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화엄사 연기암에서 '마니차'를 중심에두고 바라본 지리산과 구례뜰. 사진=이경희

호국보훈의 달 여순사건을 기리기 위해 구례 유적지를 찾았다.

여순사건 발생 후 진압군에 밀려 봉기군(14연대 일부 병사 등)이 진압군에 밀려 지리산으로 이동하면서 구례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됐다. 그 현장 유적지를 지난 6월 1일 찾았다. 이날 해설은 ‘순천대학교 10.19연구소’ 연구원이었던 문수현 문학박사가 맡았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일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파병명령을 거부해 발생했다. 병사들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으나 진압군에 밀려 광양과 구례를 지나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 좌익세력과 함께 6년여 동안 빨치산운동을 전개한다. 그 과정에서 구례군 희생자는 2000여명으로 광양시의 2배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700여명이 신고를 마친 상태다.

구례 현충공원에 6.25참전유공자 기념탑과 여순10.19항쟁구례위령탑이 마주보고 있다. 사진=이경희

이번 답사는 구례 현충공원을 시작으로, 25개소를 순회하면서 하루 일정으로 소화하는 데 빠듯한 강행군이었다.

구례 현충공원은 2006년 6월 20일 여순사건유족회와 구례군이 체육공원에 위령탑을 세웠다가 20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현충공원은 동시대의 아픔을 겪었던 구례 희생자 넋을 위로하고 뜻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문수현 해설사는 “아버지는 ‘참전유공자’에 이름을 올렸고, 조부(할아버지)는 ‘여순10.19항쟁 희생자’로 이름을 올려야 할 형편”이라며,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시신을 처리했던 김재천 씨 증언에 따르면, 봉성산 공동묘지는 72명의 희생자가 묻혔다. 1948년 11월 10일 봉기군이 구례읍을 습격하자 문척면, 광의면 등에서 협력했다는 이유 등으로 수십 명을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가두고 수시로 사살해 봉성산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이어 11월 19일에는 중앙초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격전으로 봉기군 50여명, 12연대 군인 3명이 사살됐고, 서민강면 양재이 깽본(지역명)에선 최소 100~120명이 사살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진압군은 간문초등학교에 이송된 주민들을 두 줄로 세워 서로 뺨을 때리게 했는데, 그 가운데 김재천 씨의 아버지와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간문 천변에서도 수십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원촌초등학교에 세워진 유적지 표지판. 사진=이경희

산동면에서는 11월부터 이듬해 1월초까지 주민 수백 명을 원촌초등학교와 누에고치 공판장에 모아놓고 구타와 고문으로 가혹한 취조를 했다. 특히, 증언에 따르면, 고드름이 달리는 추운 겨울에 주민들의 옷을 벗기고 아버지와 아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서로 뺨을 때리게 했다. 또한,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 협조했다’ 등의 이유로 15~20명씩 새끼줄로 묶어 데려가 사상리 꽃쟁이, 외산리 찬세미 마을 뒷산 등에서 총살했다.

구례 영암촌 뒷산에 위치했던 지휘부 자연동굴 위치. 사진=이경희

봉기군은 문수계곡 건너편 영암촌 뒷산 자연동굴을 비트(비밀아지트)로 사용하면서, 지리산 7~8부 능선 문수국민학교에 주둔하던 봉기군과 연락을 취했다. 비트안에는 2~3명이 들어갈 공간이 연결돼 있었고, 별도의 작은 통로를 이용하면 퇴로로 이용할 수 있었다.

비트는 마을주민 황덕순 씨 집을 돌아서 15분쯤 올라가야 닿는다. 당시 이장이었던 황덕순 씨 시아버지는 봉기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마을회관 앞에서 사살됐다고 한다.

구례 산동면 산수유공원. 사진=이경희

구례 산동면 좌사리 상관마을에는 ‘산수유 사랑공원’이 있다. 구례는 유명 사찰 화엄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동면은 한때 전국에서 온천을 즐기려는 관광객이 붐비던 곳이지만, 관광도 유행을 타는지 온천장은 폐허처럼 변해 버렸다. 지금은 ‘구례 산수유축제’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여순사건 당시 산동면 상관마을에 열아홉살 백순례가 살고 있었다. 오빠 2명이 일제강점기와 여순사건으로 끌려가 죽고, 셋째 오빠마저 끌려가게 됐다. 백순례가 오빠 대신 끌려가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산동애가(山洞哀歌)’다.

노랫말 중에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 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라는 대목에서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여순사건 당시 열아홉살이던 백순례가 오빠 대신 끌려가면서 불렀다는 노래 ‘산동애가(山洞哀歌)’ 가사를 적은 비. 사진=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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