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황현은 장수 황(黃)씨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다. 출생일은 1855년 12월 11일이다. 출생지는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현재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758번지)이다. 사망일은 1910년 9월10일(향년 54세), 사망지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자택이다.
황현은 1855년(철종6년)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黃時默)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시대 명문가 중에 하나인 장수 황씨 가문이다. 직계 조상 중에 유명한 인물로 세종대의 명재상인 15대조 ‘황희’와 임진왜란의 명장인 10대조 ‘황진’ 등이 있다.
황현은 11세부터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 1816~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다.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경세학: 국가사회의 현실적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학문적 이론이나 지식 체계을 말한다)
황현은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형제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았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이를 크게 고평가 했다는 후문이다.
전라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주한 황현은 그 곳에서 16년을 살면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등을 저술하였다. “매천야록”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구한 말 시기의 참고 자료로 많이 등장하여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았고, 또한 구한 말 재야 문인으로 존경도 받았다 한다.
아래 글은 ‘나무위키’의 “자결에 앞서 남긴 유서” 중 일부이다. ‘매천’은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니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가 한 명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 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吾無可死之義 但國家養士五百年 國亡之日 無一人死難者 寧不痛哉? 吾上不負皇天 秉彝之懿, 下不負平日所讀之書. 冥然長寢, 良覺痛快. 汝曹勿過悲.)
황현은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맥수지탄의 심정을 담은 절명시(詩絶命) 4수를 남기고 소주에 아편을 섞어 마셔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향년 56세이다. 묘지는 고향인 전라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한다.
광복 이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황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5년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지정명칭 : 황현 초상 및 사진(黃玹 肖像 및 寫眞). 지정기관 : 문화재청. 종목 : 보물(2006년 12월29일 지정).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이자 학자인 황현(1855-1910)의 초상화와 사진이다.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 전후 최고의 초상화가로 한말 ‘어진’ 등을 그렸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그린 한말(韓末)의 대표적인 문인(文人)이자 우국지사인 매천(梅泉)황현(黃玹, 1855-1910)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황현이 자결한 다음해인 1911년 5월에 일찍이 황현이 1909년 천연당 사진관(天然堂 寫眞館)에서 찍어 두었던 사진(寫眞)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란다.
매천 황현의 시, 책, 유품(편집)은 아래와 같다. 황현이 직접 저술했던『매천야록』을 비롯한 책들과 ‘절명시’, 그리고 벼루, 안경등 그의 유품들은 사후 동생과 후손들이 관리하다가 2019년 모두 대한민국의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음은 해당 문화재 명칭과 번호들이다
1) 『매천야록』: 국가등록문화재 제 746호. 7 책. 조선말기 매천이 저술한 한말비사(韓末秘史). 1864년(고종 1)에서 1910년 국권피탈에 이르기까지의 47년 동안의 역사를 편년체로 저술하였다. 고종31년 이전의 30년의 역사는 간략하나 그 이후의 15년간은 매우 상세하다 한다. 2) 『오하기문』: 국가등록문화재 제 747호. 7 책.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문인 황현이 당쟁 및 세도정치, 동학 농민전쟁 등에 관하여 서술한 역사서. 3) 절명시첩』: 국가등록문화재 제 748호. 1 책. 4) 시집·문집: 국가등록문화재 제 749-1호. 시집 4 책, 문집 3 책. 5) 유묵·자료첩: 국가등록문화재 제 749-2호. 11 책. 6) 교지·시권·백패통: 국가등록문화재 제 749-3호. 교지(1888년 생원시 급제교지) 1점. 시권 2점. 백 패통 1점 7) 문방구류: 국가등록문화재 제 761-1호. 19점. 8) 생활유품: 국가등록문화재 제 761-2호. 35점.
매천헌 “방1”에 전시된 매천의 초상화(보물로 지정)는 복제품이다(중앙에 위치한 초상화). 초상화 사진과 사진틀이 낡고, 사진 선명도도 흐릿하다. 매천헌을 찾는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안고 돌아간다고들 한다(매천생가 해설사 전언)
광양시는 광양인의 자랑인 매천 생가를 한 번쯤 방문하여 “보완책 여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광양시니어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