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의 곧은 기개에 전통 매듭과 펜촉을 조화시켜 명품 필기구를 빚어내는 죽정(竹亭) 김선준 명인의 작업 모습과 발자취. 수십 년간 수공예로 광양죽필의 맥을 지켜온 명인의 손길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불과 발효의 문화 뒤에 숨은 거장들의 손길

지난 회차까지 본지는 광양불고기의 직화 미학, 백운산 청정 물길이 빚어낸 전통주, 그리고 시간과 기다림의 미학이 만들어낸 기정떡에 이르기까지 광양의 독창적인 식문화 자산을 차례로 조명했다. 뜨거운 화로와 깊은 발효의 항아리 너머에는 언제나 세심하게 도구를 다루고 혼을 불어넣던 사람들의 손길이 존재했다.

‘광양의 문화’ 네 번째 이야기인 이번 제54회에서는, 평생을 바쳐 전통 기예를 다듬고 역사와 예술의 맥을 이어온 ‘광양의 장인(匠人)’들의 삶과 그들의 고결한 철학을 집중 조명한다.

예로부터 광양은 백운산의 풍부한 목재와 참숯, 남해안의 사통팔달한 물류, 그리고 정교한 수공예 전통이 결합한 남도의 대표적 예향(藝鄕)이었다. 불꽃 속에서 쇠를 두드리던 도검 장인부터, 대나무를 깎아 올곧은 필기와 화살을 만들던 기능보유자까지—광양의 장인들이 남긴 유산은 단순한 기물을 넘어,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급격한 현대화의 파도 속에서도 겨레의 혼을 지켜낸 거대한 인문학적 자산이다.

가을의 길목, 광양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유독 정원수나 관상수로 심어진 금목서와 은목서 나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윽하고 진한 금목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 계절, 향기로운 길을 따라 광양의 예혼(藝魂)을 지켜가는 전통 공예 장인들의 작업실과 전수관을 찾아 나섰다.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에 위치한 ‘광양장도전수관(광양장도박물관)’ 전경. 3대에 걸친 국가무형유산 장도장의 혼과 전통 장도의 역사적 가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사진=문성식
광양 장도의 역사와 3대 장인의 정교한 장도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광양장도박물관 내부 전시실 모습. 사진=문성식

1. 칼날 위에 선비의 지조를 새기다—국가무형유산 장도장(粧刀匠) 박용기·박종군·박건영 3대

광양의 수공예 전통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꼽히는 명작은 단연 ‘광양 장도(廣陽 粧刀)’다. 장도는 옷고름이나 호주머니에 차고 다니던 호신용 및 장신구용 칼로, 지조와 절개, 그리고 곧은 정절과 충효(忠孝)의 상징이었다.

광양 장도를 대한민국 최고의 향토 공예품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은 1대 보유자인 故 박용기 옹(1978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지정)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전통 장도의 맥이 끊길 위기 속에서도 광양의 옛 작업장에서 숯불을 피우고 망치를 들며 한평생을 칼을 벼리는 데 바쳤다. 그 뒤를 이어 아들이자 제자인 2대 박종군 장인이 2011년 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가업을 계승했고, 2020년에는 손자인 3대 박건영 이수자가 엄격한 국립무형유산원 심사를 통과하며 대한민국 공예계에서 보기 드문 ‘3대 전승’의 가업 계승을 완성했다.

광양 장도는 단단한 쇠를 숯불에 달구어 수천 번 두드려 잡불순물을 빼내는 세심한 제련 과정을 거친다. 칼날에는 선비의 기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지며, 칼집에는 은(銀), 대나무, 칠보 등을 활용한 정교한 조각이 입혀진다. 박용기 장인이 새긴 ‘충효일체(忠孝一體)’와 ‘일사각오(一死角悟)’의 정신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고결한 선비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현재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매천로 771에 위치한 ‘광양장도전수관(광양장도박물관)’은 이들 3대의 혼이 담긴 작품과 전통 제작 기법을 시공간을 넘어 일깨워주는 배움터 역할을 하고 있다.

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유당로에 위치한 ‘광양궁시전수교육관’ 건물 전경. 故 김기 궁시장의 집념과 전통 화살 제작 기법을 체계적으로 전승하고 시민체험 교육을 전개하는 문화 거점이다. 사진=문성식
광양궁시전수교육관 내부에 전시된 전라남도 무형유산 궁시장 故 김기 장인의 생전 작업 모습 패널. 평생을 바쳐 130여 번의 손길이 가는 전통 죽시(竹矢)의 맥을 세우고 지켜온 장인의 집념과 얼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사진=문성식

2. 바람을 벼리고 역사를 잇다—궁시장(弓矢匠) 故 김기 장인, ‘광양궁시전수교육관’ 김철호 관장, 그리고 ‘백두화살’ 김연오 작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활을 잘 쏘는 동쪽의 민족이라 하여 ‘동이(東夷)족’이라 불렸다. 광양은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가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예부터 국궁(國弓)이 성행했으며, 지금도 지역 내에 6곳의 국궁장이 운영될 만큼 궁도 문화가 깊게 자리 잡은 고장이다.

이러한 전통 활과 화살 제작의 일길을 개척한 이가 바로 전남도 무형문화재 제12호 궁시장(弓矢匠) 故 김기(金起) 선생(1938~2022)이다. 15세 때 화살 제작에 입문해 평생을 살대 다듬기에 매진했던 김기 장인은 1974년 광양에 터를 잡고 ‘광양 궁시’의 유구한 이름을 탄생시켰다. 1987년 작업 도중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비운을 겪으면서도 쪼그려 앉아 130여 가지가 넘는 정교한 손수작업 공정을 지켜낸 그의 집념은 전설적인 장인 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2022년 5월 김기 장인이 향년 84세로 별세한 후, 그 숭고한 맥은 그의 아들이자 전승교육사인 김철호 관장에게 이어지고 있다. 김철호 관장은 지자체와 협력하여 ‘광양궁시전수교육관(광양읍 유당로 224-19)’을 건립해 전통 죽시의 제작 연구와 함께 시민·청소년 체험교육의 거점으로 다지고 있다.

전라남도 무형유산 궁시장 이수자인 소암 김연오 작가의 숨결이 머무는 공방 ‘백두화살’ 입구 전경. 자연 소재와 전통 방식을 고집하며 다양한 전통 화살을 복원하고 현대적 감각의 공예품으로 승화시키는 소중한 작업 공간이다. 사진=문성식
각양각색의 전통 궁시와 수작업 공구들이 가득한 백두화살 공방 내부에서 김연오 작가가 정교하게 화살대를 다듬고 있다. 130여 번에 달하는 고된 공정을 일일이 손으로 거치며 전통 죽시(竹矢)의 맥을 잇는 장인의 몰두가 느껴진다. 사진=문성식

■ 전통 무기의 예술적 승화—‘백두화살’ 김연오 작가의 도전과 명성

광양 궁시의 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거목이 바로 김기 명인의 수제자이자 전남 무형유산 궁시장 이수자인 ‘백두화살’ 김연오 작가(대표)다. 1990년대 후반 김기 장인 밑으로 들어가 혹독한 수련을 거친 그는, 2004년 독자 브랜드인 ‘백두화살’을 창안하며 전통 화살의 지평을 현대 공예 예술의 영역으로 크게 확장시켰다.

화살 하나를 만드는 과정은 수행에 가깝다. 1년 이상 자연 건조한 2년생 시누대 살대를 숯불에 구워 일일이 곧게 펴고(졸잡이), 젖은 소힘줄과 전통 부레풀(어교)로 살대를 감아 탄력을 높이고 쪼개짐을 막는다. 이어 복숭아나무로 오늬를 깎아 맞추고, 꿩깃 3개를 균형 있게 붙여 130여 번의 손길을 거쳐야 단 한 자루의 화살이 완성된다. 하루 온종일 작업에 매달려도 단 2~3자루만 손끝에서 피어날 만큼 지난한 과정이다.

김연오 작가는 단순히 전통 제작 방식에 머무르지 않고, 박물관이나 TV 사극에서만 보던 화살을 현대인들이 곁에 두고 감상할 수 있는 고품격 공예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신라와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제 화살촉을 고증·복원하는 작업을 비롯해, 신호를 보내던 효시(響矢), 비밀병기였던 편전(애기살), 왕의 명령을 전하던 신전(信箭) 등을 액자형 및 병풍형 예술품으로 정교하게 시각화했다.

그 결과, 제45회 전라남도 공예품 대전에서 ‘삼국시대 궁시’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으며, 전국 관광기념품 공모전 금상·대상, 한국공예협동조합 이사장상 등 다수의 국전과 공예전을 휩쓸었다. 그의 개인전 ‘찰나’와 각종 초대전에서 보여준 유연하면서도 서늘한 기개의 화살 작품들은, 광양의 궁시 기술이 과거의 살상용 무기를 넘어 우리 민족의 선비 정신과 조형미를 보여주는 고품격 예술 자산임을 증명하고 있다.

대나무의 곧은 성품과 선비의 기개를 담은 명품 필기구, ‘광양죽필’을 빚어내는 죽정(竹亭) 김선준 명인의 작업실 전경. 오랜 세월 수공예의 온기와 예술적 숨결이 아늑하게 깃들어 있는 공방의 풍경이다 사진=문성식
손질된 대나무 자재들과 죽정(竹亭) 김선준 명인의 작업 사진 액자가 눈길을 사로잡는 광양죽필 공방 내부 모습. 1997년부터 이어져 온 명인의 땀방울과 대나무 공예 예술의 깊은 역사가 공간 곳곳에 배어 있다. 사진=문성식

3. 대나무의 올곧은 기개에 현대적 문기를 입히다—‘광양죽필’과 죽정(竹亭) 김선준 명인

광양장도, 광양궁시와 함께 광양을 대표하는 3대 전통 공예품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광양죽필(Gwangyang Bamboopen)’이다. 대나무가 지닌 올곧은 선비의 기개와 현대 필기구의 실용성을 고고하게 접목시킨 죽필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양에서 독자적인 공예 장르로 발전했다.

광양죽필의 중심에는 20년 넘게 대나무 필기구 제작에 매진해 온 죽정(竹亭) 김선준(김선중) 명인이 있다. 광양의 곧고 단단한 대나무를 채취해 그 자연스러운 형태와 마디, 은은한 색감을 그대로 살려내는 것이 그의 장기다.

작품 제작은 전 과정이 수공예로 이루어진다. 대나무 고유의 수분을 빼고 보존성을 높이는 묵직한 과정을 거쳐 전통 매듭, 금·은 펜촉, 세밀하게 새겨진 용문양 등을 접목해 완벽한 필기구로 거듭난다. 단단하면서도 손에 감기는 촉감, 펜 끝에서 흐르는 부드러운 먹향은 장인의 치밀한 정성을 보여준다.

광양죽필은 2002년 전국공예품대전 산업자원부장관상, 2007년과 2010년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대통령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그 독창성과 가치를 입증받았다. 나아가 대한민국을 찾은 세계 정상들과 주요 외빈들의 소장품 및 외교 선물로 선택되면서, 광양의 기품 있는 대나무 문화가 지닌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4. 쇠와 나무, 대나무가 빚어낸 시대의 핏줄—전통에서 현대 산업으로

광양의 장인 정신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광양 장도장이 작은 칼날 하나에 혼을 담아 쇠를 두드렸듯, 그리고 궁시장이 130여 번의 손길로 화살대를 다듬고 죽필장이 대나무 마디를 살려냈듯, 이 정교한 수공예적 피와 집념은 광양이라는 도시 전체의 정체성으로 깊게 흐르고 있다.

1980년대 들어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고 현대적인 정밀 금속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아주 먼 옛날부터 백운산 참숯 불꽃 앞에서 쇠를 다루고 제련하던 이 고장 장인들의 ‘불과 철의 연금술’이 무의식 깊은 곳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날 끝에 정절을 새기던 손길, 표적을 향해 곧게 날아가는 화살을 빚던 손길, 그리고 곧은 대나무에 문화를 새기던 손길은 오늘날 첨단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역민들에게도 타협하지 않는 품질과 장인 정신의 소중한 귀감이 되고 있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햇살을 품은 광양 장도박물관의 웅장한 전경. 국가무형유산 장도장의 예술적 맥을 잇고 전수하는 공간으로, 건축물 곳곳에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기품이 느껴진다. 사진=문성식

손끝에 담긴 장인의 혼, 도시의 미래를 밝히다

광양의 장인들은 타협하지 않는 고집과 묵묵한 인내로 세월을 견뎌왔다. 화려한 명성이나 부를 탐하기보다, 자신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기물 하나에 영혼과 양심을 담아냈던 이들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가르침을 준다.

박용기 장인의 망치 소리가 광양장도전수관의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있고, 故 김기 궁시장의 얼을 이어받은 광양궁시전수교육관의 화살 끝과 김연오 작가의 ‘백두화살’이 곧은 기개를 뿜어내듯, 백운산의 대나무와 바람 속에는 여전히 수많은 장인의 땀방울이 온전히 녹아 있다. 전통을 지켜낸 이 고결한 손길이야말로, 빛과 온기로 가득한 도시 광양이 가꿔나갈 가장 눈부신 인문학적 미래 자산이다.

[다음 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 제6부 광양의 문화] 55회:
광양만과 섬진강의 푸른 물길, 그리고 기름진 들녘에서 피어난 민초들의 생동감 넘치는 가락 — ‘광양의 소리와 전통 노래 (전어잡이소리·향토민요·판소리)’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