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취재를 마친 뒤 광양읍에서 만난 옻삼계탕 한 그릇. 진하게 우러난 국물과 찹쌀, 인삼, 대추가 어우러진 삼계탕은 무더위에 지친 몸의 기운을 북돋우는 대표적인 여름 보양식으로, 취재의 피로까지 녹여주었다. 사진=문성식

취재에 몰입하다 보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지만, 사람의 이야기가 끝난 뒤 찾아오는 허기는 늘 정직합니다. 이때 마주하는 한 끼의 밥상은 취재의 마무리가 아닌, 현장의 온기를 체감하는 또 다른 시작입니다. ‘취재하다 만난 광양의 밥상’은 일부러 찾아간 맛집이 아닌, 마을 골목과 삶의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한 음식들을 기록합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과 혼자서도 어색하지 않은 자리, 그 속에서 말없이 오가는 투박한 정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들이 광양의 소박한 풍경을 깨우고,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확인하는 정겨운 이정표가 되길 소망합니다.

백운산 계곡.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진 백운산 계곡. 여름철 무더위를 식혀주는 광양의 대표 피서지이자, 삼계탕 같은 보양식을 더욱 생각나게 하는 자연의 쉼터이다. 사진=문성식

백운산 자락을 취재하던 날이었다.

초여름 햇살은 어느새 한여름을 닮아가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여전히 맑았지만, 취재 장비를 둘러메고 오르내린 몸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람은 자연을 만나면 마음은 맑아지지만 몸은 먼저 허기를 느낀다.

취재를 마치고 광양읍으로 내려왔다. 문득 삼계탕 한 그릇이 생각났다.

광양은 불고기만 유명한 도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닭요리의 고장이기도 하다. 봉강면과 옥룡면의 깊은 산골에서는 닭 숯불구이와 백숙이 이름났고, 광양읍에는 수십 년 세월을 지켜온 삼계탕집들이 지역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왔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삼계탕집에는 점심시간이 한창이었다.

출입문을 열자 “어서 오세요.”라는 반가운 인사가 먼저 들려왔다. 식당 안은 가족 단위 손님과 직장인, 그리고 시니어들로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였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삼계탕집은 더욱 바빠진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사람들의 오랜 생활 방식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내부와 메뉴판. 광양의 40년 전통을 이어온 삼계탕 전문점. 황제삼계탕, 전복·참옻·녹두·흑임자 삼계탕 등 다양한 보양식 메뉴를 갖추고 손님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문성식

주문은 망설임 없이 옻 삼계탕.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방에서는 커다란 솥에서 김이 연신 피어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국물 냄새 속에는 인삼 향과 마늘 향, 은은한 한약재 향이 섞여 있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뚝배기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삼계탕 한 그릇이 식탁 위에 놓였다.

작은 영계 속에는 찹쌀과 마늘, 대추, 인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국물은 맑았지만 깊었고, 숟가락을 넣자 닭고기는 젓가락이 필요 없을 만큼 부드럽게 풀어졌다.

첫 숟갈의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취재의 피곤함도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여름을 이기는 가장 오래된 지혜

우리 조상들은 가장 더운 삼복더위에 오히려 뜨거운 음식을 먹었다.

이를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면서 기운과 염분이 빠져나간다. 뜨거운 삼계탕은 땀을 한 번 더 흘리게 하면서 체온을 조절하고, 잃어버린 영양을 보충하는 지혜로운 음식이었다.

삼계탕에는 닭고기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삼은 기운을 북돋우고, 찹쌀은 허기를 달래며, 마늘은 면역력을 높이고, 대추는 몸을 편안하게 해준다. 각각의 재료들이 하나의 보약이 되어 한 그릇 안에 담긴다.

그래서 삼계탕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생활의 의학이었다.

계삼탕에서 삼계탕으로

흥미롭게도 지금의 삼계탕은 처음부터 이 이름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닭이 주재료라는 의미에서 ‘계삼탕(鷄蔘湯)’이라 불렸다. 당시에는 생인삼을 구하기 어려워 인삼가루를 넣어 끓였다.

1960년대 이후 냉장기술이 발달하고 금산을 중심으로 수삼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인삼 한 뿌리를 통째로 넣는 지금의 삼계탕이 만들어졌다.

귀한 인삼의 가치가 더 크게 인식되면서 이름도 자연스럽게 ‘삼계탕(蔘鷄湯)’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복날이면 삼계탕을 찾는 문화 역시 그렇게 자리 잡았다.

식당 내부. 점심시간이 되자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로 식당이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만큼 북적인다. 오랜 전통과 변함없는 맛이 손님들의 발길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사진=문성식

시니어에게 더욱 반가운 한 그릇

예전에는 집에서도 백숙을 자주 끓였다.

마당에서 키우던 닭 한 마리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고 몇 시간을 푹 삶았다. 어머니는 찹쌀을 넣고, 마늘을 한 움큼 넣고, 대추 몇 알을 띄우셨다. 인삼은 귀해 넣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지만 가족들은 그 국물만으로도 충분한 보양이 되었다.

아버지는 닭다리를 자식들에게 먼저 건네셨고, 어머니는 남은 국물에 죽을 끓여 마지막까지 한 끼를 만들었다.

그 시절 삼계탕은 외식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렵다.

대신 삼계탕 전문점에서 옛 추억을 만난다.

시니어들에게 삼계탕은 단순히 건강식이 아니다. 젊은 날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함께 둘러앉아 웃던 가족의 식탁을 다시 만나게 하는 기억의 음식이다.

황제삼계탕 전경. 40여 년 전통을 이어온 광양의 대표 삼계탕 전문점. 백운산을 찾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들이 사계절 즐겨 찾는 보양식 맛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음식은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백운산 취재를 마치고 우연히 만난 삼계탕 한 그릇.

그릇은 비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채워졌다.

한 그릇의 음식에는 계절이 담기고, 사람의 손길이 담기며, 세월이 담긴다.

그래서 맛집은 단순히 맛있는 식당이 아니라 시간을 보관하는 장소인지도 모른다.

무더운 여름,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에어컨을 찾지만,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국물 한 그릇으로 여름을 이겨냈다.

삼계탕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이면서 마음까지 따뜻하게 하는 음식이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몸은 가벼워졌고, 오래된 추억 하나가 또 기사 속에 남았다.

  • 상호명-  ‘황제 삼계탕’ – 광양시 광양읍 서천2길 11 (061-763-7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