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상봉 표지석. 사진=이경희

광양의 명산(名山) 백운산(1222m)은 등산객도 많고, 4대 계곡이 있어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이 찾는다. 그리고, 이곳엔 여순사건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유적지도 남아 있다.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일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이다. 병사들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나 진압군에 밀려 22일에는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향했고, 일부는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이후 좌익세력과 함께 빨치산운동을 전개, 작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혼란이 지속됐다.

1950년 6.25전쟁이 겹쳐지면서 혼란은 가속화됐다. 빨치산들은 산중 추운 날씨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밤이면 인근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을 괴롭혔다. 낮엔 진압군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빨치산에 동조 또는 협력했다고 다그치는 생활이 1955년 4월 1일까지 6년여간 지속됐다.

당시 희생된 원혼을 70여 년간 달래지 못하다가, 2021년 여순특별법이 제정돼 유족이나 친지들의 신고로 화해의 물꼬를 트고 있다.

광양의 여러 곳에서 여순사건의 혼란으로 피해가 발생했지만, 현대화 물결에 묻혀서 도로가 나는 등 유적지를 찾기도 어렵다. 그러나 백운산 중턱에는 유적지가 남아있다.

연병장이라 쓰여진 큰 바위. 사진=이경희

첫째는 ‘연병장’이다.

옥룡면사무소를 지나 옥룡계곡 한재 쪽으로 오르다 해발 500m쯤에 ‘연병장’이란 글이 적힌 큰 바위가 있다. 바위 부근은 널찍하고 평평해 부대원들이 모여 훈련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다. 70여 년 전, 비밀리 움직이는 빨치산이 쓴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연구원은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시점에도 있었다고 하니 진압군이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바위에 파인 ‘학독’.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총일과 수저를 놓았다. 사진=이경희

둘째는 ‘학독’이다.

연병장을 지나 100여m 올라가 오른쪽 오솔길로 한참을 올라가다 옆으로 개울을 건너면 ‘학독’이 나온다. 해발 817m(6.7부) 높이에 있다. 학독은 절구통의 일종으로, 돌이나 나무를 파서 곡식과 고추, 마늘 등 양념을 찧고 빻아 밥을 짓거나 반찬을 만들던 도구다. 이것이 바위에 파여 있으니, 이 작은 학독에 무엇을 얼마나 빻아 먹고 생활했을까.

연구원들이 88비트로 추정되는 장소에 서있다. 사진=이경희

세 번째는 ’88비트’다

김영승 회고록 ‘백운산 봉우리에 남겨진 이름 마지막 소년 빨치산’에는 ‘88은 도당암호다. 동계(겨울)공세 전(前)에 구들장을 만들고 잣나무로 귀틀집을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지어서 틈새를 진흙으로 발라 바깥공기를 차단시키고…’라며 당시의 비참한 생활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88비트’라고 쓰인 곳의 고도를 찍어보니 해발 822m였다. 당시 도당(귀틀집)을 중심으로 보초를 섰던 능선 일대를 출입하기 위해서는 암호가 필요했을 터. 그래서 ’88’이란 암호를 사용했을 것으로 연구원들도 추정한다. 유적지 답사갔을 때, 한 어르신이 나이와 성명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산사람(빨치산)은 대부분이 추워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고 당시의 비참했던 상항을 증언하기도 했다.

광양시는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된 후 2023년 10월 19일을 기해 광양읍에 ‘광양 추모비’를 세웠다. 유적지 답사에 참여한 한 연구원은 “유적지 조사와 채록사업 등을 광양시가 지원해 계속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파악하지 못한 사례나 유적지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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