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등록문화유산 제341호) 광양 망덕포구 끝자락에 나지막이 엎드린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의 전경입니다. 1925년에 건립되어 당시 양조장 겸 주택으로 사용되던 이 절충식 근대 건축물은, 대한민국 문학사상 가장 거룩한 기적이 일어난 성소(聖所)입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망덕포구 끝자락, ()가 숨을 쉬던 집

지난 제21회에서는 일제강점기 거센 수탈의 한복판에서 민초들의 한숨과 항일 의병들의 거룩한 노호(怒號)가 교차했던 ‘수탈과 저항의 바다, 망덕포구’의 장엄한 비극을 돌아보았습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진월면의 열다섯 갯마을이 일제의 거대한 간척 사업과 수문 설치로 지도가 바뀌고 식량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우리 선조들은 황병학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일본 어선과 상점을 격파하며 민족의 기개를 바다 위에 드높였습니다.

이번 제22회에서 우리가 발걸음을 멈출 곳은, 그 거칠고 비릿한 바닷바람이 고스란히 드나드는 망덕포구의 나지막한 끝자락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시간이 홀로 멈춰 선 듯, 퇴색한 나뭇결을 드러내며 나지막이 엎드린 가옥 한 채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날 행정구역상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에 위치한 이 건물은, 한눈에 보기에는 그저 근대기 어느 어촌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상가 주택이나 낡은 창고처럼 투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소박하고 낡은 지붕 아래에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어둡고 참혹했던 암흑기, 조선의 가장 순수한 영혼이 담긴 시편들이 목숨을 걸고 살아남은 ‘위대한 기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육필 원고, 즉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와 수색을 피해 몸을 숨겼던 국문학자 백영(白影) 정병욱(1922~1982) 선생의 당대 고향 집입니다.

문학이란 칼보다 약해 보이지만, 때로는 한 시대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총칼이 지배하던 무단과 수탈의 시대에, 오직 한 사람의 시인을 알아본 친구의 눈물겨운 우정과 그 약속을 생명처럼 받든 가족의 헌신이 어떻게 민족의 대문학을 구원해냈는지, 그 작고 낡은 마루 밑 깊은 항아리 속에 숨겨졌던 숭고한 사랑의 성지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시인의 숨결이 흐르는 강과 바다, 오늘날의 망덕포구” 시인 윤동주의 유고를 품어낸 정병욱 가옥이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광양 망덕포구의 전경입니다. 섬진강의 맑은 물줄기가 긴 여정을 마치고 남해의 푸른 바다와 비로소 몸을 섞는 이곳은, 시인이 그토록 노래하고자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이 가장 투명하게 투영되는 자연의 요람입니다. 사진=문성식

망덕포구의 작은 집, 별을 품다

이 가옥이 처음 지어진 것은 일제강점기가 한창 무르익던 1925년의 일입니다. 당시 망덕포구는 섬진강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남해의 물길이 교차하여 사람과 물자가 넘쳐나던 상업적 거점이었고, 이에 따라 정병욱 선생의 부친은 이곳에 양조장(술도가) 겸 살림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의 전통 한옥 구조에 상업적 편의를 위해 일본식 점포 양식이 가미된 절충형태의 가옥이었습니다. 일제의 수탈 기지가 된 포구 한편에서 술을 빚고 밥을 짓던 이 평범하디평범한 민초의 공간이 대한민국 문학사의 전면이자 거룩한 성소로 등장하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가 맺어준 찬란한 인연 덕분이었습니다.

1940년대 초반의 조선은 말 그대로 영혼의 동토(凍土)였습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극대화하며 우리의 성과 이름은 물론, 어머니에게 배우고 쓰던 조선말과 글마저 완전히 박탈하려 들었습니다. 문학을 총칼의 아래에 종속시키려던 그 서슬 퍼런 시절,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깊은 문학적·사상적 교감을 나누던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바로 졸업을 앞둔 청년 윤동주와 그를 친형처럼 따르던 후배 정병욱이었습니다.

윤동주는 1941년 졸업을 기념하여 자신의 청춘과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 19편을 모아 시집을 발간하고자 계획했습니다. 자필로 꾹꾹 눌러 쓴 시집의 임시 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내 꺾이고 말았습니다. 당시 문학계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의 검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했으며, 스승인 이양하 교수조차 “지금 이 시집을 냈다가는 치안유지법으로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며 출판을 만류했던 것입니다.

출판의 꿈이 좌절되고 일본 유학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길을 떠나야 했던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고백들을 지켜낼 마지막 방법을 고안합니다. 그는 한 자 한 자 온 정성을 다해 원고를 정교하게 필사하여 단 세 권의 책을 묶었습니다. 한 권은 먼 유학길을 떠나는 자신의 품에 안았고, 또 한 권은 자신을 아껴주던 이양하 교수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의 보루이자 자신의 시 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해 주었던 동반자, 후배 정병욱에게 남은 한 권을 양도하며 담담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병욱아, 내 영혼이 담긴 이 시들을 네게 맡긴다. 이 글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는 이제 너에게 달렸구나.”

그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의 전달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라는 거대한 어둠에 짓밟혀 스러져가던 조선 청년의 정신과 생명, 그 자체를 전달한 신성한 수탁(受託)이었습니다.

“역사의 어둠을 밝힌 기적의 자리, 시집을 품었던 마루 밑 밀실” 정병욱 가옥 안채 내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윤동주 유고 보존 처(處)’의 모습입니다.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게 된 정병욱 선생과 그의 어머니 박용옥 여사는 일제의 혹독한 검문과 수색을 피해 안채 마루 널빤지를 들어내고 땅속 깊이 옹기항아리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싼 윤동주의 육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숨겨 해방의 그날까지 온몸으로 지켜냈습니다. 사진=문성식

무너진 시대, 마루 밑에 숨긴 조선의 마음과 어머니의 손

정병욱 선생이 받은 시집은 윤동주 시인의 고독과 부끄러움, 그리고 시대를 향한 서정적 저항이 응축된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나 정병욱에게 찾아온 운명 역시 가혹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일제 말기, 전쟁의 광기에 눈이 먼 일본은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의 총받이로 강제 징집하기 시작했고, 1944년 대학생이던 정병욱 역시 ‘학도병(학병)’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정병욱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형무소나 전쟁터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형 윤동주가 맡긴 이 시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였습니다. 가택 수색과 징용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성(서울)의 자취방은 결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정병욱은 고심 끝에 시집을 품에 숨기고, 머나먼 남쪽 끝 고향 집인 광양 망덕포구로 내려왔습니다.

정병욱은 마당에서 어머니 박용옥 여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신신당부했습니다.

“어머니, 만약 일본 순사들이 와서 집을 다 뒤엎더라도 이 책만은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 목숨보다 소중한 동주의 시집입니다. 만약 제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해방되는 날이 오면 반드시 이 원고를 세상에 내놓아 주십시오.”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어머니의 가슴은 미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용옥 여사는 아들의 눈빛 속에서 그 요청이 지닌 무게를 직감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유품을 넘어, 아들의 영혼이자 조선의 미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머니는 영리하고도 단호하게 움직였습니다. 일제의 안테나와 밀정들이 번뜩이던 망덕포구 한복판에서 대담한 작전을 감행한 것입니다. 밤이 깊어 포구의 파도 소리가 가옥의 벽을 거칠게 때릴 때, 어머니는 양조장 안쪽에 위치한 주거 공간의 마루 널빤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차갑고 어두운 흙바닥을 깊게 파내어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습기와 벌레로부터 종이를 지키기 위해 원고를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고, 이를 다시 옹기 항아리 속에 깊숙이 넣었습니다. 땅속에 항아리를 묻은 뒤 다시 마룻바닥 널빤지를 덮고 징을 박아 완벽하게 위장했습니다. 그날 이후 해방이 되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 박용옥 여사는 그 마룻바닥 위에서 밥을 짓고, 바느질을 하며, 밤낮으로 그 자리를 깔고 앉아 온몸으로 비밀의 문을 지켰습니다.

당시 망덕포구는 물자가 반출되던 요충지였기에 헌병과 순사들의 검문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곳이었습니다. 구두 발자국 소리가 가옥 문턱을 넘어올 때마다 어머니의 심장은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굳건한 모성(母性)과 조선 여인의 대담한 절개는 일제의 그 어떤 날카로운 눈길도 마루 밑 어둠 속까지 미치지 못하게 막아냈습니다. 빼앗긴 들에서 조선의 가장 맑은 시 정신은 그렇게 망덕포구의 땅속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찬란한 빛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흙바닥 속에서 피어난 민족의 문학, 항아리에 담긴 시인의 마음” 정병욱 가옥 안채 마룻바닥 아래, 당시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숨겼던 자리에 재현된 옹기항아리와 복제된 육필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모습입니다. 사진=문성식

우정(友情),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확증과 기적의 부활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포구 너머로 해방의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정병욱 선생이 고향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그 마룻바닥 앞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굳게 닫혀 있던 마루 널빤지를 다시 뜯어내었습니다. 거친 흙을 헤치고 항아리 뚜껑을 열었을 때, 명주 보자기 속의 원고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온전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그들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광복을 불과 6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차가운 이국땅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원인 모를 주사를 맞으며 만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인이 생전에 품고 갔던 원고는 일본 경찰에 의해 압수되어 불태워졌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경성의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맡겨졌던 원고 역시 전쟁과 혼란의 와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 대한민국 땅 남쪽 끝자락 광양 망덕포구의 어두운 마루 밑 항아리 속에 숨겨져 있던 정병욱의 부본(副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 경이롭고도 눈물겨운 생존이야말로 우리 문학사가 맞이한 가장 거룩한 기적이었습니다. 만약 정병욱 선생의 목숨을 건 우정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목숨처럼 지켜낸 어머니의 강인한 지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의 문장들을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암흑의 계절을 뚫고 나온 이 찬란한 고백들은 1948년, 정병욱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이름의 유고 시집으로 정식 출간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병욱 선생은 훗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친 뒤, 말년에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위대한 회고를 남겼습니다.

“내 평생에 가장 큰 보람이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국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학문적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다. 오직 청년 시절, 내 소중한 벗 동주의 시집을 내 손으로 지켜내어 마침내 세상에 전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일이다.”

이 가옥은 단순한 콘크리트와 목재의 결합물이 아닙니다. 한 시인의 순결한 영혼과, 그 영혼의 무게를 고스란히 알아보고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친구의 우정, 그리고 자식의 약속을 완성하기 위해 밤잠을 설쳤던 고결한 인문학적 절개가 빚어낸 ‘죽음을 이긴 사랑의 확증’입니다.

정병욱 선생의 후손이 주관하는 정기 강연회 안내판,  정병욱 가옥 내부에서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의 후손이 시민들과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매월 1회 정기 강연회를 진행하고 있는 생생한 모습입니다. 이 강연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읊는 시간이 아닙니다. 암흑 같았던 일제강점기 말기, 자신의 안위보다 벗의 문학을 먼저 걱정했던 청년 정병욱의 우직한 신의(信義)와 그 약속을 목숨처럼 받들었던 어머니 박용옥 여사의 결단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치로 남아있는지를 후손의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하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사진=문성식

정병욱 가옥의 건축적 가치와 보존의 현장

오늘날 국가등록문화유산(옛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역사적·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매우 독특하고 소중한 근대 건축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가옥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가혹한 수탈의 기지로 기능하던 어촌 포구의 상업적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전면부는 전형적인 일본식 점포(상가) 주택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당시 망덕포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양조장 사업과 물자 유통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건물의 내부와 안채로 들어서면 우리 전통 한옥의 가구 구조와 평면 배치가 자연스럽게 결합해 있습니다. 즉, 외형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상업적 기능(양조장)을 수행하는 일본식 양식을 따르되, 내부는 조선인의 삶의 방식과 정서를 지키려는 한옥의 절충형 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공간은 가옥 내부의 ‘마루 밑 밀실’입니다. 현재 광양시의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 사업을 통해, 방문객들은 정병욱 선생의 어머니가 실제로 시집을 숨겼던 바로 그 마룻바닥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옥의 일부 마루 널빤지를 투명한 유리로 마감하여, 그 아래 어둡고 깊은 흙바닥과 시집을 품었던 항아리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은 이제 단순한 건축의 부재(部材)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이곳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과 후손들에게 “당신이 진정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소리 없이 웅변하는 ‘침묵의 강단’이자 역사 교육의 살아있는 시청각 자료입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박물관보다, 이 낡고 작은 가옥의 서늘한 마루 위에 서서 느끼는 공간의 울림이 훨씬 더 거대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망덕포구와 배알도를 잇는 ‘별 헤는 다리’(윤동주 해상보도교) “아픈 역사의 바다 위에 놓인 위로, 시인의 별빛을 따라 걷는 길” 섬진강 하구의 망덕포구와 아름다운 수변 공원이 있는 배알도를 연결하는 명소 ‘별 헤는 다리’의 웅장하고 수려한 전경입니다. 사진=문성식

시니어 기자의 시선, 사라지지 않는 문장의 힘을 믿으며

가옥 내부의 오래된 마루 위에 서서 지긋이 눈을 감고 포구의 파도 소리를 들어봅니다. 나무 발판이 내는 나지막한 삐걱거림 속에서, 80여 년 전 이 자리를 지키며 숨죽여 기도했을 정병욱 선생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와 숨결이 만져지는 듯합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는 참으로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의 꼬리를 지나 6·25 전쟁의 참화, 그리고 보릿고개와 산업화의 거친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온 지상의 과제이자 생존의 전부였던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삶의 벼랑 끝에서도 마음 한구석을 따스하게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기술이나 물질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면면히 흐르던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과 ‘아름다운 문학적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거리를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타보면 온통 스마트폰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가볍고 자극적인 문장들에 매몰된 젊은이들을 자주 봅니다. 단 몇 초 만에 사라지는 디지털 정보가 세상을 지배하는 오늘날, 이 작고 낡은 광양의 가옥에서 목숨을 걸고 종이 뭉치를, 한 시인의 마음을 지켜내고자 했던 그 우직한 신의(信義)는 우리에게 신선하고도 무거운 충격을 줍니다.

기자로서 간절히 바라건대, 이번 주말에는 사랑하는 손주들의 손을 잡고 이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을 꼭 한번 방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화려한 가상 현실이나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인간의 진심이 만들어낸 기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얘야, 우리가 매일 교과서에서 읽는 이 아름다운 시가 사실은 이 조그만 마룻바닥 아래 항아리 속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은 거란다”라고 말입니다. 역사는 책의 인쇄물에만 머물 때 박제되지만,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야기되어 전해질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격동의 역사를 품고 흐르는 물결, 서정과 기억이 공존하는 오늘의 포구” 정병욱 가옥의 안채와 마당을 나서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광양 망덕포구의 전경입니다. 섬진강의 고요한 물줄기가 남해의 푸른 바다와 조용히 몸을 섞는 이곳은, 지난 제21회에서 다루었던 일제강점기 가혹한 식량·수산자원 수탈의 현장이자 황병학 의병부대의 거센 저항이 몰아쳤던 역사적 격랑의 중심지였습니다.한때 수탈의 배들이 분주히 오가며 민초들의 눈물이 얼룩졌던 비극의 바다는, 이제 시인의 영혼과 정병욱 선생 가족이 보여준 우직한 신의(信義)를 품은 채 역사의 증언대가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아픈 상흔을 따스한 서정과 문화로 승화시킨 망덕포구의 물결은, 오늘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깊은 위로와 울림을 아낌없이 건네주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마치며, 망덕포구에 뜨는 영원한 별

윤동주 시인은 청춘의 모든 고뇌를 품은 채 먼 타국의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외롭게 눈을 감으며 밤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지상의 별빛, 그의 영혼과도 같았던 시편들은 이곳 광양 망덕포구의 작은 집에서 정병욱이라는 위대한 우정의 손을 거쳐 찬란하게 부활했습니다.

정병욱 가옥은 세상을 향해 묵묵히 속삭이고 있습니다. 시대의 밤이 아무리 깊고 어두울지라도 진실한 별은 결코 빛을 잃지 않으며, 그 별빛을 어둠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은 결국 ‘사람의 진심과 사랑’이라는 위대한 사실을 말입니다.

포구의 가옥을 되돌아 나오는 길, 서산으로 기우는 노을빛을 머금은 섬진강의 잔물결 위로, 시인의 ‘서시’ 한 구절이 진남루의 바람 소리에 섞여 오래도록 귓가를 맴돕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다음 제23회 예고]

망덕포구에 서린 서정적인 문학의 향기를 뒤로하고, 이제 우리는 다시 근대의 뜨거웠던 함성과 저항의 현장으로 전진합니다. 다음 회차에서는 광양 전역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흔들었던 ‘광양의 3·1 만세운동’ 이야기를 다룹니다.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떨쳐내고 장터와 길거리로 뛰어나왔던 이 땅 민초들의 처절하고도 당당했던 항일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참고 정보]

소재지: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운영시간: 10:00 ~ 17:00 (관람료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