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 다압면 섬진나루터에 조성된 두꺼비 조형물. 고려 말 왜구를 물리쳤다는 금두꺼비 전설과 함께 오백 리 푸른 물길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오백 리 물길이 건네는 시간의 이야기

이름 속에는 저마다의 깊은 뜻이 담겨 있고, 강물은 흐르며 세월의 이야기를 씁니다. 전북 진안군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호남과 영남의 산자락을 가르며 달린 물줄기는, 마침내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에 이르러 온갖 지천의 물길을 하나로 품어 안습니다. 유역면적 4,895.5㎢, 총길이 212.3㎞에 달하는 대한민국 제4대 강, 섬진강은 그렇게 광양 땅을 거쳐 남해의 넓은 품으로 흘러갑니다.

본래 모래가 곱고 맑아 ‘모래내’, ‘모래가람’이라 불렸고, 국가 문헌에는 ‘사천(沙川)’ 혹은 ‘다사강(多沙江)’으로 기록되었던 이 평화로운 물길이 왜 하필 ‘두꺼비 섬(蟾)’ 자를 쓴 ‘섬진강’이 되었을까요? 이 명칭의 변화 속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선 민초들의 간절한 기도와,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이 서려 있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시니어들에게는 어린 시절 강변 모래밭에서 두꺼비집을 짓던 아련한 향수이자, 평생의 삶을 지탱해 준 생명의 젖줄이기도 한 섬진강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봅니다.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 강변에 서 있는 ‘섬진강 유래비’. 배 모양의 좌대 위로 왜구를 물리친 금두꺼비 전설과 옛 섬진나루터의 깊은 역사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사진=문성식
섬진나루 인근에 세워진 ‘두꺼비와 처녀’ 동상. 자신을 키워준 처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두꺼비 설화를 담고 있어, 우리네 부모님들의 지극한 인내와 헌신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문성식
  1. 섬진강 이름에 따른 전설, 금두꺼비 십만 대군의 울음소리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깊이 각인된 결정적인 사건은 고려 말 우왕 11년(1385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한반도의 남해안 일대는 왜구의 잔혹한 노략질로 신음하고 있었고, 광양만과 섬진강 역시 그 침략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해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불안해졌고 민심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어느 날, 왜구들이 경남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 광양 쪽으로 대거 침입하려던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왜선이 나루터에 도착하자 기이하고도 장엄한 괴변이 일어납니다. 광양시 진상면 섬거리, 즉 두꺼비가 산다는 뜻을 가진 마을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무려 8킬로미터나 떨어진 지금의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약속이나 한 듯 새까맣게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두꺼비 떼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일제히 강변에 모여 하늘이 무너지듯 울부짖기 시작하자, 그 천둥 같은 울음소리에 겁에 질린 왜구들은 감히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혼비백산하여 광양만 쪽으로 후퇴해 버렸습니다. 왜병들이 퇴각하자 두꺼비들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극적인 사건 이후, 본래 ‘두치강(豆恥江)’이라 부르던 이 강은 두꺼비를 통해 나라를 구했다 하여 두꺼비 ‘섬(蟾)’ 자를 따서 ‘섬진강’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섬진강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왜병의 주요 침입로를 막아내는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구한말 동학혁명 때에는 관군과 일군에 쫓긴 동학군 수천 명이 강 하류 지역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애환 어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가 이 강을 바라볼 때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강물 마다 새겨진 우리 조상들의 눈물과 호국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수월정(水월亭)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옛 섬진진의 거북 모양 석비좌대(石碑座臺). 비석은 사라졌을지언정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며 나라를 지킨 수군들의 굳건한 역사의 무게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옛 조선 수군의 기지이자 영·호남을 잇던 역사적인 요충지인 광양 섬진나루터의 현재 풍경. 선착장에 매여 있는 배 너머로 오백 리 섬진강 물길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사진=문성식
  1. 수월정과 섬진나루, 자연과 인문이 머무는 요충지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은빛 모래밭 사이로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수월정(水月亭)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 시대 선조 6년(1573년),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 선생이 말년을 고향인 광양에서 보내고자 지은 정자입니다. 정자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붉게 물드는 섬진강의 낙조를 바라보면,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이 왜 이곳을 직접 방문해 정자 이름을 짓고 찬미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갑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 강물의 도도한 풍경은, 격동의 세월을 살아내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시니어들에게 “순리대로 살아가되 내면의 강인함을 잃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를 건넵니다.

수월정 옆에는 오랜 세월의 굴곡을 견디고 복원된 ‘수월정유허비’와 함께, 옛 섬진진(蟾津鎭)의 역사를 보여주는 석비좌대(石碑座臺)가 남아 있습니다. 섬진강은 남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통로였기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조선 시대 수군 기지인 ‘섬진진’이 설치되었던 곳입니다. 나라를 지킨 수군 장수들의 공적비 밑을 묵묵히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석비좌대는, 비록 비석은 사라졌을지언정 모진 비바람을 견뎌낸 굳건한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이 역사적인 섬진나루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동양의 문화 문법 안에서 두꺼비가 가지는 인문학적 의미를 묻게 됩니다. 본래 두꺼비는 화려하거나 영민한 동물이 아니라 느리고 투박한 외모의 대명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이 이 보잘것없는 존재를 강의 수호신으로 격상시킨 데에는 지극한 인내와 대속(代贖)의 미학이 담겨 있습니다. 섬진강 가에는 자신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준 처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구렁이를 물리친 두꺼비 설화가 전해옵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소중한 공동체를 살리는 이 숭고한 원형은, 섬진강 거친 모래바닥에 발을 묻고 고단한 삶을 지켜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헌신과 닮아 있습니다.

동시에 이는 약자들의 유쾌한 반격이자 해학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사나운 호랑이나 신비로운 용이 아닌, 작고 미미한 두꺼비가 왜구를 물리쳤다는 설정은 가장 한국적인 위트입니다. 칼과 창의 무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생명을 지키고자 함께 쏟아내는 ‘낮은 자들의 연대된 울림’이라는 사실을 섬진강은 이름 그 자체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섬진강변에 세워진 ‘재첩잡이 손틀어업’ 안내판. 사람이 직접 강물에 들어가 ‘거랭이’로 재첩을 긁어내는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중요어업유산 및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진=문성식
자전거길 안내판 옆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다압면 끝들마을 앞 갈대밭 풍경. 오백 리 길을 달려온 강물이 바다를 만나기 전, 넓은 갈대숲을 품어 안으며 넉넉한 포용의 메시지를 건넨다. 이 푸른 물길은 곧 남해 바다와 맞닿으며 다음 여정인 ‘배알도’의 이야기를 향해 흘러간다. 사진=문성식
  1. 섬진강이 내어준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

대한민국의 5대 하천 중 섬진강은 유역 대부분이 호남정맥 계곡을 흐르는 형태라 주변에 대도시나 대형 산업 시설이 없고 하굿둑이 없습니다. 덕분에 ‘마지막 남은 청정 하천’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니어들에게는 어린 시절 맑은 물에서 뗏목을 타던 순수의 기억을 소환해 주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입니다. 강 좌측에는 장엄한 지리산이, 우측에는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포근하게 둘러싸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맑습니다. 중상류에는 청정 물고기의 대명사인 은어, 누치, 꺽지가 살아가고 있으며,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하구 기수역에는 멸종위기종을 포함하여 무려 996종의 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 청정 수역이 내어준 최고의 선물이 바로 국가 중요 어업유산으로 지정된 재첩잡이 ‘손틀어업’입니다. 바닷물과 민물이 밀당하듯 교차하는 섬진강 하구의 모래뻘은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갱조개(재첩의 전라도 방언)’의 요람입니다. 지금도 허리까지 차오르는 맑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거랭이’라는 도구를 끌며 사람이 직접 재첩을 긁어내는 정직한 노동의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건져 올려 밤새 맑은 물에 끓여낸 뽀얀 재첩국은 시니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최고의 향토 먹거리입니다. 푸른 부추 한 줌을 띄운 재첩국은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절 어머니가 새벽 일찍 장터에서 이고 오시던 그리운 향수의 맛입니다. 화려한 양념을 배제하고 재료 본연의 깊은 맛을 내는 그 담백함은 우리 시니어들의 정직한 삶의 궤적을 쏙 빼닮았습니다. 여기에 맑은 물에서 자란 참게를 푹 끓여낸 얼큰하고 시원한 참게탕과 쫄깃한 은어회, 숯불향 가득한 민물장어는 전국에서 찾아오는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광양 섬진강만의 귀한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 안의 두꺼비 소리를 듣다

섬진강은 거칠게 소용돌이치며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오백 리 길을 묵묵하고 완만하게 흘러오며 영남과 호남의 장벽을 허물고 두 지역을 다정하게 잇는 소통과 화합의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광양 사람들은 이 강물에 기대어 벼농사를 짓고, 재첩을 잡고, 나라를 지키며 위대한 삶의 대서사시를 써 내려왔습니다.

최근 강 상류의 수량 감소와 하구의 지형 변화로 염화 현상이 일어나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경종을 울립니다. 평생을 드러나지 않는 진흙 속에서 온종일 물을 정화하며 강을 맑게 유지해 온 작은 재첩처럼, 우리 시니어 세대 역시 묵묵한 헌신으로 지금의 풍요로운 대한민국과 광양을 일구어왔습니다.

오늘 식탁 위에 오른 담백한 재첩국 한 그릇에서, 자기를 녹여 세상을 맑게 하던 낮은 자들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강이 제 줄기를 아낌없이 비워내어 대해(大海)를 이루듯, 소리 없이 세상을 적시는 섬진강의 넉넉한 포용과 낙관주의의 정신은 오늘도 우리 광양 시니어들의 가슴 속에 푸른 젖줄로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다음 회에는 오백 리 섬진강 물길이 바다를 만나기 전, 신하가 왕을 배알하듯 솟아오른 신비로운 섬, ‘배알도(拜謁島)의 역사와 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