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섬의 역사 위에 세워진 철의 도시, 태인도에서 바라본 광양제철소의 위용. > 이곳은 한때 전국 최고 품질의 ‘광양 김’을 생산하던 풍요로운 황금의 바다였습니다. 1981년 입지 확정 이후 국가 산업화의 명분 아래 대규모 매립이 진행되면서, 수백 년 이어진 민초들의 삶의 터전은 세계 최대의 철강 산업 요람으로 대전환을 맞이했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타오르는 고로의 붉은 불꽃은, 자신의 고향 산천을 기꺼이 내어주며 대한민국 경제의 주춧돌을 놓았던 금호도 이주민들의 위대한 희생이 빚어낸 '헌신의 결정체'입니다. 비록 옛 마을들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숭고한 영혼은 이 거대한 대지 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태인도 김의 바다에서 금호도 철의 대지로

지난 회차에서 살펴본 태인도의 찬란한 김 양식 역사는 척박한 변방의 섬을 풍요로 바꾼 선조들의 위대한 개척사였습니다. 이번 회에서는 그 이웃 섬이자, 전국 최고 품질의 ‘광양 김’을 생산하던 황금빛 바다에서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부로 대전환을 맞이한 ‘금호도(金湖島)와 광양제철소’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평화롭던 어촌 공동체 금호도의 운명은 1981년 11월 4일, 정부가 이곳을 제2종합제철소 입지로 최종 확정하며 급격한 변곡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국가적 명분 아래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대대로 바다를 경작하던 어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 산천을 내어주는 ‘이주민’이 되었습니다. 본 기사는 오늘날 세계 최고 제철 도시가 이룩한 영광의 토대가 된 금호도 이주민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 그리고 공간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사라진 금호도의 옛 마을과 섬들을 추억하다

오늘날 거대한 고로와 쾌적한 사원주택단지가 들어선 금호동은 과거 포구와 갯벌, 그리고 13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잔잔한 바다 위에 보석처럼 점지되어 있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본래 이곳은 ‘쇠섬’이라 하여 우도(牛島; 소섬)라 기록되었다가, 이후 금도(金島)를 거쳐 호수같이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품었다는 뜻의 금호도(金湖島)가 되었습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이 이 땅을 왜 ‘쇠섬’이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83년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고 그 자리에 세계 최대의 제철소가 들어서자, 비로소 세간에서는 거대한 철강 공장(쇠공장)이 들어설 운명적 땅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제철소 건립 당시 금호도에는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풍요로운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오던 유서 깊은 4개의 전통 마을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도촌(道村)마을- 섬의 길목이자 육지인 광영리와 금호도를 연결하던 ‘큰 나루터’가 있던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한때 나룻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옛 도촌나루터와 마을 자리에는 현재 육지화의 상징인 금호대교와 문화 공간인 백운아트홀, 그리고 앞바다를 매립한 자리에 송죽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내동(內東)마을- 섬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주민들에게는 정겨운 ‘안몰’이라는 이름으로 불던 순박한 씨족 부락이었습니다. 고즈넉한 선착장으로 고깃배들이 드나들던 옛 내동마을터와 그 앞마당이었던 원안들 부지에는 현재 광양의 명문 사학인 광양제철 초·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목련빌라 및 목련연립아파트가 대규모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동(大洞)마을- 1640년경 장씨(張氏) 성을 가진 선조가 처음 입촌한 이래, 옛 금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으뜸가는 마을이라 하여 ‘큰몰’이라 불리던 중심지였습니다. 수백 년 공동체의 온기가 남아있던 이 터 위에는 현재 포스코의 영빈관인 백운대와 장미아파트·장미연립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옛 흔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양도(羊島)마을- 금호도에 나란히 이어져 있던 섬으로, 과거 임진왜란 당시에 군수 물자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염소를 방목하여 키웠다 해서 ‘염소섬’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부락이었습니다. 주민들의 소박한 삶이 이어지던 이 양도마을 자리에는 현재 광양제철소의 심장부인 제철소 본부와 동백아파트, 그리고 백운생활관이 들어서 있어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 4개의 전통 마을 외에도 제철소 부지 조성을 위해 바다를 메우는 과정에서 금당도(金塘島)를 비롯한 13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지도 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주민들과 축구 동호인들이 자주 찾는 포스코 플랜트 부근의 ‘금당동(축구장 일대)’이라는 지명은, 비록 섬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존재했던 옛 금당도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살려둔 소중한 기억의 파편입니다.

과거 금호도와 육지를 이어주던 도촌나루터의 나루터 터 전경. 1980년대 초 광양제철소 건립 전까지 주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삶을 나누던 유서 깊은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비록 옛 마을의 가옥들과 갯벌은 거대한 철의 대지로 변모했지만,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주민들의 시린 애환과 추억만큼은 이 푸른 물길 위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1983년 초가을의 이주와 광영동 정착

보상 협상과 철거라는 격동의 시간을 거친 후, 금호도 주민들은 마침내 1983년 초가을을 시점으로 정든 섬을 떠나 집단 이주길에 올랐습니다. 가재도구를 손수레와 트럭에 싣고 바다 건너 육지인 광양시 광영동(廣英洞) 이주단지로 이사를 온 것입니다. 당시 금호도 이주민 1세대들의 90% 이상이 광영동 이주단지에 모여 정착하며 고향의 공동체를 육지에서나마 이어가고자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이주민들의 운명을 가른 현대사의 웃지 못할 비극적 순간이 발생합니다. 당시 정부와 포항제철 측이 조성한 광영동 이주단지는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가 건물 부지와 일반주택 부지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분양이 공정성을 기한다는 명목하에 이른바 ‘심지 뽑기(추첨)’로 진행된 것입니다.

종이쪽지 하나를 어떻게 뽑느냐에 따라 이주민들의 경제적 자립 구조는 현격하게 달라졌습니다. 추첨 결과 운 좋게 상설시장 주변의 상가 건물을 분양받은 가정들은 지금까지도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일반주택 부지를 분양받게 된 대다수의 가정은 국민주택융자금을 상환하느라 뭍에서의 고단한 삶을 맨몸으로 버텨내야 했습니다. 평생 바다만 바라보던 손으로 육지의 거친 노동 현장이나 직장 생활을 전전하며 제2의 개척을 시작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금호도 이주민들의 새로운 삶의 개척지가 된 광영상설시장 전경. 1983년 초가을, 광양제철소 건립으로 정든 고향 섬을 떠나야 했던 금호도 주민들은 바다 건너 육지인 광영동 이주단지에 모여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 상설시장 주변의 상가 부지와 일반 주택지는 공정성을 위해 이른바 ‘심지 뽑기(추첨)’로 분양되었으며, 이는 이주민들의 정착 초기 운명을 가르는 처절하고도 고단한 삶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곳은 사라진 고향의 공동체를 육지에서 꿋꿋하게 이어온 이주민 1세대들의 강인한 생활 생명력과 서민 경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지독한 상실감과 향수병, 그리고 우리의 희생을 기억해 다오

평생을 바다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어민들에게 흙먼지 날리는 육지의 이주단지 삶은 심리적으로 거대한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섬에서는 사시사철 바다가 내어주는 풍요 덕에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던 이들이, 육지에 나오자마자 물 한 모금, 채소 한 포기조차 모두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차가운 자본주의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평생 직업이었던 김 양식과 고기잡이를 잃어버린 실업(失業)의 고통은 이주민들을 정신적으로 갉아먹었습니다. 좁은 이주단지 내에서 생계를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이주민 1세대들은 지독한 상실감과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낮이면 광영동 언덕배기에 올라 저 멀리 거대한 철 구조물로 변해가는 옛 금호도의 형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고, 밤이면 꿈속에서 여전히 도촌나루터의 나룻배를 타고 내동마을의 푸른 갯벌을 거니는 서글픈 나날이 수십 년간 이어졌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국가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고향을 제물로 바쳤던 그 위대한 어버이들의 가슴 속 멍 자국은, 화려한 광양제철소의 야경 뒤에 숨겨진 우리 현대사의 가장 가슴 아픈 그늘입니다.

광영동 이주단지에 정착한 지 어느덧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파릇파릇하던 청장년이었던 이주민 1세대들은 이제 대부분 백발이 성성한 노년이 되었거나 이미 상당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광영동에 남아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의 바람은 물질적인 거창한 보상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의 위대한 희생과 고향 금호도의 역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올바르게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주민들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광양제철소의 눈부신 성취 이면에, 자신들이 대대로 가꾸어온 황금빛 김 양식장과 평화롭던 고향 섬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스코(POSCO)와 광양시, 그리고 후손들이 명확하게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산업화 신화의 숨은 주역들을 기리는 금호도 이주민 기념탑. 1981년 제2종합제철소 입지 확정 이후, 평화롭던 황금빛 바다를 내어주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주민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성소(聖所)입니다. 차가운 석조물 너머로 흐르는 이주민들의 시린 현대사와 애환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밑거름이 되어 이 거대한 대지 위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시니어 기자의 시선- 조각공원 이주민 탑을 보며 느끼는 따뜻한 아쉬움

현재 금호동 백운쇼핑센터 앞 조각공원(금호로 149)에는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애환을 위로하고 상생을 기리기 위해 2006년 10월에 건립된 ‘금호도 이주민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매년 이곳에서 실향민들의 아픔을 달래는 망향제(금호도 이주민의 날)가 열리고, 사람 인(人) 자 모양의 조형물이 화합을 상징하며 서 있는 모습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쾌적한 산책로와 화려한 조각 작품들 사이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그 기념탑을 바라보며, 우리 시니어 기자의 시선은 깊은 성찰과 함께 메워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향합니다. 돌에 새겨진 차가운 비문과 상징적인 조형물 하나만으로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도촌, 내동, 대동, 양도마을의 정겨운 이야기와 13개 섬의 영혼, 그리고 주민들이 겪었던 ‘심지 뽑기’의 처절한 삶의 궤적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산업적 성취와 잘 가꾸어진 공원 한편에 박제된 기념탑을 넘어, 이제는 이들의 역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소프트웨어적 혁신’이 필요합니다. 이제라도 광양시와 포스코가 뜻을 모아 금호동 옛터나 광영동 이주단지 인근에 소박하게나마 ‘금호도 이주민 역사기록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기념탑이 상징적인 마침표라면, 기록관은 사라진 마을들의 옛 풍경,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구술 증언, 손때 묻은 생활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느낌표와 물음표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뿌리가 어떤 거대한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잔잔하게 전해줄 수 있는 진정한 현대사 교육의 증언대가 마련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태인도 앞바다 너머로 보이는 광양제철소 본부 건물과 이순신대교의 위용. 수백 년간 어민들의 삶을 품어주었던 풍요로운 갯벌과,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중심축이 된 현대식 제철 산업의 요람이 광양만 푸른 물길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습니다. 대대로 일구어온 고향 바다와 산천을 기꺼이 내어주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신화와 번영의 주춧돌을 놓았던 금호도 이주민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이 웅장한 풍경의 가장 깊은 뿌리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마치며- 사라진 섬의 영혼, 대한민국 산업의 영원한 등불이 되다

국가의 대업을 위해 대대로 이어온 황금빛 갯벌과 안방을 포클레인 앞에 내어주고 바다 건너 육지로 향해야 했던 금호도 주민들. 그들의 삶은 겉보기에 거대한 국가 권력과 산업화의 거친 물결에 밀려난 힘없는 민초들의 수난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뭍으로 나온 척박한 이주단지의 현실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심지 뽑기’의 무정한 운명 앞에서도 묵묵히 땀 흘려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키워내는 위대한 실용적 생활 생명력을 다시 한번 증명해 냈습니다.

바다 위에 세워진 거대한 광양제철소의 고로에서 매일 밤낮없이 뿜어져 나오는 붉은 쇳물의 불꽃은, 단순히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불빛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향 산천을 통째로 녹여 대한민국 경제 재건의 주춧돌로 삼게 했던 금호도 이주민들의 숭고한 영혼과 백절불굴의 기개가 타오르는 ‘희생의 불꽃’입니다.

비록 옛 도촌나루터와 내동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땅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위대한 헌신은 오늘날 전 세계를 누비는 대한민국 산업의 영원한 등불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사라진 금호도의 영혼과 이주민들의 가슴 저린 서사가 우리 광양 시민들의 가슴속에 마르지 않는 자부심이자 올바른 역사의 이정표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음 제27회 예고]

국가 산업화 뒤에 가려진 이주민들의 위대한 희생을 뒤로하고, 다음 회차에서는 민초들의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민생 경제의 모태였던 장터로 향합니다. 돈과 곡식뿐만 아니라 온갖 소식과 따뜻한 정이 교류하며 소통의 혈맥 구실을 했던 ‘ 광양 오일장(5일 시장)’ 편이 이어집니다. 장터 바닥에서 피어난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시니어 기자의 깊은 시선으로 조명할 예정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