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무형유산 제57호 ‘진월 전어잡이 소리’ 공개행사 현장 모습. 알록달록한 오색 깃발과 농악패를 앞세운 보존회원 및 지역 주민들이 망덕포구 현장에서 신명 나는 길놀이 행진을 펼치고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장인의 손끝을 지나, 광양의 자연과 삶이 부르는 노래로

지난 회차에서 본지는 불꽃 속에서 쇠를 벼리던 장도장(粧刀匠)의 망치 소리와 백운산의 결을 고스란히 살려낸 공예 명인들의 고결한 손길을 조명했다. 손끝에서 피어난 기물이 광양의 물질문화를 지탱해 온 유산이라면, 백운산 골짜기와 섬진강 물길, 그리고 들녘과 포구에서 울려 퍼지던 ‘소리(音)’는 광양 사람들의 신명과 한(恨), 그리고 공동체의 숨결을 담아낸 가장 깊은 정신적 자산이다.

‘광양의 문화’ 다섯 번째 이야기인 이번 제55회에서는, 남도의 풍토와 농경·어로 노동 속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나 오랜 시간 겨레의 가슴을 울려온 ‘광양의 소리’를 탐구한다.

예로부터 광양은 산(山)과 강(江), 바다(海)가 조화를 이루는 독보적인 지리적 특성 덕분에 들노래, 어로요, 아이 어르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풍성한 음향적 자산을 품어 왔다. 고단한 노동을 흥겨운 신명으로 승화시키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던 광양의 소리는 오늘날에도 잊히지 않는 서정의 울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백운산 자락 아래 노랗게 물든 광양시 봉강면 들판의 고즈넉한 풍경. 예로부터 모심기와 논매기를 하며 고단함을 잊고 풍년을 기원하던 ‘광양 들노래(상사소리·절로소리)’의 생명력이 깃든 현장이다. 사진=문성식

들녘을 메운 민초들의 생명력 — 광양 들노래(농요)와 버꾸놀이

광양의 소리 중 가장 오래되고 생생한 민중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은 단연 ‘광양 들노래(농요)’다. 비옥한 광양읍과 봉강, 옥룡, 진상, 진월의 들녘에서 농부들은 모를 심고 논을 매며 고단한 시름을 달래기 위해 소리를 주고받았다.

광양 들노래는 모심기 소리인 `<상사소리>`부터 논매기 소리인 `<절로소리>`, `<장원질 소리>`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상사소리가 유연하고 아늑한 남도 특유의 육자배기조 가락으로 고단한 노동의 시름을 달랜다면, 일의 피로가 누적될 즈음 부르는 소리는 템포가 빨라지며 농민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 광양 농경 음향의 서사적 흐름 ]

[1. 모심기 (상사소리- 아늑하고 서정적인 가락)] ──► [2. 논매기 (절로소리- 사기를 북돋는 빠른 리듬)] ──► [3. 만석꾼 축원 (장원질 소리- 풍년을 기뻐하는 축원)] ──► [4. 신명의 대동판 (버꾸놀이- 손북을 치며 펼치는 신명)]

특히 일과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 풍장을 치며 부르는 `<장원질 소리>`는 풍년을 기원하고 농사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대동(大同)의 결정체다. 여기에 광양 고유의 ‘광양 버꾸놀이’가 더해진다. 농악의 한 갈래로서 손잡이가 달린 작고 단단한 북인 ‘버꾸’를 손에 쥐고 가락에 맞춰 화려한 공중 회전과 동작을 선보이는 버꾸놀이는, 단순한 악기 연주를 넘어 들녘의 정기를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독창적인 민속예술이다.

진월면 신답마을 회관 앞 마당에서 주민들과 농악단이 어우러져 ‘진월 전어잡이 소리’ 시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오색 깃발과 고기를 받는 엄마들의 대야, 풍물패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광양만 어로 문화의 활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사진=광양시
푸른 바다와 섬진강 민물이 만나는 황금 어장인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일대. 조선시대 문헌인 『임원경제지』와 『자산어보』에도 기록될 만큼 맛이 좋고 기름기가 풍부한 전어가 모여드는 산란기이자 주 서식지로서, 300년 넘게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 온 역사적 현장이다. 사진=문성식

남해안 어로 문화의 진수 — 전라남도 무형유산 ‘진월 전어잡이 소리’

섬진강 물길이 광양만과 합류하는 지점인 망덕포구 앞바다와 광양만 일대는 가을철이면 남해안 최고의 전어 성지였다. 백운산의 물길이 바다와 만나는 이곳에서 어민들은 거친 파도와 맞서며 생명을 건 어로 활동을 펼쳤고, 그 삶의 애환 속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57호 ‘진월 전어잡이 소리’이다.

① 진월 전어잡이의 역사와 방식

3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광양 진월의 전어잡이는 과거 돛단배 한 척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전후부터는 한 배에 6명씩 타는 두 척의 배(쌍끌이)가 나란히 출어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취했다. 각각 50미터에 달하는 그물을 내려 전어 떼를 둥그렇게 에워싼 다음, 두 배가 뱃머리를 맞대고 그물을 당겨 올리는 협동 작업이었다. 1980년대 광양제철소 건설과 함께 전통 어선들은 사라졌지만, 어부들이 부르던 노랫가락은 고스란히 남아 광양만의 바다 문화를 증언하고 있다.

② 6가지 어로 노동요의 구성

전어잡이는 출어부터 만선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공정에 따라 정확히 6가지의 소리로 짜여 있다.

* 노젓는 소리: 새벽녘 바다로 나아갈 때(출어)와 만선을 이루어 포구로 돌아올 때(귀항) 부르는 노래로, 뱃전을 두드리며 흥을 돋운다.

* 그물내리는 소리: 전어 떼를 발견한 사공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그물을 바다에 풀어놓을 때 부르는 긴박한 소리.

* 그물당기는 소리(에용소리): 원형으로 친 그물을 두 배가 머리를 맞대고 온 힘을 다해 끌어당길 때 부르는 협동의 노래.

* 가래질 소리: 그물에 가득 찬 전어를 ‘가래’라는 도구를 이용해 배 위로 퍼 올릴 때 부르는 소리로, 잦은 가락이 어깨춤을 절로 자아낸다.

* 만선 긴소리: 어로 활동을 모두 마치고 항구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때 사공이 느리고 웅장하게 부르는 소리.

* 도부꾼 퍼주는 가래질 소리: 포구에 도착해 잡아온 전어를 외지로 나가 판매하는 상인(도부꾼)들에게 퍼 넘겨줄 때 부르는 흥겨운 소리. 도부꾼에게 전어를 넘긴 후에는 어부와 도부꾼, 마을 풍물패가 하나 되어 대동놀이 판을 벌였다.

③ 민초들의 손으로 되살려낸 기적의 소리

진월 전어잡이 소리가 오늘날 무형유산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신답마을 주민들과 향토 사학자들의 끈질긴 노고 덕분이었다. 1997년 민점기 당시 문화예술팀장과 신답마을 향우들의 권유로 고(故) 김은배, 박인태, 박부명 어른 등 원로 소리꾼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가락을 증언했고, 마을 주민들이 보존회를 결성하여 1998년 남도문화제 입상을 시작으로 맥을 되살렸다.

이후 2013년 제54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일반부 금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공인받았고, 동년 12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박정호 보존회장을 중심으로 신답마을 주민들과 청년회가 의기투합하여 매년 봄·가을 공개 행사를 열고 있으며, 최근 마을회관 옆 전어잡이 소리 전수관 건립 추진과 함께 초등학생들까지 배움에 동참하면서 대중적 전승의 새 장을 열어 가고 있다.

진월 전어잡이 소리 보존회의 보금자리이자 마을 공동체의 중심인 진월면 신답마을 회관 전경. 건물 입구 우측에는 시연에 사용되는 전통 어선이 정성스레 보관되어 있어 무형유산의 맥을 잇는 보존회의 열정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광양시 봉강면 지곡리의 담장에 정겹게 그려진 ‘닥종이의 꿈을 품은 마을 지곡마을’ 벽화 풍경. 과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던 역사와 함께, 어머니가 막내딸을 어르며 부르던 ‘딸타령’의 애틋한 모성이 살아 숨 쉬는 고즈넉한 마을이다. 사진=문성식

일상과 품에 스민 따스한 울림 — 지곡마을의 「딸타령」(아기 어르는 노래)

광양의 소리는 거친 바다의 어로요에만 머물지 않는다. 백운산 자락 봉강면 지곡리(옛 지실) 마을에서는 어머니가 늦둥이 막내딸을 품에 안고 어르며 부르던 독특한 전래 민요인 「딸타령」(아기 어르는 노래)이 전승되어 왔다.

“딸아 딸아 막내딸아 / 곱게 먹고 곱게 커라 / 오동나무 장농에다 / 구와장석 걸머주마 / 삼사월에는 너물딸 / 오뉴월에는 냉수딸 / 동지섣달에는 숭늉딸…”

전통시대 아들 중심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아기 어르는 노래가 ‘충효동이’를 기원했던 것과 달리, 지곡마을의 「딸타령」은 봄날의 나물, 여름날의 냉수, 겨울날의 숭늉처럼 당장 어머니의 일손을 돕고 삶을 지탱해 주는 살가운 딸의 역할을 노래한다. 오동나무 장롱에 국화 모양의 금속 장식(구와장석)을 해줄 테니 건강하게 자라달라는 어머니의 애틋한 덕담 속에는, 남도 여인들의 소박한 삶의 희로애락과 따스한 모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섬진강 물길과 광양만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진월면 망덕포구의 잔잔한 풍경. 전라남도 무형유산인 ‘진월 전어잡이 소리’의 역사적 현장이자, 강과 바다가 빚어낸 해양 어로 문화의 정수가 서려 있는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전통의 소리에서 도시의 현대적 앙상블로

오늘날 광양의 소리는 옛 기억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라져가던 지역의 향토 소리를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광양 예술인들과 보존회의 노력 덕분에 광양 들노래와 버꾸놀이, 전어잡이 소리는 현대적인 공연 예술로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다.

광양시립국악단과 지역 풍물패, 판소리 전수자들은 전통 소리의 원형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현대적 감각의 국악 관현악과 융합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매년 가을 망덕포구에서 펼쳐지는 ‘광양전어축제’와 지역 문화 콘서트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국악의 향연은, 선조들이 들녘과 바다에서 부르던 생생한 목소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 도시민들의 가슴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동으로 공명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가슴으로 듣는 도시의 노래

광양불고기가 따스한 온기로 사람을 맞이하고, 장인의 손끝이 눈부신 기물을 빚어냈다면, 광양의 소리는 우리의 귀와 가슴을 열어 도시의 영혼을 깊이 있게 느끼게 하는 무형의 보석이다.

백운산 골짜기를 따라 내리는 청정한 바람 소리, 섬진강을 유유히 감싸며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물소리, 그리고 그 거친 물결 위에서 만선을 부르짖던 어민들의 투박하지만 구성진 가락이 모든 소리의 궤적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 가슴속에 은은하고 묵직한 파문을 일으킨다. 오늘 밤에도 서천 변과 망덕포구에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이 땅을 일궈온 옛사람들의 흥겨운 상사소리와 뱃전에 부딪히는 가래질 소리가 잔잔한 고동이 되어 귓가에 아련하게 밀려오는 듯하다.

[다음 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 제6부 광양의 문화] 56회 남도의 언어적 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삶의 보석, ‘광양의 언어, 사투리 말씨’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