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섬진강 자락의 숨은 보물, 진월면 최고(最古)의 역사 터전 ‘차동마을’을 가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이 멈추어 서고 섬진강이 남해의 푸른 바다와 몸을 섞는 곳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고즈넉이 자리 잡은 마을이 있다. 바로 우리 진월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깊은 문화의 향기를 품고 있는 ‘차동마을(차사리)’이다.
수리치 고개 아래 맑고 푸른 차사저수지를 앞마당처럼 품고 있는 이 마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수백 년 전 조상들의 숨결과 근현대 위인들의 자취가 배어나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고려시대의 활기찬 포구에서부터 일제강점기의 구국 투쟁, 현대 문학의 낭만, 그리고 명창의 소리판에 이르기까지, 차동마을이 간직한 깊고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 고려의 바다를 품었던 포구, ‘수리개’와 차의포소의 역사
지금은 푸른 들판과 고즈넉한 저수지가 마을을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지만, 아주 먼 옛날 차동마을 앞마당은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던 바다였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이곳은 마을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왔고 주변은 온통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차동마을의 옛 이름은 ‘수리개’ 또는 ‘수레개’였다. 마을 뒤편의 수리치 고개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형이 수레처럼 생겼다 하여 한자로 수레 차(車) 자를 써서 ‘차동(車洞)’이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진다.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옛날에 배가 정박하고 드나들었다는 뜻을 가진 ‘배들이’라는 정겨운 지명이 남아 있어, 이곳이 과거 활발한 해상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해 준다.
차동마을의 역사적 깊이는 국가 문헌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주요 문헌에는 이곳이 ‘차의포소(車依浦所)’라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872년에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도 ‘차의포(車依浦)’라는 지명이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어,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미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번성했던 진월면 최고(最古)의 터전임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약 570여 년 전 안동 권씨 혹은 광산 김씨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기틀을 잡았고, 이후 순흥 안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의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 100년 고택 ‘용암세장’에 깃든 세 가지 위대한 일화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멀리서도 한눈에 품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전통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광양시 향토문화유산 제15호로 지정된 ‘진월 차사리 용암세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진 이 고택은 순흥 안씨 종가로, 근대 한옥의 구조적 특징과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건축 문화유산이다.
용암세장은 단순히 오래된 옛집을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머물다 간 ‘이야기의 화수분’이다. 이곳에는 세 가지 위대한 문화적 인연이 깃들어 있다.
① 백범 김구 선생의 은밀한 발걸음과 애국의 숨결
1940년대 해방 전후의 격동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은 전국을 돌며 애국지사들과 소통하고 인재를 모으는 데 힘쓰고 있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기거나 시국을 논할 안전한 장소가 절실했던 백범에게, 호남의 깊은 자락에 자리 잡은 차동마을의 용암세장은 천혜의 요새이자 따뜻한 품이었다.
어느 깊은 밤, 삼엄한 눈을 피해 차동마을에 도착한 김구 선생은 용암세장의 솟을대문을 넘어 사랑채로 안내되었다. 당시 집안의 어른들은 나라의 큰 지도자를 모시기 위해 온 집안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극도로 보안을 유지했다. 사랑채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김구 선생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문중 어른들과 시국을 논했다.
백범 선생은 특유의 호방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로 독립 이후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 즉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민족의 지도자를 품어주었던 용암세장의 의리는, 지금까지도 차동마을의 고결한 선비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② 소나기처럼 찾아온 문학의 거장, 황순원 작가의 한옥 산책
시간이 흘러 1960년대 중반, 용암세장은 또 한 번 대한민국 문화사의 기념비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에는 칼과 총의 정치가 아닌, 따뜻하고 서정적인 ‘문학의 붓’이 이 고택을 찾아왔다. 단편소설 《소나기》로 한국 문단을 이끌던 황순원 작가가 그 주인공이었다.
계기는 용암세장 가문의 손녀이자 소설가인 안영 선생의 문단 등단이었다. 황순원 작가는 안영 선생의 재능을 높이 사 그녀를 추천했고, 이를 인연으로 동료 문인인 서정범 수필가,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청년 시인이었던 황동규 선생과 함께 직접 광양 차동마을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멀고 먼 남도 끝자락까지 내려온 문인 일행은 용암세장의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 아름다운 건축미와 마을을 둘러싼 풍광에 탄성을 질렀다. 황순원 작가는 용암세장의 넓은 툇마루에 앉아, 앞마당 너머로 보이는 차사저수지의 푸른 물빛과 수리치 고개의 능선을 오랫동안 묵묵히 바라보았다.
낮에는 아들 황동규 시인과 함께 마을 입구의 수백 년 된 당산나무 아래를 거닐며 시상을 떠올렸고, 밤이 되면 사랑채에 모여 문학 청년 안영 작가에게 소설의 플롯과 문장에 대해 밤새도록 조언을 건넸다. 대작가의 따뜻한 격려와 가르침이 가득했던 그 밤, 용암세장의 마당에는 은은한 달빛과 함께 한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밤이 흐르고 있었다. 황순원 작가는 떠나기 전 *”이곳의 맑은 바람과 한옥의 기품이 내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는 찬사를 남겼다.
③ 명창 신금홍의 피를 토하는 ‘독공(獨功)’과 신명 나는 소리판
용암세장은 우리 민족의 한(恨)과 흥을 노래했던 최고의 예술가에게도 최고의 수행처였다. 일제강점기 남도 전역을 뒤흔들었던 당대 최고의 여류 명창, 신금홍의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더 깊고 맑은 소리를 얻기 위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피를 토하는 수행인 ‘독공(獨功)’을 이어가던 신금홍은 섬진강의 맑은 기운과 수리치 고개의 정기가 한데 모이는 용암세장을 찾아왔다. 풍류를 아는 집주인은 그녀가 오직 소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장 조용하고 아늑한 방을 내어주었고, 신금홍은 이곳에 무려 석 달(90일) 동안 머물렀다.
신금홍은 매일 새벽 차사저수지의 맑은 물에 세수를 하고 용암세장 뒤편의 대나무 숲과 용바위로 향했다. 대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동무 삼아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기와지붕을 흔드는 그녀의 호쾌하고도 서글픈 목소리가 온 차동마을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석 달의 모진 공부 끝에 마침내 ‘득음(得音)’의 경지에 도달한 신금홍은, 자신을 품어준 가문과 주민들을 위해 용암세장 앞마당에서 보답의 무대를 준비했다. 마당 가득 멍석이 깔리고 온 동네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신금홍의 목 구멍에서 춘향가의 백미인 ‘암행어사 출두’ 대목이 터져 나오자, 용암세장의 높은 기와지붕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애간장을 녹이듯 애절하게, 때로는 천둥이 치듯 우렁차게 퍼지는 그녀의 창법에 주민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억눌렸던 서러움과 한을 한판 춤사위로 시원하게 씻어내렸다. 신금홍은 “용암세장의 기품 있는 마당과 차동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귀가 없었다면 내 소리가 이만큼 깊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며 큰 절을 올렸다.


■ 저수지와 당산나무, 그리고 정겨운 사람들의 일상
현재 차동마을은 자연과 사람이 가장 평화로운 농촌의 정취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선 푸른 하늘빛을 가득 담은 차사저수지는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는 낚시 명소이기도 하지만, 주민들에게는 고단한 농사일 틈틈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쉴 수 있는 소중한 쉼터다. 저수지 한편에는 ‘용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와 운치 있는 정자가 있어 마을의 풍경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마을 곳곳에는 역사만큼이나 깊은 뿌리를 내린 12그루의 당산나무(풍치목)중 일부가 서 있다. 이 나무들은 수백 년 동안 마을에 들이닥치는 모진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커다란 그늘을 내어주었다. 주민들은 매년 당산나무 아래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져왔다.
차동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매력은 외지인을 대하는 ‘소박하고 따뜻한 정’에 있다. 마을을 찾은 낯선 나그네에게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정자 바닥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네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차동마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문화다.
최근에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만든 ‘마을지(마을 역사책)’를 서로 돌려보며, 자신들이 살아온 삶과 조상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서 공동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난다. 효자 안진묵 정려비나 조상들의 공적비 같은 유적들을 정성스럽게 돌보고 가꾸는 일 역시 주민들의 일상적인 약속이다.


■ 역사·문학·자연이 어우러지는 차동마을의 미래
전국의 많은 농촌 마을들이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것처럼, 차동마을 역시 조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차동마을은 절망하기보다 자신들이 가진 독보적인 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활력을 꿈꾸고 있다.
차동마을이 그리는 미래는 ‘지속 가능한 역사·문화 생태마을’이다. 100년 고택 용암세장과 백범 김구, 황순원 작가, 명창 신금홍으로 이어지는 풍부한 스토리텔링 자원은 인근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나 망덕포구 등 진월면의 다른 역사 관광지와 연계하여 훌륭한 인문학 여행 코스로 거듭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차사저수지의 수려한 생태 자원을 결합해 바쁜 현대인들이 찾아와 지친 심신을 달래고 가는 ‘쉼과 치유의 공간’을 조성하는 마스터플랜이 싹트고 있다. 전통 가옥에서의 하룻밤(한옥 스테이), 명창들이 거쳐 간 마당에서의 작은 국악 음악회, 황순원 소설의 정취를 느끼는 문학 산책로 조성 등은 차동마을의 미래를 밝혀줄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이다.
고려시대 포구의 활력에서 시작해 선비들의 학문적 깊이, 구국의 결기, 그리고 근현대 문학·예술의 낭만을 거쳐온 광양 진월면 차동마을. 조상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늘도 정겹게 모여 정을 나누는 주민들이 있기에 차동마을의 위대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미래를 향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
[다음 회차 예고]
제50회 <길 위의 광양사>에서는 광양 ’12실’ 중 하나인 봉강면 지곡리 지실마을(紙室)을 찾아갑니다. 해발 400m 일자봉 아래 자리한 지실마을은 예부터 무성한 닥나무로 한지를 빚어내며 선비들의 글과 문향(文香)을 떠받쳐 온 유서 깊은 터전입니다. 한지를 빚던 인문학적 유래부터 매천 황현 선생의 넋이 서린 영모재(永慕齋)까지, 전통과 선비 정신을 간직한 지실마을의 고즈넉한 역사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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