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광양연구회(회장 김양님) 채록팀이 광양시가 주관하고 유족회가 진행하는 채록(採錄)사업을 위해 8일 서부지역(광양읍 등) 상황 파악을 위해 답사했다.
이날 채록팀 10명은 옛 광양군청(현 광양문화원) 앞에서 설명을 듣고 과거 광양경찰서를 시작으로 11개소를 답사했다. 안내를 맡은 김미순 해설사가 증인과 참고인들의 사실조사를 근거로 상황을 설명했다. 김미순 해설사는 사실조사를 담당하고 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발생했으나, 백운산으로 이동하는 14연대 병사들과 좌익계열 동조자(일명 빨치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그 후 70여 년간 가슴 속에 아픔을 품고 있다가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돼 피해신고와 채록사업을 진행하게 됐다.
특히, 채록사업은 여순사건 당시 상황을 후세들에게 기록으로 알려, 다시는 이러한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여순사건 관련, 광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반송재다.
김미순 해설사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0월 20일, 1개 중대를 순천으로 보내 진압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반군 기습으로 3~4명이 사망하자 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27명을 반송재로 끌고 가 사살했다. 또 1951년에는 빨치산의 광양읍 습격 사건으로 40여 명이 경찰서로 연행, 반송재로 끌려가 사살됐다.
빨치산들이 1949년 9월 16일 광양읍을 습격한 직후 군경이 좌익혐의자 색출과정에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 희생 장소는 반송재, 우두리(쇠머리), 구랑실재와 가모개재 등이다. 1949년 9월 18일경 진상면 어치리 주민 서순모(남) 등 40여 명은 광양, 순천 경계인 구랑실재에서 집단사살됐다. 그 가운데 김한기는 총을 빗맞아 마을로 돌아왔는데, 다시 잡혀가 죽령마을 앞 다리 밑에서 사살됐다.
봉강면은 광양의 백운산 줄기에서 맨 서쪽에 위치,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됐다. 조령리와 신룡리 마을은 당시 소개(疏開)됐다고 한다.
1949년 광양우체국 직원으로 토벌 작전에 참여했던 장모(당시 20세) 씨는 참고인 진술에서 “광양읍 화신 광장에서 트럭 2대에 약 40명을 태워 쇠머리(우두) 넓은 들판에서 줄을 세우더니 총을 쏴 사살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당초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봉강면 피해자는 4명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실제 봉강면 피해자는 조사결과 22명이었는데, 당시 봉강지서 의경이었던 김모(당시 26세) 씨는 “봉강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부역 행위자를 집단 사살하고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솔티재는 호암마을에서 죽동마을로 이동하는 중간지점으로 소나무가 많아 솔티 또는 송치(松峙)라고 전한다.
지금은 고속도로지만 1948년 11월 11일경 지곡리 주민 조용래(당시 38세) 부면장은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솔티재 골짜기에서 10여 명과 함께 사살됐다고 한다. 또 한모(당시 26세) 씨는 “1949년 9월 솔티재에 갔더니 30~40구의 시신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는 말도 전했다.
1949년 5월 사평마을(진월면 오사리) 이장 김광식(당시 29세) 씨는 빨치산에게 심부름을 해주고 하동 외가에 숨어지내다 가족의 권유로 자수했으나 22일경 솔티재에서 사살됐다. 참고인 구모 씨는 “살려면 심부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삼촌이 너는 아무 죄가 없으니 자수하자고 하면서 김광식을 데리고 지서로 가서 자수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김미순 해설사는 “지금까지 조사로 광양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1949년 9월 광양읍을 빨치산이 1차 습격했을 때와 6.25전쟁 발발 후 1951년 1월 14일 빨치산이 2차로 광양읍을 습격한 후”라며, “당시 군경이 좌익 색출 작전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는데, 장소는 주로 반송재, 우두리, 구랑실, 가모개 세풍리 뒷산(겁단재 인근) 등지였다”고 설명했다.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한 참여자는 “실제 현장을 보고 나니 증언이나 참고인과 채록하게 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