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판으로 달리는 말(馬)·날로 번창하는 중심고을』 중마동(中馬洞) 태동사(胎動史)

광양(光陽)고을 이름은 서기940년(고려태조 23)에 희양현(晞陽縣: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 주요문헌에 기록된 지명)을 광양현(光陽縣)으로 고친이래 지금까지 1,060여년 간 “광양(光陽)” 지명을 사용해 오고 있다. 광양은 백제,신라,고려에 이어져 조선건국(1392년), 태종13년(1413년)에 광양현에 현감(縣監)을 두고 감독, 지배를 받았으며 중마동은 광양현 골약방(骨若坊)지역에 속하였다 (광양군지 345p,1983)

선조30년(1597) 왜구에 의해 광양읍성이 함락돼 중마동 지역이 왜구의 점령하에 들어갔으나 1597.  12월 광양읍성 탈환으로 중마동 지역이 왜병의 만행에서 벗어났다(아군측: 전라병사 이광악, 구례현감 이응서, 왜군측 소서행장) ->선조실록권95(1609), 광양군지 241p(1983)

고종 9년(1872) 面(면)단위, 里(리)명칭이 처음으로 문헌상(지도)에 나타나며 규장각 소장(1872, 광양현 지도), 중마동 지역은 골약면의 8개리(里)중 2개리(里) “중동리·와우리” 로 편성된다.

국란(國亂)에 따라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합방이 된다. 1912년 왜정시대, 1914년 행정개편 이전 중마동 지역 관할 里는 골약면(骨若面)의 29개里 중 9개里로 정리되었다. “중동리(中洞里), 오류리(五柳里), 용소리(龍沼里), 행정리(杏亭里), 불로리(不老里), 세동리(細洞里), 마흘리(馬屹里), 와우리(臥牛里), 사동리(寺洞里)” 자료는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1912)·광양군지 p476 (1983)에 근거한다.

총독부 부령 제111호 (1913.12.29), 1914.04.01 행정개편이 되었다. 왜정시대 행정개편 이후 중마동 지역관할 리(里) -> 골약면(骨若面)의 9개 리(里)중 2개리(里)로 되었다.

소속리명(里名)개편 이전의 리명(里名)
29
광양군

골약면

중동리 (中洞里)중동리(中洞里),오류리(五柳里),용소리(龍沼里),행정리 (杏亭里),불로리(不老里),세동리(細洞里)
마동리 (馬洞里)마흘리(馬屹里), 사동리(寺洞里),와우리(臥牛里) 일부

 

중마동(中馬洞)은 1989.01.01일 전라남도 광양지구 출장소가 동광양시로 승격됨에 따라 행정운영 등의 설치를 위해 그 전의 중동(中洞)과 마동(馬洞)의 첫 글자를 따서 “중마동(中馬洞)”이라 하였다 (마을편 제9장 중마동 1,085p)

한편 중동(中洞)은 본래 골약면 지역이었는데 중동지역내 자연마을인 중촌(中村)이 위치상 용소와 길도마을의 한복판이 되므로 지형적 여건을 고려하여 그대로 중촌(中村)이라 한데서 유래된 지명이고, 마동(馬洞)도 본래 옛 골약면 지역으로 마흘(馬屹)∙애밑등∙와우(臥牛)∙사동(寺洞)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마흘(馬屹)과 사동(寺洞)의 글자를 따서 “마동(馬洞)”이라 하였다. 마동(馬洞)이라 하였을 당시는 마흘(馬屹)이 가장 으뜸되는 마을이었는데 근처 산정(山頂)모습이 말(馬)형국이다 하여 처음에는 마리(馬里)라 하였는데 근년에 와서 마흘(馬屹)이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중마(中馬)” 고을 의미는 두개 동(洞)이 복합적으로 두 글자를 합쳐 명명(命名)한 지명이라 여러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직역하면 ‘복판으로 달리는 말(馬)’을 뜻하고, 고을지명으로 뜻풀이 한다면 『날로 번창하는 고을 또는 중심고을』이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양시는 이러한 역사적인 마을 “중마동(中馬洞)의 분동(分洞)을 두고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명칭 및 경계. 기사=광양

 

한재만 기자
한재만 기자
광양 P사 32년 근무, 정년퇴직. 취미활동 : 사진 촬영.

관련기사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여기에 이름을 입력하세요.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