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세월 동안 태인도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 온 장내마을 은행나무 보호수와 정자 ‘장내정’. 흐릿한 세월 속에서도 푸른 그늘을 드리운 당산목이 마을 사람들의 포근한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물길 건너 삼봉산 자락 아래 아늑하게 품겨 있는 태인도 전경. 과거 바다와 갯벌을 터전 삼았던 장내·도촌·용지·궁기·명당 등 5개 마을은 오늘날 제철 연관 공단과 어우러지며 과거의 역사와 현대 산업이 공존하는 터전을 이루고 있다. 사진=문성식

태인도, 옛 설화와 산업이 숨 쉬는 섬 – 5개 마을 이야기

크고 어진 기운을 품은 땅, 태인(太仁)의 지명과 변천사

섬진강 오백 리 물길이 남해의 거친 파도와 만나는 곳, 태인도(太仁島). 오늘날 거대한 철강 파이프라인과 공단 지대가 옛 풍경을 대신하고 있지만, ‘태인’이라는 고을 이름 속에는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일구어온 사람들의 깊은 인문학적 철학과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

‘태인(太仁)’의 ‘태(太)’는 태안(太安)처럼 ‘크고 태평하다’는 뜻을 품고 있으며, ‘인(仁)’은 어질고 자애로운 유교적 덕목의 으뜸을 뜻한다. 즉, ‘지극히 크고 어진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는 의미다. 민간 설화에서는 이 섬이 본래 ‘큰 뜻을 품은 영웅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대인도(大人島)’라 불렸으나, 역모의 기운을 경계한 조정에서 지명을 고쳐 부르게 했다는 흥미로운 가설도 전해 내려온다.

태인도는 지리적·행정적으로도 파란만장한 변천을 겪었다. 조선시대 한때 옥곡면에 속했던 이곳은 1896년 돌산군(突山郡)이 신설될 당시 돌산군 관할로 편입되기도 했다. 이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돌산군이 폐지되면서 광양군 골약면 태인리(太仁里)로 되돌아오는 등 굴곡진 세월을 거쳐 오늘날 광양시 태인동으로 이어졌다.

태인도의 관문이자 옛 해상 교통의 중심지였던 도촌 군두리 마을 나루터 전경. 과거 육지와 섬을 잇는 나룻배가 오가며 물류와 사람이 모여들던 선창가에는 지금도 잔잔한 물결 위로 포구의 운치가 흐르고 있다. 사진=문성식
태인동 군두리 마을 입구의 표지판 전경. ‘군두리(軍頭里)’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선봉부대가 주둔했던 역사의 현장임을 보여주며, 세계 최초 김 양식의 터전이었던 태인도의 깊은 역사와 얼을 입구에서부터 묵묵히 전하고 있다. 사진=문성식

섬의 허리이자 역사·생활의 중심, 장내(墻內·담안)마을 깊이 읽기

태인도의 다섯 동네(도촌, 장내, 용지, 궁기, 명당) 중 섬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며 행정과 생활의 중심축 역할을 해온 곳이 바로 장내(墻內)마을이다. 과거 선창가였던 도촌마을이 해상 교통의 물류를 담당했다면, 장내는 섬의 가장 넓은 터전이자 인구가 가장 많았던 으뜸 마을이었다. 지금도 태인동 행정복지센터, 태금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주요 공공기관과 주민들의 삶터가 이곳에 밀집해 있다.

■ ‘담 안쪽’ 지명의 유래와 전우치 설화

‘장내(墻內)’라는 한자 지명은 이 마을에 흐르는 흥미로운 역사와 깊게 맞물려 있다. 조선 중기 기인이자 의적이었던 전우치(田禹治)가 민초들을 구하기 위해 태인도 삼봉산 아래에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는데, 그 성곽의 ‘담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주민들은 오랫동안 ‘담안’이라 불렀다. 이 순우리말 ‘담안’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장내(墻內)다.

■ 큰돌새미(진정·眞井)와 진정골의 풍요

마을이 안정적인 터전을 형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물길이었다. 1630년경 달성 서씨(達成 徐氏)가 처음 입주하고, 1680년경 의안대군 양소공파 전주 이씨(全州 李氏) 이상준이 서씨 가문의 사위로 정착하며 기틀을 다졌는데, 이들이 마을 형성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서씨들이 처음 팠다고 전해지는 ‘큰돌새미(진정·眞井)’라는 우물이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던 이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진정골’이라 불렀고, 그 물을 모아 저수지를 만들어 ‘진정들’이라는 넓은 논밭을 풍요롭게 적셨다.

태인도의 중심이자 행정·생활의 축을 담당하는 장내마을 일대 전경.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태인동 행정복지센터와 선미아파트 너머로 제철 연관 국가산업단지의 공장과 굴뚝 연기가 어우러지며, 주민들의 삶터와 현대 산업 현장이 한데 숨 쉬는 태인동의 오늘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전우치 설화 속 ‘성곽 담 안쪽’에서 유래한 도로명 ‘담안3길’ 표지판이 정겨운 장내마을 골목 언덕배기 길. 나지막한 단독주택 담장을 따라 이어지는 언덕길 너머로 마을의 수호목인 수령 380년의 은행나무 고목이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문성식

■ 380년 당산목 은행나무와 섣달그믐의 당산제

장내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 약 380년에 달하는 웅장한 은행나무 고목이 마을의 수호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당산목으로 삼아 매년 섣달그믐날 밤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만선, 풍요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렸다.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도 단단하게 뿌리 내린 은행나무는 태인도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묵묵히 지켜봐 온 산증인이다.

■ 세계 최초 김 양식의 본향, 광양김시식지

장내마을의 문화적 가치 중 으뜸은 단연 세계 최초 바다 김 양식의 역사(광양김시식지, 전라남도 기념물 제113호)다. 조선 인조 18년(1640년), 병자호란의 모욕을 안고 태인도 장내마을로 들어온 선비 김여익(金汝益, 1606~1660) 선생은 바닷가 나무막대에 해의(海衣)가 붙어 자라는 것을 관찰하고, 밤나무 가지를 바갯벌에 꽂는 ‘섶식 양식법’을 세계 최초로 고안했다. 훗날 임금이 그의 성을 따서 ‘김’이라 부르라 명하면서 오늘날 K-푸드의 대명사인 ‘김’이 탄생했다. 장내마을 마당마다 검은 비단 같은 김을 말리던 바다의 풍요는 한국 수산 인문학의 위대한 첫 페이지였다.

태인동 용지마을에 위치한 ‘광양 용지큰줄다리기 전시관’ 건물 전경. 약 300년 동안 마을 어민들이 액운을 막고 단합을 도모하며 이어온 공동체 무형 유산인 용지큰줄다리기의 역사와 기록을 보존하고 알리는 뜻깊은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삼봉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한 ‘광양김시식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13호)’ 전경. 조선 인조 18년(1640년) 김여익 선생이 세계 최초로 바다 김 양식법을 고안해낸 역사적 현장으로, 한옥 양식의 유적지와 전시관이 삼봉산의 아늑한 산세와 어우러져 있다. 사진=문성식

도촌·용지·궁기·명당마을이 완성하는 태인도의 서사

장내마을이 태인도의 허리라면, 이웃한 네 마을은 저마다의 독특한 스토리로 태인도의 인문적 지형을 풍성하게 채운다.

도촌(島村)마을: 섬의 입구이자 관문으로 과거 육지와 섬을 이어주던 나룻배가 오가던 유서 깊은 도선장(渡船場)이었다. 군두리는 임진왜란 당시 군사들이 주둔했던 역사적 유래를 간직한 자연마을이다. 전우치가 꽂아둔 말채찍이 뿌리를 내려 자랐다는 고목 전설과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던 신골샘(목란천)이 오랜 교류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용지마을: 장내의 동쪽에 연접한 용지마을은 약 300년의 역사를 지닌 ‘용지마을 큰줄다리기’가 전승되어 온 곳이다. 바다와 싸우며 살아온 어민들이 남녀노소 하나 되어 암줄과 수줄을 당기며 액운을 막고 단합을 도모하던 강렬한 공동체 무형 유산이다.

궁기(宮基)마을: 전우치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요충지 삼봉산 아래에 궁궐을 짓고 말을 조련했다는 ‘궁터’ 설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남해안 조운선을 도술로 인양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민초들의 이상향이 깃들어 있다.

명당(明堂)마을: 원래 배알도와 궁기마을 사이의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과 제방 공사를 통해 들판으로 태어난 땅이다. 전우치가 명나라 황금 대들보를 감추어 두었다는 전설 속 ‘명당들’에서 유래했으며, 갯벌이 기름진 들녘으로, 다시 현대 국가산업단지로 변모한 태인동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보여준다.

전우치 설화가 서린 삼봉산 자락 아래 정겹게 자리 잡은 궁기마을 입구 전경. 의적 전우치가 삼봉산 아래 궁궐을 짓고 말을 조련해 백성들을 구했다는 ‘궁터(宮基)’ 전설 속 마을 풍경 위로 푸른 삼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사진=문성식
궁기마을 주민들의 안식처이자 따뜻한 소통의 중심인 ‘궁기마을회관’ 전경.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함께 논의하고 어르신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이곳은, 공동체의 정과 이웃 간의 온기가 매일 이어지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사진=문성식

갯벌에서 쇠로, 산업 공단지대 속에서 피어나는 미래상

1980년대 포스코 광양제철소 건설의 거대한 물결은 장내마을을 비롯한 태인동 전체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87년 장내마을 앞 논과 갯벌을 매립하면서 선미아파트가 들어섰고, 마을 앞 바다를 메워 만든 부지에는 거대한 제철 연관 단지와 명당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었다.

김을 말리고 바지락을 까던 어민들의 손길은 이제 제철소와 협력업체 현장에서 쇳물을 다듬고 산업 장비를 운용하는 근로자들의 땀방울로 이어졌다. 새벽이면 공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을 길을 메우고, 밤이면 웅장한 공장의 불빛이 옛 바다의 물결 대신 태인도의 밤하늘을 밝힌다.

수백 년간 터전이었던 바다가 사라진 아쉬움 속에서도, 주민들은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으로 대한민국 현대 산업도시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400년 전 바다에 섶을 꽂아 은빛 신화를 일궈낸 김여익 선생의 선구적 정신, 전우치가 꿈꾸던 궁터와 명당의 전설, 그리고 오늘날 공단 지대에서 불태우는 근로자들의 뜨거운 노동 열기는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지명 표기를 넘어, 주민들은 해가 갈수록 장내마을이 ‘밝은 장래(將來)가 촉망되는 마을’로 성장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의 인문학적 유산과 현대 첨단 산업의 활력이 공존하는 태인동은, 오늘을 넘어 더욱 풍요롭고 빛나는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다음 회차 예고]

바다와 산업의 숨결이 약동하던 태인도를 떠나, 다음 여정은 광양 향토 문화권의 중심이자 신비로운 설화를 품은 광양읍 사곡리 본정마을(사라실)로 향합니다. 옥녀봉 아래에서 옥녀가 비단을 짜던 베틀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듯한 사곡리의 옛 이야기와, 그 땅이 간직한 고유한 문화적 숨결을 찾아 발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