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발밑에 잠든 천 년의 밑그림, 옛 광양읍성 안내도” 광양 역사문화관 인근에 세워진 이 안내판은 사라진 광양읍성의 골격과 주요 기관의 위치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노란 선으로 표시된 성곽과 푸른 선의 해자(인공 도랑)가 당시 광양의 안과 밖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지금의 농협 네거리(동문), 옛 경찰서(서문), 합동정류소(남문)를 잇는 이 사각형의 틀이 바로 오늘날 광양읍 시가지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보이지 않는 성벽, 잊혀진 경계를 찾아 떠나는 역사 산책

우리가 매일 무심코 걷는 광양읍의 도로와 골목길 아래에는, 과거 이 도시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쪽의 삶을 질서 있게 갈무리했던 거대한 ‘성벽’의 기억이 잠들어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 옛 관아 터를 통해 행정의 중심을 보았다면, 이번 호에서는 조선 시대 광양의 심장이자 방패였던 ‘광양읍성(光陽邑城)’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광양읍성, 빛의 고을을 감싸 안다

광양읍성은 조선 시대 광양현의 행정 중심지인 관아와 백성들의 거주지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평지성입니다. 광양읍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13년(태종 13년) 광양현을 설치하기 이전부터 이미 성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415년 전라도 관찰사 박습의 계문을 통해 보더라도 그 역사는 유구합니다.

읍성의 건립 배경과 규모

당시의 성은 나무로 기둥을 세운 ‘목책성(木柵城)’이었습니다. 그 이후 1430년경 세종의 명으로 성을 다시 쌓도록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고, 마침내 문종 1년(1451년) 8월, 하삼도체찰사 정분의 순찰 보고로 미루어 보아 이때 비로소 석성으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 1812척, 높이 7척 6촌에 달했습니다. 세 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현 농협중앙회 부근 네거리를 10m쯤 지나 북쪽 골목에, 서문은 구 광양경찰서장 관사 앞 골목 부근, 남문은 옛 합동정류소 인근에 위치했습니다.

성곽이 규정한 도시의 골격

성곽은 단순히 돌을 쌓은 담장이 아니라 광양이라는 도시의 골격을 규정하는 밑그림이었습니다. 현재 광양읍의 중심 도로인 ‘매천로’와 인근 골목들은 과거 읍성의 성벽을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성 안쪽에는 관아와 객사가 자리 잡고, 성 바깥으로는 오일장이 서면서 광양만의 독특한 상업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동문 밖 마을, 동외(東外)에 서린 행정의 자취

오늘날 우리가 ‘읍내리’라 부르는 지역은 옛 읍성이 위치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성내리, 동외리, 목과리 등을 병합하여 읍내리로 확정되었습니다.

특히 읍성의 동문 밖 마을인 ‘동외(東外)마을’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 광양 행정의 실질적인 중심지였습니다. 1600년대부터 이곳에는 객사, 현감의 집무소인 봉양각, 육방 아전들이 일하던 작청, 교육기관인 훈도청, 그리고 옛 광양읍사무소(현 광양역사문화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동외마을이라는 이름은 ‘동문밖에 있는 마을(동문외촌)’에서 유래되었으며, 지금의 동외지역은 옛 동문 밖과 성내 지역 일부를 포괄하는 광양 역사의 터전입니다. 비록 지금은 행정기관들이 소실되거나 이전하여 예전의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새롭게 조성된 문화테마길을 통해 우리는 그 시절의 숨결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성벽이 있던 자리, 이제는 시민들의 일상이 흐르는 길목” 길가 화단 한편에 묵묵히 서 있는 읍성 안내판 뒤로 현대적인 건물과 자동차들이 오가는 읍내리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조선 시대 백성들을 보호하던 육중한 성벽은 사라졌지만, 그 성곽을 따라 형성된 길의 굴곡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의 생활 지도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벽 위에 세워진 이 길 위에서 우리는 광양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밟으며 걷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동문 밖 역사의 숨결과 정채봉의 문학이 만나는 곳, 동외마을” 광양읍성 동문 밖에 자리 잡아 ‘동문외촌’이라 불렸던 동외마을의 입구입니다. 과거 객사와 작청 등 주요 관아 시설이 밀집했던 행정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이제 광양이 낳은 동화 작가 정채봉의 삶과 문학이 깃든 테마 마을로 변모했습니다. 안내판 속 1872년 광양현 지도와 마을 설명은, 잊혀가는 옛 터의 기억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정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사라진 성곽의 흔적을 추적하다

1925년을 전후하여 일제에 의해 광양읍성은 대부분 훼손되었고, 성벽과 성문은 모두 유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는 여전히 우리 고을의 지형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성터의 길목, ‘성안’과 ‘성밖’

우리 어르신들은 지금도 관습적으로 “성안에 간다”, “성밖으로 나간다”는 표현을 쓰시곤 합니다. 유당공원에서 광양초등학교 뒤편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능선과 길의 굴곡들은 과거 성벽이 있던 자리입니다. 성곽의 돌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집의 주춧돌이나 담장으로 흩어졌지만, 그 길의 곡선만큼은 역사의 화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유당공원(柳塘公園)과 비보림(裨補林)

광양읍성 서쪽의 유당공원은 원래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판 해자와 연못, 그리고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비보림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의 고목들은 과거 읍성을 지켰던 파수꾼처럼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사라진 성곽의 경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읍내 길이 왜 이렇게 굽어 있나 싶지요? 그게 다 옛날 성벽 따라서 길을 내서 그래요. 우리 어른들은 저쪽 길목을 ‘서문 앞’이라고 불렀지. 성문은 없어도 우리 마음속엔 아직 성문이 번듯하게 서 있는 셈이에요.” (광양읍 주민 I씨)

무너진 성벽 위의 도로와 기억의 재생

조선 시대 내내 광양의 보루였던 읍성은 1910년대 일제의 ‘시가지 정리’라는 명목 아래 헐려 나갔습니다. 일제는 성벽을 헐어 그 돌로 신작로를 닦고 연못을 메웠습니다. 우리가 걷는 넓은 길들이 사실은 무너진 성벽의 눈물 위에 세워진 셈입니다. 최근 광양시는 사라진 읍성의 흔적을 표시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돌벽을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고장의 정체성이 시작된 그 경계선을 다시 확인하는 ‘역사적 환기’의 과정입니다.

“읍성의 서쪽을 지키던 비보림의 기억, 유당공원의 맑은 반영” 잔잔한 연못 위로 정자와 고목이 투영된 유당공원의 평화로운 전경입니다. 조선 시대 광양읍성을 쌓을 당시, 서풍을 막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되었던 이 숲은 이제 시민들의 소중한 쉼터가 되었습니다. 연못의 물줄기는 과거 성 주위를 감싸며 적의 침입을 막던 해자(垓子)의 기억을 품고 있으며, 물가에 늘어선 수백 년 된 나무들은 사라진 읍성의 경계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천 년 행정의 터에 다시 피어난 붉은 설레임, 광양문화원의 홍매화” 옛 광양현의 관아가 있었고 근현대 광양군청이 자리했던 유서 깊은 터(현 광양문화원)에 선명한 홍매화가 만개했습니다. 수많은 행정의 결정이 내려지던 엄숙한 공간은 이제 시민들이 매화 향기를 맡으며 여유롭게 거니는 산책길이 되었습니다. 붉게 물든 꽃가지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과 산책 나온 시민의 뒷모습에서, 역사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흐르는 강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진=문성식

마음의 성벽을 보수하는 일

사라진 광양읍성을 묵상하며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단지 돌무더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와 자존감이 무너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광양읍성은 ‘수호’와 ‘공존’을 위한 울타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벽이 없는 시대를 살지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마음의 성벽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무너진 읍성의 자취를 따라 걷는 길은, 우리 시대에 다시 세워야 할 정의와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성벽’을 보수하는 소중한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곽의 길 위에서 미래를 묻다

광양읍성의 사라진 성곽 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 아래의 옛 돌들이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지키며 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성벽은 돌로 세워지지만, 성곽의 생명력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의(信義)로 유지된다.’

다음 제10회(제1부 마지막 회)에서는 읍성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 이 땅의 주인이었던 선조들이 거대한 돌을 세우며 영생과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던 ‘돌을 세우고 살았던 사람들, 석사리 고인돌’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빛을 정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