 보좌하는 시녀의 양산(양산등), 시중드는 시녀(시녀도), 왕비가 탄 가마(가마등), 그리고 왕비의 명을 인증하는 관인(인통섬)까지 주변 지형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왕실 의전 행렬처럼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기복을 넘어 이 땅에서 귀한 인물이 배출되기를 갈망했던 주민들의 자부심이자 삶의 단단한 근간이었다.
이러한 명당의 기운은 국난의 시기에 강력한 호국 정신으로 분출되었다. 1908년 황병학 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창의대는 망덕포구에서 일제 어선들의 수탈과 침략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터전을 지키려는 어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곧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 활동과 하나로 승화된 순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민족 계몽의 산실이기도 했다. 부호군 이채한이 세워 강호의 풍류를 전했던 ‘반구정’ 터와, 강처중 훈장이 3대째 운영하며 인재를 길러낸 ‘서당 터(상사암·광덕암)’는 척박한 시대에 배움의 등불을 밝힌 성소였다. 한 해에 수십 명의 인재를 배출하며 민족의 혼을 심어준 이 서당 터는 훗날 주변 지역에서 인재를 배출하는 인적 자양분이 되었다. 반면 일제강점기 침략의 상징이었던 신사(神社) 터의 빈자리는 침묵의 역사로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서늘한 온고지신의 교훈을 일깨워준다.


마루 밑 항아리가 지켜낸 윤동주와 정병욱의 숭고한 약속
외망마을 골목길 안쪽,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341호)’은 한 민족의 정신적 정수인 시(詩)를 수호해낸 문화적 성소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청년 윤동주는 친형제와 다름없던 후배 정병욱에게 자신의 자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고를 맡겼다. 당시 시인은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해 시집 제목을 ‘병원(病院)’이라 붙이려 했을 만큼 고뇌에 찬 청년이었다.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징병의 광풍 속에서 이 원고를 지켜낸 것은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박녹두 여사)가 보여준 위대한 헌신이었다.
1944년 정병욱이 학도병으로 끌려가며 “동주의 시집을 목숨처럼 지켜달라”고 남긴 간곡한 당부는 어머니에게 지엄한 명령이었다. 어머니는 원고를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옹기 항아리에 담은 뒤, 명당의 기운이 서린 집 마루 밑 바닥 깊숙이 묻었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웠던 일제강점기 말기의 암흑 속에서 항아리 속 시심(詩心)은 차디찬 세월을 견뎌냈다. 해방 후 무사히 생환한 정병욱에 의해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의 시는 마침내 온 겨레의 가슴 속에 영원히 부활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휘발되고 각자도생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이 마루 밑 항아리의 서사는 타인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두 남자의 우정과 어머니의 묵묵한 수호를 통해 modern 사회가 잃어버린 ‘지조’와 ‘신의’라는 소중한 가치를 울림 있게 전해준다.


배알도의 파란을 넘어 생태와 문학이 숨 쉬는 미래형 포구로
망덕포구 전방에서 마을을 호위하듯 떠 있는 배알도는 이 지역 경관의 정점이자 역사적 회복의 상징이다. 본래 《대동여지도》에는 뱀이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여 ‘사도(蛇島)’라 기록되었으나, 이후 망덕산(왕비)을 향해 절을 올리는 형상이라 하여 ‘배알도(拜謁島)’라는 예(禮)의 이름을 얻었다. 배알도 정상의 정자인 ‘해운정’은 1940년 건립되었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붕괴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2015년 주민들과 지자체의 염원으로 복원되어 끊겼던 역사의 맥락을 인간의 의지로 다시 이어냈다.
오늘날 외망마을은 이러한 무거운 역사적 층위에 현대적 감각을 정교하게 덧입히고 있다. 배알도 수변공원과 포구를 잇는 ‘해맞이 다리’와 윤동주의 시 세계를 형상화한 ‘별 헤는 다리’는 과거의 무거운 역사를 현재의 치유와 휴식으로 연결하는 아름다운 가교다. 여기에 바다 위를 걷는 해상 데크길과 짚라인 등 역동적인 관광 콘텐츠가 더해지며 자칫 박제될 수 있는 역사 유적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섬진강의 민물과 남해의 바닷물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살찌우듯, 망덕포구는 역사적 엄숙함과 현대적 낭만이 교차하는 독특한 결을 지닌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억울하게 사라질 뻔했던 시인의 노래를 품어 안았던 그 따스한 마루 밑의 온기처럼, 외망마을은 속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림과 차분한 성찰의 시간을 선사하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다음 회차 예고]
다음 시간에는 조선 시대 궁궐에 바치던 김을 처음으로 재배하여 민족의 식문화를 새로 쓴 김 시식지이자, 전우치 전설과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는 태인동 궁기마을 편이 이어집니다.


![[길 위의 광양사(史) 제5부 광양의 마을] ㊹ 진상면 어치마을](https://gy-senior.com/wp-content/uploads/2026/09/어치마을4-1-218x15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