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의 어머니 산이자 호남정맥의 명산인 백운산 정상(상봉, 해발 1,222m) 표지석. 푸른 하늘 아래로 웅장한 산세가 한눈에 펼쳐진다. 사진=광양시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구름을 머금고 선 광양의 거룩한 젖줄
광양시 다압면, 진상면, 옥룡면과 구례군 간전면의 경계를 이루며 한반도 남단 중앙부에 우뚝 솟은 백운산(1,222m)은 단순한 지형적 높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호남벌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내리는 호남정맥을 완성하고, 섬진강 550리 물길을 갈무리하는 명산이다. 전라남도에서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높은 이 웅장한 봉우리는 광양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젖줄이자, 대자연의 성실한 섭리가 매 계절 새롭게 기록되는 거룩한 서판(書板)과 같다.

숫자로 보는 백운산의 기후와 지형
백운산은 놓인 위치와 높이에 따라 독특하고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기온과 강수량- 해안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철에도 비교적 온후한 기온 분포를 보이며, 연평균 기온은 14.2℃이다. 평지와의 온도 차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커져 정상부와는 약 3℃의 차이를 나타낸다. 특히 연 강수량이 1,700mm에 달하는 대표적인 다우(多雨) 지역으로, 인접 지역보다 100~400mm 이상 비가 더 많이 내리는 풍요로운 수자원의 원천이다.
지질과 수계- 백운산의 지질 대부분은 거대한 열과 압력을 받아 단단하게 굳어진 ‘반상변정화강암질편마암(줄무늬 바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굳건한 바위 뼈대가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은 골짜기를 빚어냈다. 비바람에 강한 이 암석 덕분에 1,222m의 웅장한 높이를 유지하며 수려한 4대 계곡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토양 또한 이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식사양질(자갈이 섞인 알맞은 흙)’로, 물 빠짐이 좋아 식물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자랑한다. 물길은 정상을 중심으로 세 갈래(동천, 수어천, 금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며 깊은 V자형 골짜기를 이룬다. 산세는 남해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가파르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날, 봉강면에서 바라본 백운산의 아늑한 풍경. 흐린 하늘 아래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와 피어나는 봄꽃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어우러진다. 사진=문성식
어치계곡 구시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사이로 분홍빛 수달래가 활짝 피어났다.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과 연분홍 꽃잎이 어우러져 봄날의 강인하고 역동적인 생명력을 웅변한다. 사진=광양시

봄·여름의 서곡, 생명의 부활과 안식의 찬가
겨울의 완고한 추위를 뚫고 남도 끝자락에서 가장 먼저 생명을 밀어 올리는 백운산의 봄과 여름은 왕성한 생명력의 극치를 보여준다.
♦ 봄의 보혈, 고로쇠와 야생화- 이른 봄, 백운산이 건네는 첫 선물은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이다. 도선국사가 가부좌를 풀다 굳은 무릎을 폈다는 전설을 품은 이 약수는 오랜 세월 지역민의 건강을 지켜왔다. 옥룡면 동동마을 등에서는 매년 경칩 무렵 약수제(藥水祭)를 거행하며 산신께 고마움을 표시하고 지역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 시기 눈 속에서 피어나는 복수초의 황금빛과 얼레지 군락은 백운산의 품이 얼마나 자애로운지를 대변한다.
♦ 연분홍 철쭉과 매화의 향연- 5월이면 바구니를 엎어놓은 듯한 ‘억불봉’과 국사봉 능선이 철쭉으로 화려하게 물든다. 특히 자생종인 ‘백운산조령철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쭉 품종으로 생태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이에 앞서 산 형태가 뾰족한 ‘쫓비산’ 아래 다압면 매화마을의 하얀 매화꽃은 섬진강변을 수놓으며 전국의 상춘객을 매료시킨다.
♦ 여름의 울창한 원시림- 한여름의 백운산은 거대한 폐가 되어 숨을 쉰다. 지리산이 북풍을 막아주고 광양만에서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지리적 특성 덕에, 한라산 다음으로 식물 분포가 다양하다. 이에 1993년 국가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백운란, 백운쇠물푸레, 백운기름나무, 나도승마, 털노박덩굴 등 980여 종(학계 보고에 따라 무려 1,080여 종)의 희귀식물이 자생하는 명실상부한 ‘식물의 보고(寶庫)’다.

붉고 노란 단풍이 터널을 이룬 백운산 둘레길을 걷는 시민들의 가을 산책. 파란 하늘과 형형색색의 낙엽이 어우러진 길 위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새하얀 눈옷과 눈부신 상고대(서리꽃)로 갈아입은 백운산 정상부의 겨울 풍경.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배경으로 우뚝 선 웅장한 바위 봉우리가 신비로운 은빛 세상을 연출한다. 사진=광양시

가을·겨울의 묵상, 비움의 순종과 순백의 안식
계절이 바뀌면 백운산은 스스로를 비워내며 다시 찾아올 소망을 준비한다.
♦ 가을의 동양화와 억새– 맑은 계곡물 위로 흐르는 형형색색의 가을 단풍은 마치 거대한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눈부시다. 노랭이봉에서 억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억새 평원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눕히며, 깊어가는 가을의 사유를 연상시킨다. 숲속 작은 짐승들의 양식이 되는 도토리 and 산열매들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연의 풍성한 자비를 보여준다.
♦ 겨울의 상고대와 침묵–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은 겨울의 봉우리들은 구름을 걸치고 신비로운 은빛 세상을 연출한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 나뭇가지를 따라 상고대(서리꽃)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찬 바람을 맞으며 오직 자신의 숨소리에만 집중하는 겨울 산행은 고독한 수행과 같다. 정상을 향해 걷는 길 끝에서 독자들은 비로소 존재의 근원과 마주하는 깊은 평안을 얻는다.

발자취를 따라서, 백운산 4대 계곡의 이야기
백운산 상봉과 능선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줄기는 4대 계곡(동곡, 성불, 어치, 금천)을 이루며 광양의 역사와 문화를 빚어냈다.
♦ 동곡계곡(東谷溪谷), 백운산의 심장이자 배움의 길목- 4대 계곡 중 가장 길고 큰 규모를 자랑한다. 상류에는 도선국사가 35년간 머물며 풍수지리설을 완성하고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옥룡사지(명승 제126호)와 7,000여 그루의 천년 동백림이 우거져 있다. 예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굽이치는 물은 막힘없는 학문적 깊이를 더해 주어, 광양의 인물들이 자라난 ‘깊은 생각의 골짜기’가 되었다.
♦ 성불계곡(成佛溪谷), 마음을 비우고 평안을 채우는 길- 봉강면으로 흐르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고요한 명상의 기운이 가득하다.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물은 교만을 깎아내고 겸손을 채우는 수행자의 길을 닮았다. 과거 박해를 피해 들어온 이들이나 은둔을 갈망하던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준 위로의 공간이다.
♦ 어치계곡(魚峙溪谷), 물고기가 뛰어놀듯 힘찬 물줄기- 진상면의 어치계곡은 ‘물고기가 뛰어넘는 고개’라는 이름처럼 역동적이다. 7km에 달하는 계곡 중 ‘오구굽이’는 험난한 지형을 돌아 흐르는 물의 끈질긴 생명력을 웅변한다. 울창한 원시림으로 덮인 이곳의 물줄기는 섬진강과 만나기 전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를 품고 있다.
♦ 금천계곡(錦川溪谷), 비단 자락처럼 포근하게 감싸 안는 강물- 다압면의 금천계곡은 섬진강을 가장 가까이서 대면한다. 거친 산세를 내려온 물줄기가 섬진강의 넓은 품에 안기기 직전의 평온함이 만경대 등 선비들이 은거하던 풍류와 함께 어우러진다. 산의 가파른 긴장감이 강의 넓고 아늑한 안정감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곳이다.

백운산 4대 계곡 중 가장 길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동곡계곡의 여름 풍경. 기암괴석 사이로 굽이치며 쏟아지는 하얀 물줄기가 울창한 원시림과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까지 시원한 안식을 선사한다. 사진=문성식
백운산 자락의 수려한 자연 속에 자리 잡은 포스코 백운산수련원 전경.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색이 바래가는 단풍과 함께 고젓한 길을 걸으며 산행의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사진=문성식

만물이 연결된 공동체, 우리 마음의 백운산을 가꾸며
백운산은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명예(봉황), 재물(돼지), 재능(여우)의 세 가지 신령한 기운이 서려 있다고 감탄한 영산(靈山)이다. 북쪽에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봉바위(鳳巖)의 기를 받아 예부터 광양에 수많은 학자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외적으로는 구한말 호남 의병의 주요 활동무대이자, 해방 후 현대사의 아픔(빨치산)이 서린 ‘역사가 흐르는 산’이기도 하다.
식물학적 관점에서 숲은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뿌리와 균사체를 통해 영양분을 공유하고 위기를 서로 알린다. 이를 과학계에서는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이라고 부른다. 백운산의 980여 종 식물들이 이루는 이 놀라운 연대는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서로를 돌보는 유기적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대자연의 교과서다.
광양의 어머니 산인 백운산은 우리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은 오고, 비워내야만 다시 채울 수 있다고.
“백운산이 없었으면 광양 사람들은 어디서 숨 쉬고 살았을까 싶어. 저 산은 한 번도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거든. 갈 때마다 말없이 다 받아주니까 진짜 엄마 같지.”
어느 노(老)주민의 소박한 고백처럼, 언제나 말없이 우리를 품어주는 백운산의 넉넉한 품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 마음속의 계곡과 숲도 이처럼 푸르고 넉넉하게 가꾸어 가기를 소망한다.

[다음 제32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제4부 ‘광양의 자연’, 다음 회차에서는 수천 년 동안 광양의 동쪽을 흐르며 수많은 생명을 키워내고 두꺼비의 전설을 품은 ‘섬진강(蟾津江) 550리 물길’을 찾아 떠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동행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