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마을의 유래와 마을의 정체성을 알리는 ‘교촌마을’ 안내 표석.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향교의 문향(文香)과 민초의 신명이 함께 흐르는 마을

광양의 역사와 사람, 그리고 오래된 마을의 기억을 찾아 걷는 「길 위의 광양사」가 제5부 ‘광양의 마을’로 길을 넓혔다. 이번에 찾은 곳은 광양읍 교촌(校村)마을이다.

교촌은 이름부터 마을의 역사를 품고 있다. ‘학교 교(校)’와 ‘마을 촌(村)’. 말 그대로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광양향교가 자리한 이곳은 조선시대 지방의 유학교육과 유교문화가 이어진 공간이었고,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의 기억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양시 마을지에서도 교촌이라는 지명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며, 마을의 형성 시기를 향교가 들어선 이후인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교촌을 향교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곳에는 글을 읽고 예를 익히던 선비와 유생들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짓고 아이를 키우며 이웃과 함께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의 생활사도 함께 쌓여 있다.

향교에서 울렸을 글 읽는 소리와 마을에서 울렸을 농악과 민요의 소리. 서로 다른 듯 보이는 두 문화가 한 마을 안에서 만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교촌을 걷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 교육과 유교문화의 중심지였던 광양향교. 사진=문성식

향교를 품고 자란 마을

교촌마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먼저 광양향교를 만나야 한다.

광양향교는 조선 전기에 창건된 향교로, 광양시 자료는 1396년에서 1397년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1398년 창건설도 전해지는 만큼, 정확한 최초 건립 연대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13년 대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건물이 차례로 복원됐다. 이후에도 중건과 보수가 이어졌으며, 현재의 향교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후대의 정비가 함께 남아 있는 공간이다.

향교는 오늘날의 학교와는 조금 달랐다. 지방에서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인 동시에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향 공간이었다. 경전과 역사, 시문을 배우는 한편 예절과 사람의 도리를 익히는 곳이기도 했다. 광양향교 역시 유림들의 강론과 집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그래서 교촌이라는 이름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닌 마을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향교가 있었기 때문에 교촌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향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의 역사도 함께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광양향교의 외삼문인 풍화루(風化樓). 교촌마을의 오랜 교육과 유교문화의 역사를 간직한 상징적인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풍화루를 지나 선비의 공간으로

교촌마을에서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은 광양향교의 풍화루(風化樓)다.

광양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대성전·명륜당·풍화루·동재·서재 등을 비롯한 건물이 남아 있으며, 일반적인 향교가 명륜당과 대성전을 앞뒤로 배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보이는 것과 달리 광양향교는 대성전을 명륜당 왼쪽에 배치한 점이 특징이다. 경사진 지형을 활용한 공간 구성이 눈길을 끄는 이유다.

풍화루라는 이름에는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향교가 단순히 책을 읽는 장소만이 아니라 사람의 품성과 공동체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던 공간임을 생각하게 한다.

풍화루를 지나면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이어진다. 이곳에서 유생들은 학문을 닦고 생활했다. 지금은 조용한 마당이지만, 오래전에는 이곳에서 경전을 읽고 스승의 가르침을 듣던 젊은이들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五聖)과 4현(四賢),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봄과 가을에는 성현을 기리는 제례가 이어진다. 광양향교가 단순히 과거의 건축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제향과 유림 활동이 이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풍화루와 명륜당, 대성전 등이 어우러진 광양향교 전경. 교촌마을의 역사와 유교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불타고 무너져도 다시 세운 향교

광양향교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단어가 반복된다. 바로 ‘중건’이다.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소실된 뒤 1613년 지역 유림과 현감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중건했고, 이후 여러 건물이 차례로 복원됐다. 근현대에도 세월과 전쟁의 상흔으로 퇴락한 건물을 다시 손보는 일이 이어졌다. 1966년에는 풍화루를 석주로 바꾸어 중건했고, 1971년에는 명륜당을 중건하고 동재와 서재를 보수하는 등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건물의 나이만이 아니다. 여러 차례 건물이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에서 향교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향교를 다시 세운 것은 단순히 목조건물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역의 교육과 제례, 유림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교촌의 역사는 향교의 건축사인 동시에 그것을 지켜온 사람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교촌마을 주민들의 소통과 공동체 활동이 이루어지는 마을회관 전경. 오래된 마을의 일상과 주민들의 공동체 문화를 이어가는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선비만 살았던 마을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촌마을을 선비와 유림의 역사로만 기억한다면 마을의 절반만 보게 된다.

향교 주변에는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농번기에는 서로 일손을 보태고,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함께 힘을 모았다.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고 어른들이 마을의 소식을 나누던 일상 역시 교촌의 역사다.

특히 교촌에는 덕석기(용장기)와 오채소리(상여소리) 등 마을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흔적도 전해진다. 광양시가 소개한 교촌마을 자료에서도 이러한 민속문화와 함께 마을의 역사자원들이 소개되고 있다.

향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면 마을에서는 꽹과리와 장구, 북과 징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하나는 선비의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 공동체의 생활문화다. 그러나 두 소리 모두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문화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교촌마을에서는 향교의 담장만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골목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옛우물과 역대 이장 현판을 함께 담은 사진. 옛우물과 역대 이장 현판이 함께 자리한 교촌마을의 역사 공간. 주민들의 생활 흔적과 마을 공동체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골목길에 남은 생활의 기억

향교를 나와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래된 담장과 집, 굽이진 골목길이 이어지고, 새롭게 정비된 공간 사이로 옛 마을의 흔적도 만난다. 광양시 마을 자료에는 광양향교를 비롯해 향교은행나무, 하마비,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봉양사 사적비 등이 교촌마을의 주요 역사자원으로 소개돼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마을의 과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다. 하지만 마을의 역사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기억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아이들이 뛰놀았으며,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서로 도왔다”는 어르신들의 짧은 기억 속에는 공식 기록으로 남기 어려운 교촌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공동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오래된 마을을 기록할 때는 문화재의 이름과 연대만 적어서는 충분하지 않다. 누가 그곳에서 살았고, 무엇을 먹고 일했으며, 어떤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는지까지 기록해야 한다. 마을의 역사란 결국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교촌마을 담장에 그려진 용장기와 농악놀이 벽화. 마을의 안녕과 주민 화합을 기원했던 전통 농악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문성식

보존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마을로

교촌마을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공간도 아니다.

광양시는 2024년 주요 성과로 광양읍 교촌마을 도시재생 예비사업 준공을 꼽았다. 오래된 마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지역의 역사적 자원을 현재의 삶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교촌마을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과 함께 마을의 생활사를 기록하고 활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향교를 찾은 사람이 건물만 둘러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골목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교촌의 이야기는 훨씬 풍성해질 것이다.

향교의 역사와 주민의 기억, 덕석기와 오채소리 같은 생활문화가 서로 연결될 때 교촌은 단순한 옛 마을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마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교촌마을 돌담길과 변화 그림. 옛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교촌마을의 골목길. 담장 한편에는 변화하는 마을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 더해져,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교촌마을의 시간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길 위에서 만난 교촌, 사람의 기억이 역사가 되다

해 질 무렵 교촌마을을 다시 빠져나온다.

풍화루 지붕 위로 저녁빛이 내려앉고, 오래된 골목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주민들의 기척이 남는다.

교촌은 선비들이 글을 읽던 마을이었다. 유림들이 성현을 기리던 마을이기도 했다. 동시에 농부들이 땅을 일구고 이웃들이 서로의 일을 도우며 살아온 생활의 마을이었다.

향교의 문향과 마을의 신명이 함께 흐르는 곳. 그것이 이번 길에서 만난 교촌마을의 모습이다.

역사는 박물관이나 문화재 안내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래된 담장에도, 향교의 돌계단에도, 마을 어르신의 기억에도 역사는 남아 있다.

한 사람의 기억이 한 집의 이야기가 되고, 한 집의 이야기가 한 골목의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 골목의 역사가 다시 광양의 역사가 된다.

그래서 마을을 걷는 일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광양의 역사를 다시 읽는 일이다.

다음 회차 예고

「길 위의 광양사」 제5부 ‘광양의 마을’ 다음 길은 섬진강 물길을 따라 ‘다압면 섬진마을’로 향합니다. 강과 들, 매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섬진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을에 켜켜이 쌓인 생활의 기억을 찾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