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시간, 그리고 햇살이 빚어낸 여름의 미학. 17시간 이상의 자연 발효 과정을 거쳐 은은한 막걸리 향과 새콤달콤한 풍미를 머금은 광양 기정떡은 예부터 민초들의 지혜와 나눔의 정이 담긴 남도의 대표적인 주전부리다. 사진=광양시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숯불과 전통주의 온기를 지나, 발효의 숨결이 만든 떡으로

지난 51회와 52회 기사를 통해 본지는 광양의 숯불 직화 미학인 ‘광양불고기’와 백운산 청정 물길 및 매화 향이 어우러진 ‘광양의 전통주’를 차례로 조명했다. 불을 다루는 지혜와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발효의 미학은 선비와 민초, 그리고 오늘을 사는 지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광양 문화의 핵심 축이었다.

‘광양의 문화’ 세 번째 이야기인 이번 제53회에서는, 푹푹 감도는 남도의 여름철에도 상하지 않고 은은한 막걸리 향과 부드러운 식감으로 민초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전통 발효떡, 바로 ‘광양 기정떡(증편)’의 역사와 방앗간 일상의 인문학적 가치를 탐구한다.

‘기증떡’, ‘증편’, ‘술떡’ 등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채롭지만, 광양 사람들에게 이 음식은 유독 정겨운 ‘기정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쌀가루에 생막걸리를 섞어 자연 발효시킨 뒤 시루에 쪄내는 기정떡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간식을 넘어, 예부터 여름철 남도 사람들의 지혜와 삶의 풍류가 깃든 유서 깊은 향토 문화유산이다.

장터의 온기와 남도의 정이 서린 골목 풍경. 1960년대 광양읍내에서 시작된 기정떡의 명맥을 지키며, 이른 아침부터 완판 행진을 이어가는 광양 매일시장 인근 기정떡집 전경. 사진=문성식

햇살 익어가는 골목, 텅 빈 진열대와 방앗간의 삶

햇살이 투명하게 익어가던 어느 가을날, 기정떡의 생생한 숨결을 담아내기 위해 광양읍내의 오랜 기정떡집을 찾았다. 기분 좋은 단내와 구수한 스팀 김이 골목길을 채우고 있었지만, 막상 떡집 안으로 들어서자 진열대는 이미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이구, 기자님! 기정떡은 이른 아침 오전에 다 완판되어 버려요. 발효 시간 맞추느라 새벽부터 쪄내는데, 외지 손님이고 동네 분들이고 오전에 싹 가져가 버리니…”

떡집 주인의 정겨운 아쉬움 뒤로, 멀리 타지에서 광양 오일장이나 떡집을 찾아왔다가 빈손으로 뒤돌아서는 방문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다 오전이면 어김없이 매진되고 마는 이 풍경은, 광양 기정떡이 이제 단순한 지역 간식을 넘어 전국적인 명품 특산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이러한 기정떡집과 골목 안 방앗간은 예부터 광양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지탱해 온 온정의 중심지였다. 쌀을 빻고 고춧가루를 빻으며, 참기름을 짜내는 방앗간의 냄새는 읍내 장터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끌림이었다. 기정떡은 바로 그 방앗간의 온기와 광양의 비옥한 쌀, 그리고 생막걸리가 만나 탄생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생활의 지혜’이자 나눔의 문화였다.

40년 세월 동안 쌀을 빻고 고춧가루를 찧으며 이웃들의 삶의 온기를 나누어 온 방앗간. 변화하는 도시의 길목에서도 변함없이 장터의 정을 이어가는 현대식 방앗간의 새로운 풍경. 사진=문성식

‘증편(蒸片)’의 역사—궁중의 고상함에서 남도의 장터로

기정떡의 뿌리는 고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려 말 문헌에 등장하는 ‘상화(霜花)’나 조선 시대 다양한 고문헌 속 ‘증편(蒸片)’이 그 원형이다. 조선의 궁중과 사대부 가문에서는 여름철 쉽게 쉴 수 있는 일반 떡 대신, 술을 넣어 발효시켜 보존성을 높인 증편을 여름철 으뜸 절식(節食)으로 꼽았다.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가던 정갈한 증편은 시간이 흘러 남도의 비옥한 곡창 지대인 광양으로 내려와 서민적이고 풍성한 ‘기정떡’으로 재탄생했다.

“여름철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도 기정떡은 사흘이 지나도 쉬지 않고 부드러운 향을 뿜어낸다.”

과거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조상들은 생막걸리 속에 살아있는 누룩균과 효모의 발효 작용을 활용해 떡이 부패하는 것을 막았다. 과학적인 미생물 발효의 원리를 이미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날 광양 오일장 부근이나 마을 주막거리에서 나뉘던 기정떡은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들녘으로 나서는 농부들의 든든한 새참이자 훌륭한 주전부리였다.

광양 기정떡의 역사적 발상지는 광양읍 덕례리(德禮里)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이곳은 이웃 간에 ‘덕(德)’과 ‘예(禮)’를 담아 떡을 나누어 먹던 고장에서 유래했다. 이후 현대적 의미의 광양 기정떡 판매는 1966년 광양읍내 ‘대호탕’ 자리에서 故 박정숙 여사가 기정떡을 빚어 팔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태동을 맞이했다. 박 여사의 손맛을 전수받은 자녀들과 후계자들은 오늘날 광양과 순천 등지에서 가업을 이어가며 광양 기정떡을 ‘광양 9대 맛’의 반열에 올렸다.

장인의 손길과 17시간의 발효 과정을 거쳐 갓 쪄낸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정갈하게 잘라둔 백미 기정떡과 흑미 기정떡. 위생적으로 소포장되어 전국 각지의 소비자들에게 배송될 상자에 담긴다. 사진=문성식

막걸리와 쌀, 그리고 온도가 만든 미학—기정떡 제조의 기술

광양 기정떡이 특유의 폭신폭신하고 쫀득한 식감을 내기 위해서는 정밀한 시간과 온도의 컨트롤이 필수적이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반죽의 상태가 미세하게 변하기 때문에 기정떡을 만드는 과정은 기술을 넘어 장인의 감각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쌀과 생막걸리의 만남: 멥쌀을 깨끗이 씻어 미세하게 빻은 쌀가루에 갓 빚은 생막걸리와 따뜻한 물, 적절한 비율의 설탕을 섞어 반죽을 완성한다.

3차에 걸친 자연 발효: 반죽을 30℃ 안팎의 따뜻한 온실이나 발효실에서 수시간 동안 3차에 걸쳐 천천히 발효시킨다. 발효가 진행되면서 반죽 내부에는 수많은 미세 기공(공기 구멍)이 형성된다.

증기(蒸氣)의 마법: 잘 부풀어 오른 반죽을 틀에 붓고 위에는 석이 버섯, 잣, 대추, 검은깨 등을 올린 뒤 강한 증기로 쪄낸다.

완성된 광양 기정떡을 반으로 갈라보면 마치 스펀지나 치즈처럼 고르고 미세한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공기층 덕분에 입안에 넣었을 때 베어 무는 순간 스르륵 녹아내리듯 부드러우면서도, 씹을수록 쫀득하고 새콤달콤한 막걸리 특유의 풍미가 은은하게 감돌게 된다.

1966년 광양읍 대호탕 자리에서 故 박정숙 여사가 시작한 손맛을 이어받아 현대적 신축 건물로 이전·확장한 ‘원조광양기정떡집’ 전경. 대를 이어 광양 9미(味) 중 하나인 광양 기정떡의 명맥을 지키며 지역 대표 명소로 자리잡았다. 사진=문성식

기정떡의 현대적 변화—광양의 대표 명물 특산품으로

과거 기정떡이 여름철에만 맛볼 수 있었던 계절 한정 별미였다면, 현대에 들어 광양 기정떡은 사계절 내내 전국에서 찾을 수 있는 대표 특산품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광양읍을 중심으로 전통을 지켜온 유기농 쌀 활용 양조·제떡업체들은 고유의 수작업 발효 기술에 현대적 위생 설비와 급속 냉동 기술을 접목했다.

다양해진 퓨전 라인업: 전통적인 흰 기정떡뿐만 아니라, 지역 특산물인 광양 매실 즙을 첨가해 새콤함을 극대화한 ‘매실 기정떡’, 쑥이나 자색고구마, 단호박, 흑미를 넣어 알록달록한 색감과 영양을 더한 ‘오색 기정떡’ 등 다채로운 메뉴가 개발되었다.

웰빙 간식으로의 도약: 기정떡은 쌀을 발효시켜 만든 덕분에 소화가 잘되고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밀가루에 민감한 현대인이나 어린아이, 어르신들의 간식 및 식사 대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오늘날 광양 기정떡은 명절 선물이나 백일·돌잔치, 지역 행사 답례품으로 널리 소비되며, 전국 각지로 택배 배송되어 남도의 따뜻한 정을 전하는 일등 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

지역민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 온 광양읍 매일시장 내 떡집거리 전경. 예부터 혼례나 회갑, 백일 등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광양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먼저 머무는 정겨운 삶의 터전이다. 사진=문성식

나눔의 정이 담긴 남도의 주전부리

음식은 그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의 마음을 닮는다. 옛 광양 사람들은 커다란 시루에 기정떡을 찌는 날이면 네모반듯하게 조각내어 이웃집 담장 넘어 따끈따끈한 떡을 넉넉히 돌리곤 했다.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가볍고 폭신한 떡 한 조각에는 배고프던 시절 서로를 보살피던 마을 사람들의 따스한 정과 나눔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어느덧 첨단 기술과 세련된 포장을 입은 현대의 광양 기정떡이지만,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퍼지는 특유의 은은한 막걸리 발효 향은 여전히 수십 년 전 당산나무 그늘 아래서 이웃들과 떡 한 조각을 나누던 향수와 그리움을 일깨워준다.

전통의 숨결을 찌다

광양불고기가 뜨거운 직화의 열기로 손님을 대접하는 호방함이라면, 광양 기정떡은 스팀 소리 너머로 은근하게 익어가는 인내와 절제의 문화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발효의 기적, 쌀과 누룩이 빚어낸 순수한 부드러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민초들의 지혜까지—광양 기정떡은 광양이 간직해 온 또 하나의 소중한 인문학적 유산이자 멋스러운 식문화이다. 오늘날에도 광양의 골목길 양조장과 떡집 연통에서는 고소하고 달큼한 발효의 김이 쉼 없이 피어오르며,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를 건네고 있다.

[다음 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 제6부 광양의 문화] 54회: 예로부터 남도 선비와 명장들의 기개와 손끝의 정교함이 서려 있는 전통 공예의 진수 — 무형문화재 ‘광양의 장인 (장도·죽필·궁시)’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