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학 의병장의 가족 묘역에서 내려다본 수어댐의 평온한 전경입니다.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저 푸른 물결 아래에는 황병학 장군이 나고 자랐으며,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들이 구국을 도모했던 비촌마을의 옛터가 고스란히 잠겨 있습니다. 묘역 앞마당에 핀 순백의 제비꽃은 마치 이름 없이 사라져간 무명 의병들의 넋처럼 피어 있고, 이곳에 머물던 장군의 묘소는 이제 국립묘지로 옮겨졌으나 그 정신만은 여전히 굽이치는 물결과 산자락에 남아 광양의 산하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백운산 자락에 울려 퍼진 최후의 함성

우리는 지난 시간, 임진왜란의 영웅들인 형제 의병장 강희보·강희열을 만나보았습니다. 400여 년 전 진주성에서 산화한 그들의 우애와 충절은 광양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광양의 의로운 기개는 수백 년 뒤, 나라가 다시 한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바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붓 대신 총칼을 들고 백운산을 누볐던 황순모(黃珣模, 1845~1908)와 황병학(黃炳學, 1876~1931) 의병장입니다.

오늘은 화려한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두 분의 발자취를 따라, 구한말 광양의 산하를 피로 물들였던 그 처절하고도 당당한 항일 투쟁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100여 년 전, 이 땅의 평범한 유학자와 포수들이 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야 했는지, 그 맥박 소리를 찾아 길을 나섭니다.

비촌마을, 수어댐 아래 잠긴 기억과 사당의 정적

황병학·황순모 의병장의 숨결을 찾아 진상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달립니다. 굽이진 고개를 넘어서니 ‘백학동’이라는 거대한 표지석이 기자를 반겨줍니다. 아래로는 푸른 수어댐의 물결이 잔잔하게 빛나고, 산기슭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두꺼비 생태 이동길’로 이름난 비촌마을이 나타납니다.

마을 회관 옆에는 황순모·황병학 의병장을 모신 사당과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당 앞에는 수백 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가을이면 노란 잎을 떨구며 의병들의 넋을 위로했을 저 나무는,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수어댐을 안고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의병장 황병학 백운산 항일전투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기념비 너머 언덕 위로는 가족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원래 황병학 의병장의 묘소도 이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정갈하게 관리된 가족 묘역에는 형제의병장 묘소에서 보았던 보라색 제비꽃 대신, 수줍은 흰색 제비꽃이 활짝 피어 기자를 맞이합니다. 황병학 장군의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아들의 묘비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모습에서 한 집안이 감내해야 했던 희생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수어댐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가슴 한구석이 아릿합니다. 저 차가운 물속에는 수몰되기 전 비촌마을의 옛터와 의병들이 작전을 짜던 골목길의 기억이 함께 잠겨 있기 때문입니다.

황병학 의병장이 나고 자란 진상면 비촌마을에 위치한 창원 황씨 문중의 제각입니다. 정갈하게 맞물린 기와지붕과 고풍스러운 목조 구조는 이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선비 정신과 유교적 가통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학문을 닦던 황병학 장군이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구국의 길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이 뜨거운 충의(忠義)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곳은 장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가문의 맥을 잇는 소중한 역사의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붓을 꺾고 총을 들다

황병학 장군은 1876년 광양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재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선비로서 학문을 닦으며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기울어가는 국운 앞에 개인의 안락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른 살의 청년 황병학의 삶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통분을 참지 못한 그는 황사중(黃士中), 한성순(韓性純), 고견(高堅) 등 뜻있는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했습니다.

특히 그는 집안의 어른이자 종숙(당숙)인 황순모와 깊은 뜻을 같이했습니다. 황순모는 조카뻘인 황병학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치욕스럽게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비장한 격문을 사방에 붙여 민초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 간절한 외침에 호응하여 전남 동부와 경남 서부의 포수와 장정 200여 명이 백운산 묵백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농민군을 넘어, 산악 지형에 밝고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들이 주축이 된 정예 조직이었습니다. 마침내 1908년 7월 26일, 이들은 광양의 영봉인 백운산 상봉에 ‘호남창의대장기’를 드높이 꽂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양 비촌마을 인근 도로 변에 위치한 황병학 장군이 ‘호남창의대장기’를 꽂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한 ‘백운산창의’의 현장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사진=문성식
1908년 8월 5일, 황병학 의병장이 이끄는 150여 명의 의병이 일본인 어업가들의 본거지였던 망덕포구를 기습하여 거둔 승전을 기록한 망덕포 현장입니다. 당시 망덕포는 근대적 장비를 앞세운 일본인들이 광양 어민들의 생계를 싹쓸이하던 수탈의 현장이었습니다. 황병학 부대는 이곳에서 일본인 주택을 불태우고 선박을 침몰시키며 적들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과를 넘어,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신음하던 지역 민초들에게 해방의 희망을 심어준 광양 항일 투쟁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진=문성식

망덕포의 푸른 물결에 새겨진 승전보

기자는 발걸음을 옮겨 진월면 망덕포구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전어 축제로 유명하고 평화롭기만 한 이곳 바닷가지만, 1908년 8월 5일 이곳은 뜨거운 교전지였습니다.

당시 망덕포구는 일본인 어업가들이 근대적인 어선으로 우리 어장을 싹쓸이하며 광양 어민들의 생계를 옥죄던 곳이었습니다. 황병학 의병장은 15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이곳을 기습했습니다. 어민들을 괴롭히던 일본인 주택을 불태우고 선박을 침몰시켰으며, 적들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지금의 바닷물결 아래, 당시 어민들의 한을 풀어주던 의병들의 함성이 섞여 흐르는 듯합니다.

옥곡 후산 전투, 피로 물든 백운산의 비극

망덕포에서의 패배에 독이 바짝 오른 일본군은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했습니다. 1908년 9월 5일, 옥곡면 후산(뒷산)에서 의병 100여 명과 일본군 합동 토벌대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전투는 처절했습니다. 황병학 장군은 허벅지에 총탄이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도 부하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그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종숙 황순모를 비롯하여, 이찬주 등 13명의 의병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옥곡 후산은 조용하기만 한 산등성이지만, 그 흙 속에는 이름 없는 광양 젊은이들의 선혈이 스며있습니다. 종숙을 잃고 부상을 입은 채 산속을 헤매던 황병학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인 1909년 1월, 다시 군사를 모아 광양 헌병분소를 기습하여 총기 10정을 탈취하는 등 끝까지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광양향교 유림회관에 세워진 매천 황현과 황병학 의병장의 정신이 깃든 3.1운동 기념비 안내판. 사진=문성식
광양의 대표적인 항일 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과 황병학 의병장의 위업이 나란히 새겨진 3.1운동 기념비입니다. 1908년 백운산에서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섰던 황병학 장군의 투쟁은 의병 해산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의 열기 속에서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등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구한말의 의병 정신이 어떻게 3.1운동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입니다. 사진=문성식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진 끝없는 투쟁

일제의 소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황병학 장군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장 투쟁가에 머물지 않고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평양 형무소에서 4년여의 옥고를 치르는 등, 그의 독립을 향한 집념은 1931년 55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황병학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황순모 의병장에게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물길에 잠긴 그리움, 비촌마을 망향비(望鄕碑)에 새겨진 고향의 이름’. 수어댐 건설로 인해 정든 삶의 터전을 내어준 비촌마을 수몰민들의 그리움이 서린 망향비입니다. 이곳은 황병학 의병장이 나고 자라며 구국의 결의를 다졌던 호국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비석에 새겨진 고향의 이름들은 차가운 물속에 잠겼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백운산으로 향했던 의병들의 뜨거운 기개는 이 망향비처럼 굳건히 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텅 빈 마을 정자의 적막함 너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양의 맥박’이 이 비석을 통해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사진=문성식

시니어 기자의 시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맥박

취재를 마치고 비촌마을을 내려오는 길, 여전히 마을 정자는 텅 빈 채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수어댐 건설로 고향 터전이 물에 잠기고,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버린 농촌의 현실이 황병학 장군의 치열했던 삶과 대비되어 씁쓸함을 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자에 앉아 평화롭게 수어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100여 년 전 백운산 기슭에서 허벅지에 총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총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맥박’ 덕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터전은 잠겼어도, 그들이 지키려 했던 의로운 정신만은 결코 수몰될 수 없습니다.

황병학 가문은 대를 이어 민족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들 황호부 씨 역시 가업을 이어 지역의 역사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 집안의 역사가 곧 광양의 역사이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된 것입니다.

비촌마을 가족 묘역에 핀 하얀 제비꽃은 마치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의병의 넋 같기도 하고, 평생을 독립에 바친 장군의 결백한 영혼 같기도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화려한 관광지 대신, 수어댐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황병학 장군의 기념비 앞에 국화 한 송이 놓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분들이 지켜낸 것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바로 ‘광양 사람’이라는 우리의 자부심이기 때문입니다.

19회 예고, 절명시(絶命詩)로 지킨 민족의 자존심, 매천 황현

의병들이 총칼로 백운산을 지켰다면, 붓 하나로 일제의 침략에 맞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선비의 절개를 보인 인물이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봉강면 석사리에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집필하고, 국치(國恥) 앞에 ‘절명시’를 남기며 홀연히 떠난 시대의 지식인, 매천 황현 선생의 삶과 고뇌를 찾아갑니다.

[참고 정보]

주요 지역: 광양시 진상면 비촌마을, 옥곡면 후산, 진월면 망덕포구.

주요 공적: 1908년 백운산 창의, 망덕포 전투 승리, 광양 헌병분소 기습.

서훈: 황병학(건국훈장 독립장), 황순모(건국훈장 애국장).

기념 시설: 광양 향교 내 의사 황병학 기념비, 비촌마을 사당 및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