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붓 대신 카메라로 쓴 우리 시대의 유서(遺書)
그동안 우리는 날카로운 문장으로 역사를 기록한 선비들과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의병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이제 시대의 흐름은 활자에서 영상과 사진으로 넘어옵니다. 매천 황현 선생이 붓으로 망국의 한을 기록했다면, 우리 광양에는 카메라 셔터로 현대사의 가장 아픈 대목과 평범한 이웃들의 얼굴을 기록한 거장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사진계의 선구자이자 ‘한국의 로버트 카파’라 불리는 이경모(李慶模, 1926~2001) 작가입니다. 오늘은 광양읍 인서리에서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렌즈에 담았던 그의 예술혼을 따라, 찰나의 순간이 어떻게 영원한 역사가 되었는지 그 깊은 궤적을 쫓아가 봅니다.


광양의 부유한 도련님, 카메라와 운명적으로 만나다
이경모 작가는 1926년 광양군청 옆에서 양조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는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할 만큼 촉망받는 예비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할아버지가 사주신 한 대의 카메라였습니다. 당시 집 한 채 값에 맞먹는 귀한 물건이었던 이 카메라는, 화가를 꿈꾸던 소년에게 붓 대신 ‘빛의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광양 구석구석을 다니며 풍경을 찍었습니다. 훗날 “원래 서양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한때는 사진가가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뛰어난 조형 감각과 예술적 시선은 한국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순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비극의 현장에 서다
이경모라는 이름이 한국 역사에 깊이 각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48년 여순사건입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호남신문(현 광주일보 전신) 사진부장이었던 그는 목숨을 걸고 처참한 도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쓰러져간 무고한 시민들과 불타버린 마을의 모습은 그의 렌즈를 통해 생생한 증언이 되었습니다.
특히 여순사건은 비수도권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기록이 매우 드물었는데, 이경모 작가의 사진들은 사실상 그 비극을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건의 전개 과정뿐만 아니라,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희생되어야 했던 민초들의 슬픈 눈망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진은 훗날 『격동기의 현장』이라는 사진집으로 발간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사진집 사상 유례없는 6쇄 기록을 세우며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잃지 않은 ‘사람‘에 대한 예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국방부 종군 사진가로 활동하며 낙동강 전선부터 전국의 전장터를 누볐습니다. 피난민들의 행렬, 무너진 건물 사이로 솟아오른 삶의 의지, 그리고 전선의 병사들까지. 그는 “사진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는 것은 독자에 대한 직무유기”라는 소신 아래 포화 속을 거침없이 누볐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시선이 늘 ‘사람’과 ‘풍경’을 아울렀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건 자체만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기록자가 아니었습니다. 격동의 현장 속에서도 사라져가는 한국의 미(美)를 발견하려 애썼고, 이후 1970년대까지 전국을 돌며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교과서나 도록에서 보는 수많은 문화재 사진의 원형이 바로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미래를 위한 유산, 1,500대의 카메라와 후학 양성
이경모 작가는 현장을 떠난 뒤에도 교육자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 사진계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임응식 등과 함께 한국사진작가협회를 발족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특히 그는 평생 수집한 소중한 카메라 1,500대를 나주의 한 대학에 기증하며 자신의 삶을 갈무리했습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는 신념을 후대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광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와 심포지엄은, 그가 남긴 찰나의 기록들이 어떻게 우리 세대의 역사적 자산이 되었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우리의 오늘이 내일의 역사입니다“
이경모 작가의 삶을 되돌아보며 저 역시 ‘기록하는 자’의 무게를 새삼 느낍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역사의 산증인들입니다. 이경모 작가가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전장을 누볐듯이, 우리에게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시대를 기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로 누구나 사진작가가 되는 세상입니다. 손주들의 천진난만한 웃음, 변해가는 광양읍의 골목길,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한 장의 사진과 짧은 글로 남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화려한 예술작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남긴 오늘의 평범한 기록이 훗날 우리 자손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지도’이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작가의 진심이 오늘따라 더욱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마치며, 렌즈에 담긴 광양의 진심
이경모 작가는 2001년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흑백 사진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어떤 아픔을 딛고 여기까지 왔는가”를 잊지 말라고 말입니다. 광양읍 인서리, 그가 나고 자랐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찰칵” 하는 셔터 소리와 함께 멈춰 선 시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 했던 한 사진가의 고독한 투쟁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릴 뻔한 우리의 어제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찰나를 영원으로 바꾼 거장 이경모. 그의 이름은 광양의 풍경과 함께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다음 제21회 예고]
인물들의 이야기를 잠시 갈무리하고, 광양의 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으로 떠납니다. ‘일제 수탈의 아픔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망덕포구를 찾아, 그곳에 새겨진 파란만장한 역사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참고 정보]
이경모(李慶模, 1926~2001): 전남 광양 출생. 보도사진가, 교육자.
주요 저서: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사진집』 등.
기록 유산: 여순사건 및 6.25 전쟁 종군 취재 사진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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