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장터의 함성 뒤에 가려진, 어둡고 축축한 갱도의 기억
우리가 지난 제23회에서 깊은 감동으로 마주했던 광양읍 오일장의 서슬 푸른 만세의 함성은 일제의 가혹한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찬란한 영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터널 속에는 광장 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항일의 역사 이면에, 또 다른 형태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자 뼈아픈 수난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숨을 막아오는 유독가스, 그리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오직 생계를 위해 땅속 깊은 곳으로 몸을 던져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아픈 노동사’입니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기 위해 우리 강토를 파헤쳤습니다. 그 탐욕의 이빨이 깊숙이 박힌 곳 중 하나가 바로 광양의 광산들이었습니다. 사곡리의 점동마을과 본정마을의 깊은 산자락은 일제에 의해 금(金)과 철(鐵)을 처참하게 수탈당하며, 수많은 광산 노동자의 피눈물과 땀방울이 깊게 배어든 비극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본 고에서는 역사적 조명에서 다소 소외되었던 일제강점기 광양 광산의 흔적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쇠점(鐵店)에서 황금의 땅으로, 사곡리 점동마을의 역사적 변천
광양읍 사곡리(沙谷里)는 이름과 달리 역사적으로 고귀한 광물들이 묻혀 있던 보물 같은 땅이었습니다. 사곡리의 중심에 자리 잡은 점동(店洞)마을은 예로부터 주민들이 ‘점골’이라 부르던 곳으로,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부터 질 좋은 철(鐵)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습니다. 무쇠를 녹여 솥과 농기구 등을 구워내던 쇠점(鐵店)이 있었다 하여 ‘점골’ 또는 ‘점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그러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이 평화롭던 골짜기는 일제의 탐욕스러운 자원 수탈 표적이 되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고순도의 금광맥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무단통치를 시작한 일제는 한반도 전역의 광업권을 장악하고 사곡리 일대에 서양식 채광 기술과 대규모 자본을 대거 도입했습니다. 이때부터 점동마을은 ‘철을 굽던 마을’에서 ‘금을 캐는 황금의 땅’으로 변모했습니다. 광양 광산은 전라남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생산량을 자랑하는 핵심 광산으로 지정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들여온 근대식 기계들은 광양의 지하 자원을 더 빠르고 잔혹하게 긁어내기 위한 수탈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갱도 속의 애환, 광산 노동자들의 혹독한 삶과 성별 분업
사곡리 일대의 금광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점동마을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의 일상은 광산 노동과 깊게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농업에 의존하던 순박한 농촌마을 주민들에게 광산은 새로운 생계 수단인 동시에, 주야간을 가리지 않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었습니다.
광산 내부의 노동 구조는 철저한 성별 분업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남성 노동자들은 어둡고 깊은 지하 갱도 막장으로 들어가 정과 망치, 혹은 근대식 착암기를 사용해 단단한 암반을 깨뜨리며 금광석을 채굴했습니다. 당시의 열악한 채광 환경상 제대로 된 안전장비가 갖춰지지 않았고, 동바리(나무 기둥) 몇 개에 의지해 막장을 버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채굴 과정에서 발생하는 광석 가루와 유독가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으며, 늘 낙반과 붕괴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작업에 임해야 했습니다.
반면,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채굴된 금광석을 갱도 밖으로 실어 나르는 운반 작업이 주로 맡겨졌습니다. 여성들은 날카로운 광석더미가 담긴 무거운 바구니나 포대를 머리에 이거나 손수레에 싣고, 가파르고 미끄러운 갱도 안팎을 끊임없이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당시 광산 주변은 야간 작업으로 인해 밤낮없이 불을 밝히며 겉으로는 번성하는 듯 보였으나, 그 이면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일제의 가혹한 수탈 체제 아래 차별적인 저임금과 혹독한 노동 강도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는 마을 앞 점동저수지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이자 태평양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2년경, 일제는 전시 식량 증산을 목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을 저수지 축조 공사에 강제 동원했습니다. 극심한 식량 부족 속에서 주민들은 겨우 밀가루 몇 되를 배급받으며 가혹한 부역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주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다져지던 저수지는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면서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후 우리 손으로 비로소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평화롭고 잔잔하게 물을 담고 있는 점동저수지는, 단순한 농업용수 공급원을 넘어 일제 말기 배고픔과 강제 노역을 묵묵히 버텨내야 했던 광양 민초들의 고단한 역사를 증언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있습니다.

기자가 마주한 현장, 방치된 갱도와 사곡리 광산의 역사적 발자취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의 생생한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기자는 광양읍 사곡리 일대를 직접 찾았습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옛 금광 자리를 몇 시간 동안 헤맨 끝에 마주한 ‘금광 갱도 입구’는,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과 함께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암흑 속으로 100여 년 전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가야 했던 아픈 노동사를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극의 갱도를 내려와 마주하는 본정(本亭)마을은 흔히 일본식 지명(本町)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실제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곳으로, ‘맑은 우물(井)’이 있던 본디 마을에 선비들이 정자(亭)를 지어 풍류를 읊던 평화로운 터전이었습니다. 이 한가롭던 마을이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광산 중심지가 되면서, “배급날이면 광양읍내 쌀값이 10%씩 들썩이고 천막 극장이 들어섰다”는 원로들의 증언만큼이나 격동적인 번화의 중심지로 대전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내내 자행된 제국주의적 약탈로 민초들의 피눈물이 켜켜이 쌓였던 이 광산은,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일시 폐광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인 1958년, 민족 기업가 고(故) 하태호 회장(자택이 본정마을에 보존 중)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광산이 복구되면서 마침내 우리 기술로 금을 생산하며 외화 획득과 국익에 기여하는 자주적 삶의 터전으로 거듭나기도 했습니다. 비록 해방 이후에도 노동의 고단함은 여전했고, 1970년대 국제 금 시세 하락과 안전사고 위험 등으로 인해 1975년 최종 폐광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마을 곳곳에 서 있는 600년 묵은 낙락장송 등의 보호수들은 일제의 수탈과 해방 후 산업 재건의 역사까지 이 모든 격동의 한 세기를 묵묵히 내려다본 살아있는 증인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무너진 갱도 위에서 청종해야 할 ‘노동의 가치’
오늘날 잡풀이 우거진 사곡리 뒷산의 차갑고 어두운 갱도 입구 앞에 서서 쓸쓸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잠겨봅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는 막장 속에서 흘린 땀방울이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주춧돌이 되었음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는 세대입니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절, 이곳 광양 사곡리 갱도 속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선조들의 아픈 노동사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들의 처절한 생존 기록입니다. 비록 화려한 독립운동가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나, 일제의 강요와 배고픔 속에서 버텨낸 혹독한 시간 역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입니다.
최근 광양시에서는 이 아픈 노동사의 현장을 기억하기 위해 점동마을 일대에 ‘금광공원 관광지 조성 사업’을 추진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공사가 중단되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선조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서린 일제 수탈의 현장을 이대로 잊히게 두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이 공간을 화려한 관광지나 단순한 볼거리로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깃든 묵직한 ‘역사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제라도 지자체와 지역 사회가 다시 지혜를 모아 중단된 금광공원 사업의 방향성을 가다듬고 정비해 나가야 합니다. 어두운 갱도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복원하여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일제 수탈의 아픈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나아가 그 척박한 암흑 속에서도 끝내 꺾이지 않았던 우리 민초들의 우직한 생활 생명력을 배우는 뜻깊은 ‘역사적 증언대’로 하루빨리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마치며, 암흑 속에서 피어난 불꽃, 미래의 이정표가 되다
일제강점기 광양 광산의 서늘하고 어두운 갱도는 단순히 금과 철을 빼앗긴 수탈의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암흑의 막장 속에서도,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며 가냘픈 등불 하나에 의지해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키워냈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생활 정신’이자 ‘백절불굴의 기개’가 서린 성소(聖所)입니다.
1975년 마지막 갱도가 닫히고 황금의 역사는 조용히 막을 내렸지만, 그 깊은 땅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흘렸던 땀방울과 피눈물의 가치는 세월의 먼지 속에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제 수탈의 아픈 노동사는 오늘날 풍요 속에서 땀의 정직한 가치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내리치는 매서운 경종입니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피어났던 민초들의 우직한 생활 생명력은 이제 세월의 터널을 지나, 오늘을 사는 우리와 미래 세대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는 가장 정직하고 영원한 이정표로 살아 숨 쉴 것입니다.

[다음 제25회 예고]
사곡리 갱도 속의 축축하고 서늘한 눈물을 뒤로하고, 다음 제25회에서 우리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광양의 남쪽 바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1920년대, 우리 선조들의 창의적인 지혜와 우직한 기개로 세계 최초의 인공 김 양식 기술을 발명해 내어 민족의 배고픔을 달래고 바다의 영토를 넓혔던 곳, ‘태인도 배알도와 세계 최초의 광양 김 시식지(始殖址)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절망의 시대 속에서도 바다 위에서 기적을 일궈낸 선조들의 위대한 해양 개척사를 집중 조명할 예정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끊임없는 성원을 바랍니다.
[주소 안내 사항]
광양 금광 (점동 금광굴):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603-1(점동마을 회관을 지나 산자락 방향)
본정마을 옛 금광 갱도 및 사적비: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본정마을 뒷산자락
사곡저수지 (점동저수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664번지 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