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면 어치계곡 어치마을 표지석. 사진=이경희
옥곡지서(구)에서 동부지역 답사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이경희

광양시가 주관하고 여순사건 광양유족회 중심으로 진행하는 채록(採錄)사업은 70여 년 전 발생한 여순사건의 피해와 아픔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중요한 프로젝트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했으며, 좌익계열의 동조자들과 함께 진압군에 말려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순사건 광양연구회 채록 실무팀은 15일 오전 9시부터 동부지역을 답사했다. 이날 답사에는 옥곡지서(현 옥곡초등학교)에서 담당자 12명이 참여했으며, 사실 조사원 이충석 해설사로부터 사전 설명을 들었다.

이후 동부권 피해 지역을 돌며 그동안의 증언과 참고인 조사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다. 이 답사는 여순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아픔을 기록하기 위한 과정이다.

여순사건 채록사업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신고와 함께 아픔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중요한 사업이다. 이러한 기록은 다시는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증언을 통해 여순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옥곡초등학교에 세워진 유적지 표지판 옆에서 지리적 설명을 부연하는 문병빈 씨. 사진=이경희

옥곡(玉谷)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 이후 등장했으며, 이 지역이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고 보배로운 곳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지역도 역사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

1947년 5월 1일, 메이데이 시위로 인해 신금리 주민 3명이 경찰에 희생됐다. 또, 서모, 문모, 강모 씨 등도 함께 연행돼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사살됐다. 이 사건은 옥곡 지역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후, 옥곡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수평리 주민 배모(당시 47세) 씨는 빨치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대죽리 주민 이모 씨는 음식을 제공하고 사위가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옥곡 지서로 끌려가 사망했다. 주된 격전지는 묵백리와 신금리 주변이었으며, 당시 옥곡 지서는 1951년 10월 20일 빨치산의 습격으로 소실됐다.

1948년 10월, 순천 도립병원 의사였던 정옥기는 여순사건 발생 후 숨어있다가 진압군을 오인해 “동무들 반갑소” 인사를 했다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이듬해 봄에는 반차용이 나물을 캐다가 봉기군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또 1949년 가을, 이강현 등은 장작을 만들고 있다가, 이만수는 알곡 조사에 참여했다가 솔티재로 끌려가 사살됐다.

묵백리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빨치산에 가담 협조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특성이 있었다. 이로 인해 피해자가 2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는 옥곡면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에 달하는 수치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옥곡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49년 8월부터 10월까지는 군경의 토벌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특히, 어치리의 입산자 중 한 사람인 황모 씨가 자수하자, 그는 군경을 앞세워 마을을 돌며 빨치산 협조자들을 색출해 처형하는 역할을 했다.

1949년 9월 29일, 진상면 느재 마을의 주민들이 모였고, 황모 씨가 지목한 입산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9명이 사살됏다. 그중에는 7살의 여아인 심옥자도 포함돼 있었다. 이 사건은 당시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진상 북초등학교 교사였던 정기영이 빨치산에게 등사를 해줬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중, 빨치산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그는 유치장에 있던 10여 명과 함께 봉강 북초등학교 앞산에서 총살당했다.

진상면 장승뱅이 추정지. 사진=이경희

1949년 9월 진상면 섬거리 김쌍오의 형수와 조카 등은 빨치산이 식량을 빼앗아 가려 하자 저항을 하면서 “경찰이 온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6명이 희생당한 사건도 있었다. 그 외에도 6월경에는 문모 씨가 이천마을에서 빨치산에게 희생당했고, 빨치산의 추적을 피해 도망가다 대나무에 찔려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또 금이리 이천마을 주민 4명이 좌익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집단 학살됐고, 그 외에도 여러 사건으로 장승뱅이에서 사살된 시신들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매티재 표지판. 사진=이경희

진월면은 여순사건 이전부터 하동군과 가까웠기 때문에 남로당 간부가 신구리 금암골에서 마을 청년들에게 사상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는 신구리나 오사리가 섬진강만 건너면 하동군 고전면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다.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1950년 6.25 전쟁 후 하동군 보도연맹원 300여 명이 희생됐고, 그중 50~60여 명은 매티재에서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진월면 사평마을 주민 김준영 등은 빨치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진월 지서로 끌려가 마을 뒷산에서 사살됐다.

무더운 날씨와 가슴 아픈 현장의 내용들은 현장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전망이 좋은 소학정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며 잠시 피로를 풀었다.

전망이 좋은 소학정. 사진=이경희
소학정. 사진=이경희

오후에는 광양의 동북쪽에 위치한 다압면으로 향했다.

백운산을 등지고 동쪽으로 섬진강을 따라 길게 뻗은 다압면, 북쪽 금천리는 여순사건 후 빨치산들의 주요 배후지역이 됐고, 주민들의 피해가 다수 발생한 곳이다.

한때 다압 지서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소실돼 대나무로 둘러쳐 체포 연행된 사람들을 처형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는데, 1차 토벌때는 현지에서, 2차 토벌 때는 체포 연행해 지서 인근에서 사살했다고 한다.

1949년 6월 금천리 주민 최모 씨는 주민 10여명과 함께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며, 지서 뒤 도로변에서 경찰에게 사살됐다. 화암마을 송모 씨 등 주민들은 지서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됐다고 기록으로도 남아있다고 했다.

다압지서 터. 사진=이경희

다압 북초등학교는 1943년 5월 25일 개교했다.

여순사건 후 군부대가 마을을 소각하고 금천리 주민들을 모아 반군에 협조 여부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주민 2명을 사살하고, “반군에게 협조하면 이렇게 된다”고 경고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답사를 마치며 이충석 해설사는 “옥곡에서 태어나 학교에서 역사 교사를 했던 문병빈 님의 실감 나는 보충 설명에 감사하다”며 “오늘 무더위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감사 드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답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가 됐다.

다압 북국민학교. 사진=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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