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향교의 정문이자 유생들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 풍화루(風化樓). 현판의 '바람을 타고 교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처럼, 정갈한 단청과 위풍당당한 기와지붕이 인상적이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서론, 빛의 고을에 스며든 삶의 질서

지난 [제1부] ‘유물이 말을 걸다’를 통해 광양(光陽)이라는 이름에 담긴 ‘빛’의 역사를 확인했다면, 이제 [제2부] ‘길 위의 사람들’에서는 그 빛이 우리네 삶의 질서와 윤리로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 첫머리를 장식할 곳은 광양읍 우산리 기슭, 수백 년간 광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광양향교(光陽鄕校)입니다.

향교는 조선 시대 지방의 국립 교육기관이자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1397년(태조 7년) 창건된 이래, 광양향교는 단순히 글자만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사람 구실 하는 법’을 가르치며 광양의 선비 정신을 길러낸 소중한 산실이었습니다.

  1. 역사의 풍파를 견디고 우뚝 선 광양의 자부심

광양향교의 역사는 곧 우리 광양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았습니다. 태조 때 세워진 이후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지는 아픔을 겪었으나, 1613년 광양현감과 지역 유림들이 힘을 모아 대성전을 다시 세우며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이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1966년 풍화루 중건을 시작으로 지금의 당당한 면모를 다시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보물급 가치를 지닌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해 풍화루, 동재, 서재 등 유교 건축의 핵심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은 보관된 책만 해도 165종 463권에 달해, 전남 지역 향교 중에서도 유독 깊은 학문의 향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1.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 광양향교만의 건축미

보통 향교는 공부하는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일직선으로 배치합니다. 하지만 광양향교는 조금 다릅니다. 산자락 지형을 그대로 살려 대성전을 명륜당 왼쪽에 배치하는 유연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격식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했던 광양 선비들의 넉넉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풍화루(風化樓): 향교의 정문입니다. ‘바람을 타고 가르침이 스며든다’는 멋진 뜻을 가졌습니다. 기자도 2층 풍화루에 올라보니 시야가 확 트입니다. 저 멀리 읍내를 바라보며 옛 선비들이 누각에 앉아 시 한 수 읊던 여유가 느껴집니다.

명륜당(明倫당): “인간의 도리를 밝힌다”는 뜻의 공부방입니다. 마당 바닥에는 ‘우입좌출(右入左出)’ 표시가 있는데, 들어갈 땐 오른쪽, 나올 땐 왼쪽 문을 이용하라는 예절이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대성전(大成殿):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가장 신성한 곳입니다. 뒷산에 올라 지붕을 바라보니 고르게 줄지어 입힌 기와장들이 옛 정취를 한층 위풍당당하게 만들어줍니다.

  1. 500년 은행나무가 지켜본 선비의 기개

명륜당 마당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벌레를 타지 않고 그 푸름이 변하지 않아, 유생들이 본받아야 할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향교 건축물 너머, 명륜당(明倫堂) 옆에서 웅장하게 서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아직 겨울의 고즈넉함을 품고 있지만, 수백 년간 유생들의 한결같은 기개를 지켜봐 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사진=문성식
향교 입구 홍살문 곁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나 말에서 내리라’는 글귀는, 배움의 전당에 들어서기 전 지식보다 ‘예(禮)’와 ‘겸손’이 먼저임을 묵묵히 일깨워준다. 사진=문성식

향교 입구 홍살문 곁에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도 눈길을 끕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지위가 높든 낮든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이 비석 앞에서, 지식보다 예의를 앞세웠던 옛 어른들의 엄격한 태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1. 지역민의 목소리, “향교는 우리 동네 보물이제”

점심때가 다 되어 기자가 방문하자 흥학재(유림대학) 신축 건물에서 7~8명의 시니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분을 붙들고 물으니 한문 공부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 합니다.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만나고 나누는 재미가 있어 20여 년을 다니고 있다며, 기자에게도 같이 공부하자고 권하십니다. 향교 인근 교촌마을 어르신도 자부심을 보탭니다.

“아이고, 말도 마쇼. 요 앞이 바로 ‘교촌’ 아니요. 옛날부터 우리 광양 양반들이 여그서 다 글 읽고 사람 됐제. 저 은행나무 좀 보쇼, 저놈이 우리 동네 역사를 다 알고 있당깨. 요새 사람들은 향교가 뭐 하는 데여 하겄지만, 명절이나 제사 때 어르신들이 도포 입고 지나가믄 아직도 동네가 확 산당깨요.“

  1. 시니어 기자의 시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교육의 산실

현장을 취재하며 교촌마을을 둘러보니 흥미로운 점이 보입니다. 옛날에 향교가 마을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면, 오늘날은 그 향교와 인접한 자리에 광양교육지원청과 광양중앙도서관이 나란히 들어서 있습니다. 수백 년 전 유생들이 글을 읽던 그 터가 오늘날에도 광양 교육의 핵심 장소로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우리 곁에는 번듯한 학교와 도서관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여전히 이 낡은 향교를 찾는 것일까요? 향교는 단순히 시험 점수를 올리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태도’를 가르쳤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명륜당 마루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아봅니다. 지식을 머리에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려 했던 옛 유생들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현대 사회는 ‘빨리빨리’와 ‘효율’만을 따지며 소중한 예절과 관계의 가치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향교의 엄격한 문턱과 정돈된 마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배움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향기를 남기고 있습니까?”

배움이 삶의 태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광양향교는 우리에게 지식 이전에 ‘예(禮)’가 먼저임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풍화루 2층 누각 내부에 올라 바라본 풍경. 머리 위 서까래를 화려하게 수놓은 학과 구름, 그리고 푸른 용 단청의 수려함이 눈길을 끈다. 격식에서 벗어나 시 한 수 읊으며 자연을 즐기던 옛 선비들의 여유와 흥취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풍화루 2층 누각에서 내려다본 고즈넉한 광양 읍내 전경. 정갈한 단청 너머로 넓게 펼쳐진 주차장과 홍살문, 그리고 그 뒤로 든든하게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들이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광양 교육의 역사가 응축된 교촌마을 전경. 전통의 맥을 잇는 광양향교와 유림회관을 중심으로, 현대 교육의 산실인 광양교육지원청과 지혜의 창고인 중앙도서관이 인접해 있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광양 교육의 중심지’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마치며, 선비의 길을 묻다

광양향교의 낡은 기와와 기둥은 600년 세월을 견디며 우리에게 인내와 지혜를 가르칩니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의 중심을 되찾아주는 길 위의 나침반입니다. 따뜻한 봄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 살아있는 역사 교실을 한번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음 제12회 예고:

향교가 공적 교육의 뿌리였다면, 이제 그 정신을 삶으로 실천한 인물을 만나러 갑니다. 호남 사림의 거두이자 기묘사화의 격랑 속에서도 지조를 지켰던 ‘신재 최산두’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봉강으로 떠나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위치: 전남 광양시 광양읍 향교길 67
특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지형에 맞춰 대성전과 명륜당을 배치한 독특한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