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16일)은 광양현감 어영담이 서거한 지 4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을 소개 받고, 1590년대 남해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수많은 영웅들을 알게 됐고, 까마득히 먼 옛날 그들의 희로애락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난중일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과 수많은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삶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 이라는 그림을 애써 담담한 수채화처럼 꺼내 보고자 합니다.
[싣는 순서]
제1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①〕 과거로부터의 영웅 초대
제2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②〕 영웅들의 만남
제3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③〕 영웅들의 활약
제4편 :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④〕 영웅은 시대를 넘어
번외편 : 〔난중일기를 읽고〕 영웅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퀴즈가 있다.
정답은 이순신 장군이다. 모두들 위대한 장군이라고 여기는데, 정작 당사자는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만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분에 넘친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고, 입으로 교서만 외고 있으니,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난중일기, 1595년 5월 29일)라며 아무나 할 수 없는 겸손한 자학적 평가를 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이순신은 인물평이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강직한 성품답게 그 잣대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했다. 그런 이순신 장군이 유독 높이 평가한 인물은 ‘정운 장군’과 ‘광양현감 어영담’ 정도밖에 없었다.
광양현감 어영담은 1532년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은 환갑이었다. 이순신보다 13살 많았다. 어영담은 1564년 식년무과 병과에 급제했다. 1576년 같은 시험에 급제한 이순신보다 12년 군선배가 된다. 당시 조선은 장유유서가 꼿꼿한 사회였다. 그럼에도 어영담은 나이와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이순신 휘하 장수로 활약했다. 두 사람의 배포와 위급한 나라가 먼저라는 일념을 알 수 있다.
또 광양현감 어영담은 무예가 출중해 급제 전에는 여도진 수군만호에 특채됐다. 급제 후에는 진해 등 여러 곳에서 참모와 사천현감 등을 지냈다. 이를 통해 남해바다를 훤히 꿰뚫어 보는 ‘물길 마스터’가 됐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과 긴밀하게 전술적,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어영담은 물길과 전투수행 계책이 뛰어나 이순신 함대기동을 수립하고 지휘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이순신 함대가 보여준 현란하고 정교한 기동과 관련해선 어영담의 공적이 매우 컸다고 평가했다.
실제, 이순신은 ‘한산도 승첩 계본(1592년 7월 15일)’에서 “어영담은 적진으로 들어가 왜선을 격파하고 왜군 장수를 붙잡았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이런 무용담은 많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432년 전 광양현감 어영담이 단순한 책상머리형 이론적 전략가에 불과하지 않고, 돌격대장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지략과 담력을 갖춘 진정한 장수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지금 기준으로도 최고의 리더다.
한편, ‘조선시대 암행어사 제도(임병준, 전 감사원 국장)’를 보면, 영조 때 암행어사 이재간은 양진창(충주)에 곡식 6000석이 있어야 했는데, 단지 16석만 남은 사실을 적발했다. 당시 암행어사는 전국적으로 강타한 기아, 추위, 역질 등으로 백성들의 참상이 비참한 시기임을 감안했다.
오히려 현감이 백성 진휼을 잘했다고 포상을 건의했다. 시대 상황을 감안한 어사의 혜안이 돋보인다. 비록 영조가 재고부족에 대해 현감의 죄를 먼저 청하지 않았다 해 파직했지만, 후일 예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했다.
그렇지만 독운어사 임발영의 시각은 달랐다. 양곡 과다비축을 비리와 연계해 광양현감을 파직했다. 당시 임발영이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못해 수모를 당했다는 기록을 감안해도, 파직은 전시체제 비상 행정임을 고려치 않은 과도한 조치였다.
아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이 광양현감 어영담을 구명하기 위해 조정에 올린 계본(조선시대 임금에게 올리던 문서) 내용이다.
①임진장초(1593년 4월 8일) : 광양현감 어영담의 ‘유임’을 청하는 계본
광양현에 사는 김두 등 126명이 연명하여 호소문에 “고을 원이 자주 교체되어 부임하는 원을 맞이하고, 전출하는 원을 송별하는 뒤치다꺼리로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쳐 장차 빈 고을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영담 현감이 부임하여 백성의 힘든 사정을 물어서 잘못된 일을 고치며, 병기를 수선하여 비치하였습니다. 나라를 근심함이 자기 집같이 하여 도망친 백성들도 풍문을 듣고 돌아와 평안한 고을이 되었습니다.
작년 4월 영남 접경의 전란으로 하동, 곤양, 남해 등지 백성들이 도망쳐 인심이 동요됐습니다. 그때 도량 있는 어영담 현감이 아니었다면 진정시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영담 현감은 성품이 정중하며 의심이나 유혹됨이 없습니다. 광양읍성을 지키며 해전과 방어하는 책략을 상세히 연구하며, 두치와 강탄을 지켰습니다. 또 적에게 대항해야 하는 이치를 자세히 알려주어 사람들을 안정시켰습니다.
그런데 지난 1월 27일 독운어사가 여러 고을을 순찰하면서 각 고을의 창고 곡식을 조사하여 그 수량을 알고 운반해 가는 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광양에는 장부에 기록된 회계수량 이외에 쌀, 콩, 벼 등 모두 600여석을 평상시에 저장해 두고 군량미 혹은 백성 구휼미로 사용합니다. 어영담 현감도 쌀, 콩들을 씻나락이나 구호미로 쓰고 원장부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독운어사는 어영담 현감이 없을 때 고을에 와서 창고 물건을 조사하면서, 원장부 이외에 저장해 놓은 곡식을 현감이 착복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장계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례현감으로 하여금 창고를 잠그게 하여 이제는 씻나락와 구호미를 모두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농사철이 지나면 금년과 내년에 세금 낼 곡식이 없으니 걱정입니다. 또 어영담 현감은 임금께서 몽진한 뒤 필요한 물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을 대비하여 원수량 외 백미 60석을 관아 창고에 더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죄도 아닌 일에 파직하게 되니, 고을 백성들은 부모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순찰사는 서울에 주재하여 바닷가 백성들은 호소할 곳이 없어서 도에 호소문을 제출합니다. 하오니 빨리 이 뜻을 장계하여 군사와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광양현은 사변 후에 인심이 흉흉해져 모두 달아날 생각만 했는데 어영담 현감이 진정시켜 고을 백성들이 예전과 같이 편안히 살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전라도에 여러 번 근무하여 물길의 형세를 잘 알고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어영담은 생각함이 뛰어난 사람으로 신이 중부장으로 정해 전략을 함께 세웠고, 전투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므로 호남 한쪽이 이제까지 보완하게 된 것은 실로 어영담의 일부분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독운어사 장계로 인해 본직이 갈린다 하는 바, 창고의 곡식이 더하고 덜한 것은 신이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어영담은 지난 2월 6일 신과 함께 출전하여 거제와 웅천 등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독운어사가 광양에서 곡식을 조사할 때는 이미 유위장에게 고을 안건을 전담케 한 바, 비록 수량에 가감이 있더라도 실상은 어영담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과실이 있다하더라도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의기 있는 장수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적을 방어함에 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해전은 사람마다 능한 것이 아니므로 이런 시기에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군사상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민심을 고려하여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자리에 유임시켜 바다로 침범하는 적을 막게 하고, 곤란한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 주도록 할까 하여 아뢰오니 조정에서는 참작하여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와 함께 양곡 과다 비축 건으로 좌의정 윤두수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자,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다.
②임진장초(1593년 11월 17일) : 광양현감 어영담의 ‘조방장 임명’을 청하는 장계
지난 윤 11월 5일 도착한 광양 가관(假官, 조선시대 임시로 임명하던 관원) 김극성의 공문에 의하면, “좌의정(윤두수) 및 도원수(권율)가 같이 의논하여 보낸 차첩에 이번에 광양현감을 장계하여 파직하고 가관을 임명하는 것이니 인신(印信, 관인)과 병부(兵符, 조선시대에 군대 동원하는 표지)를 인계 받아 공무를 집행하라.
두치의 길목을 방비하는 일을 경솔하게 하지 말고 자주 순시하여 사변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에 이달 윤 11월 2일 광양에 부임하니, 어영담 현감이 이미 출전하여 인신과 병부를 인계받지 못했지만 창고를 봉하고 공무를 집행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영담은 이미 파직되었습니다. 어영담은 뱃길에 익숙하고 영남과 호남의 물길 사정과 섬들의 형세를 상세하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적을 무찌르는 일에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작년에 적을 무찌를 때도 매번 선봉장으로 나서 큰 공을 여러 번 세웠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도 우수한 인재입니다.
어영담은 이미 파직됐지만 수군 조방장(助防將, 최고 장수를 돕는 역할, 현재의 참모장. 한국고전용어사전)으로 임명하여 끝까지 계획하고 방책을 세워 큰일을 성취하도록 해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장계한 ①광양현감 어영담 유임, ②조방장 어영담 임명 요청 건은 모두 원하는 데로 해결됐다. 그리고 이듬해 음력 3월초 당항포 해전이 발발했다. ‘조방장 어영담’은 이 해전에 출전해 대활약을 펼쳤다. 아래는 이순신 장군이 그 활약상을 적어 임금에게 올린 내용이다.
③임진장초(1594년 3월 10일) : 당항포 해전 승첩 계본에서의 ‘조방장 어영담의 활약’
왜적들이 거제도, 진해, 고성 등지를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살인, 방화, 납치, 약탈을 일삼고 있다 합니다. 왜적을 토벌코자 3도의 장수들에게 전투준비를 하달했습니다.
3월 3일 영등포에서 왜적선 31척이 나와서 당항포로 21척, 진해 오리량으로 7척, 저도로 3척이 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즉시 신은 경상 우수사와 전라 우수사에게 전령을 보냈으며, 3도의 장수들이 모여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향했습니다.
4일 새벽, 불의의 사태에 대비코자 견내량에 전선 20여 척을 두었습니다. 신은 경상 우수군과 함께 영등포와 장문포의 적진 앞 바다 가운데서 ‘학익진’을 형성하여 군사의 위세를 보여주고 뒤로는 적의 퇴로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3도의 가볍고 빠른 배를 골랐습니다. 전라 좌도에서는 사도첨사 김완 외 장수 9명(전선 10척), 전라우도에서는 해남현감 위대기 외 장수 10명(전선 11척), 경상우도에서는 남해현령 기효근 외 장수 9명(전선 10척) 총 31명의 장수를 선발했습니다.
함대의 지휘 장수로 어영담을 임명하고 함대를 적들이 있는 곳으로 급파시켰습니다. 어영담 함대가 진해 선창에서 왜선 10척이 있는 것을 보고 일시에 돌진하자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고 도망쳤습니다. 진해 읍전포(6척), 시굿포(2척), 고성 어선포(2척)에 있는 왜적선 10척을 남김없이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또 왜적선에 포로로 잡혀있던 양민 3명을 구했습니다.
4일 당항포에 들어간 왜선은 21척인데, 불타는 연기를 보고 겁을 먹고 육지로 올라가 진을 쳤습니다. 어영담이 당항포로 갔으나 썰물 때이고 날이 어두워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5일 새벽,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당항포구로 들어갔습니다. 왜적들이 21척을 버리고 도망쳐서 어영담 함대는 왜적선을 모두 깨뜨리고 불태웠습니다…(이하 생략)
20년간 이순신 전적지를 300회 이상 답사 연구한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은 “이순신은 괭이 바다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이곳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고, 그중에서 견내량과 중도를 막는 해상봉쇄 작전으로 큰 승리를 거둔 것이 제2차 당항포 해전이었다”고 밝혔다.
“학익진으로 함대위력을 과시하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적선의 퇴로차단, 기동함대 운영 등 치밀하고 신속한 전략으로 압승을 거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어영담을 기동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승을 거뒀다. 어영담 장군 서거 34일 전의 일이었다. 어쨌든 이 장면은 이순신 장군에게 왜 어영담이 필요했는지를 말해준다. 또 어영담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이토록 먼 후세까지 살아있게 됐다. 이런 것을 지음(知音)이라고 했던가.
▣ 난중일기 1593년 상반기 : ‘광양현감 어영담’ 관련 기록
▶1593년 2월3일. 맑다 [양력3월5일] 동쪽 상방에 앉아 순천부사, 낙안군수, 광양현감(어영담)과 한참 동안 의논했다.
▶1593년 2월13일. 비가 창대 같이 내렸다 [양력3월15일] 저녁 8시쯤에야 비가 그쳤다. 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를 불러 이야기하였다.
▶1593년 2월15일.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양력3월17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왔다.
▶1593년 2월21일.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3월23일] 우수사 원균과 순천부사, 광양 현감도 와서 만났다
▶1593년 2월18일. 맑다 [양력3월20일] 이른 아침에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하다. 사도첨사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녹도가장, 좌우별도장, 좌우돌격장, 광양2선, 흥양대장, 방답2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에 매복 시켜놓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몇 척이 뒤따라 나왔다.
▶1593년 2월23일.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3월25일] 식사를 한 뒤에 원균(元均) 수사가 오고, 순천부사, 광양현감, 가덕첨사, 방답첨사도 왔다.
▶1593년 2월29일. 흐리다 [양력3월31일] 순천부사, 광양현감도 왔다. 경상 우수사(원균)가 와서 만났다.
▶1593년 3월8일. 맑다 [양력4월9일] 낙안군수와 광양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오고, 우수사도 왔다. 어란포 만호도 소고기로 만든 음식 몇 가지를 보내 왔다.
▶1593년 3월12일. 맑다 [양력4월13일] 광양현감이 술을 가져왔다.
▶1593년 5월5일. 맑다 [양력6월3일] 저녁 무렵 우수사, 순천, 광양, 낙안의 영감들과 함께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1593년 5월10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6월8일]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중부장(中部將) 어영담, 척후장 김완…
▶1593년 5월11일. 맑다 [양력6월9일] 순천부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1593년 5월13일. 맑다 [양력6월11일]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매달아 놓고 순천부사, 광양현감, 방답첨사, 사도첨사 및 우후, 발포만호가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1593년 5월15일. 맑다 [양력6월13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났다. 정오 무렵 활 쏘는 곳에 이르러 순천, 광양, 사도, 방답 등과 자웅을 겨루는데 나도 쏘았다.
▶1593년 5월17일. 맑다 [양력6월15일]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순천부사, 광양현감, 보성군수, 발포만호 및 이응화가 와서 만났다
▶1593년 5월25일. 맑다 [양력6월23일] 거제현 앞 유자도 앞 바다 가운데에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하였다. 광양현감이 왔다. 최천보와 이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1593년 5월26일. 비가 내렸다 [양력6월24일] 순천부사가 집에다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광양현감도 왔다.
▶1593년 5월27일. [양력6월25일]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1593년 5월28일.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6월26일] 광양 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비변사에서 공문이 왔다. 광양현감을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것이었다.
▶1593년 6월4일.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양력7월2일] 충청수사 정걸과 이홍명, 광양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 군사에 관한 이야기하였다.
▶1593년 6월7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7월5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왔다. 우수사, 충청수사도 왔다. 이승명도 와서 종일 서로 이야기했다.
▶1593년 6월8일. 잠깐 맑다가 바람이 불고 온화하지 않다 [양력7월6일] 광양현감이 오고 소비포 권관도 왔다. 광양현감은 소고기를 내어 같이 먹었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1593년 6월9일. 맑다. [양력7월7일] 수십 일이나 괴롭히던 비가 비로소 개이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 고기를 가져왔다.
▶1593년 6월14일. 비가 잠깐 오다 개었다 [양력7월12일]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왔다. 광양현감은 노루고기를 내왔다.
▶1593년 6월16일. 잠깐 비 왔다 [양력7월14일] …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왔다. 초저녁 무렵 영등포 척후병이 “김해, 부산에 있던 적선 500여 척이 안골포, 제포 등지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1593년 6월20일.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7월18일] … 저녁에 방답,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났다.
▶1593년 6월27일. 잠깐 비가 오다 갰다 [양력7월25일] 아침에 순천부사, 광양현감을 불러 와서 군사 문제를 논했다.
▶1593년 6월29일. 맑다 [양력7월27일] 하늬바람이 잠깐 불더니 청명하게 갰다. 순천부사, 광양현감이 와서 만났다.
【참고자료】
▷난중일기, 다빈치 지식지도, www.davincimap.co.kr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2
▷임진장초, 충무공 이순신,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