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산두 선생이 10년의 고행 끝에 도학(道學)의 깊이를 완성했던 옥룡면 학사대(學士臺).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선생의 굳건한 학문적 성취와 매운 절개를 상징하듯 위풍당당하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서론, 백운산과 북두칠성의 기운을 품고 태어나다

지난 회차에서 광양 교육의 근간인 ‘광양향교’를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그곳에서 길러낸 정신이 어떻게 한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가 되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광양이 낳은 불멸의 지성,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선생입니다.

선생의 이름 ‘산두(山斗)’에는 흥미로운 탄생 설화가 전해집니다. 어머니가 백운산으로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려앉는 태몽을 꾸고 얻은 이름이라 합니다. ‘신재(新齋)’라는 호 또한 “날마다 목욕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니, 이름과 호만으로도 그가 지향했던 선비의 고결한 기상을 짐작게 합니다.

  1. 땀방울 끝에 마주한 화전봉의 안식처

기자는 선생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출생지인 봉강면 저곡마을을 거쳐 묘소가 있는 화전봉으로 향했습니다. 도로 표지판에는 300미터라고 적혀 있었지만, 구두를 신고 오른 가파른 산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등줄기가 땀으로 젖어 들 무렵, 기묘하게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묘소를 지키듯 서 있는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몇 번의 착오 끝에 마침내 도착한 선생의 묘소. 망부석 뒤로 석인석과 묘비가 위엄 있게 서 있었습니다. 묘소 옆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피어 고단한 기자를 위로하고, 능선 오른쪽으로는 울창한 매실밭에서 날아온 매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땀 흘려 올라온 보람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광양이 낳은 불멸의 지성, 신재 최산두 선생의 영정. 단정한 학창의(鶴氅衣) 차림에 온화하면서도 형형한 눈빛이 호남 사림의 거두이자 곧은 절개를 지킨 위인의 기개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광양시
중종이 신재 최산두 선생에게 하사한 옥홀(玉笏). ‘일인유경보명유신(一人有慶寶命維新)’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 선생을 향한 임금의 두터운 신임과 기대를 고스란히 증명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사진=광양시
  1. 10년의 인고, 학사대(學士臺)에서 완성한 학문

최산두 선생의 학문적 깊이는 광양 옥룡면 동곡리의 바위굴, 학사대(學士臺)에서 완성되었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통감강목』 80권을 들고 산으로 들어간 그는 10년 공부를 작정합니다.

8년 만에 잠시 세상 밖으로 나와 백운산의 기세에 감탄하며 시 한 구절을 읊었으나 뒷구절을 잇지 못해 고민할 때, 지나가던 초동이 한 수 거들며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충고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에 자극받은 선생은 남은 2년을 마저 채워 마침내 학문을 완성했습니다. 이후 그는 조광조 등과 교류하며 ‘호남 삼걸’이라 칭송받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되었습니다.

  1. 기묘사화의 칼바람, 유배지에서 피워낸 유학의 꽃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선생이었지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칼바람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서른일곱의 한창 일할 나이에 화순 동복(同福)으로 쫓겨난 그는 무려 15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나복산인’이라 부르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고, 이때 그의 문하에서 자란 이들이 바로 호남 유학의 거목인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입니다. 또한, 오늘날 화순의 명소인 ‘적벽(赤壁)’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이도 바로 유배 중이던 선생이었으니, 그의 예술적 감수성은 유배지의 거친 땅마저도 문화의 꽃밭으로 일궈냈습니다.

정자 아래로 입을 벌린 듯 자리한 학사대 바위굴. 15세의 신재 최산두 선생이 “학문을 이루기 전에는 나가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가두고 10년 면벽 수행에 정진했던 고행의 현장이다. 바위를 뚫고 솟은 소나무의 생명력이 선생의 굳건한 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사진=문성식
봉강면 부저리 화전봉 능선에 자리한 신재 최산두 선생의 묘소. 양옆으로 세워진 문인석이 수백 년째 선생의 안식을 지키고 있다. 가파른 산길 끝에서 마주한 묘역의 정갈함은 생전 청렴하고 올곧았던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 있다. 사진=문성식
화전봉 신재 최산두 선생의 묘역에서 내려다본 저곡마을의 전경.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매화꽃 사이로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 포근하게 감싸여 있다. 땀 흘려 올라온 이에게만 허락된 이 풍경은 마치 선생의 고결한 생애가 고향 땅을 여전히 보듬고 있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사진=문성식
  1. 시니어 기자의 시선, 꺾이지 않는 ‘매운 선비 정신’

취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저곡마을 노인당을 들렀습니다. 유모차에 의지해 모여 계신 어르신들은 연로하여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지켜온 이 땅 자체가 선생이 남긴 유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쉽게 타협하고, 너무 빨리 잊으며 삽니다. 하지만 15년의 유배 세월을 견디며 제자들을 길러낸 선생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지조는 안녕한가?”라고 말입니다. 현실의 권력 다툼에서는 패배했을지 몰라도, 역사 속에서는 그 정신이 승리하여 오늘날까지 우리 광양의 자부심으로 남았습니다. 봉양사의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전해지는 선생의 기개는, 나약해진 우리에게 매서운 죽비 소리처럼 들려옵니다.

마치며, 화전봉 아래 잠든 광양의 큰 별

1533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의 부고를 듣고 전국에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말을 맸다는 들판은 지금도 ‘말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그날의 슬픔을 전합니다. 비록 선생은 가고 없지만, 그가 품었던 북두칠성의 기운은 여전히 광양의 산하를 밝히고 있습니다.

고목의 너른 그늘 아래 자리 잡은 봉강 저곡마을 경로당. 주인 잃은 유모차와 전동 휠체어가 정겹게 늘어선 모습에서, 마을의 역사를 지켜온 어르신들의 소박한 일상과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사진=문성식

다음 제13회 예고, 선비의 배움은 죽어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최산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신재서원과 봉양사’를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이어져 온 선비들의 수양 문화를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 신재 최산두 묘소- 봉강면 부저리 632. 지곡마을과 부현마을 사이의 화전봉 능선 중턱에 있다.
※ 학사대- 옥룡면 동곡리 계곡. 학사대길 25-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