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근대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따스한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이 기록들이 독자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푸른 풍경을 깨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닙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건너온 ‘성소(聖所)’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숨겨진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불고기의 온기에 이어, 백운산 청정 옥수를 잔에 담다
지난 51회 기사에서 본지는 광양의 대표적 식문화인 ‘광양불고기’를 다루었다. 붉게 피어오르는 참숯불과 놋화로, 구리 석쇠 위에서 완성되던 불고기 문화는 단순한 맛을 넘어 유배객을 품어 안았던 호남의 넉넉한 인심과 남도의 깊은 정서가 녹아 있는 문화적 자산이었다.
음식(食)이 풍토와 인간의 만남이라면, 음료와 술(飮酒)은 그 땅이 가진 맑은 수질과 바람,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응축되어 피어나는 생명의 결정체다. 예로부터 우리 민초들에게 음료는 단순히 목을 축이는 수단이 아니었다. 거친 노동 현장에서 기력을 회복시키는 보약이자, 고단한 삶의 시름을 달래는 따뜻한 위로였다. 특히 고된 농사와 어로 작업에 종사하던 보통의 백성들에게는 독한 술보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맑은 샘물과 산 들녘이 내어준 수액이 삶에 훨씬 더 가까이 존재했다.
‘광양의 문화’ 두 번째 이야기인 이번 제52회에서는, 백운산(白雲山)이 선물한 천연 생명수이자 광양 음료 문화의 뿌리인 ‘백운산 고로쇠 약수’를 최우선 중심축으로 삼고, 매화 향 그윽한 과실 음료와 그것이 발효의 미학으로 만개한 ‘광양의 전통주(傳統酒)’까지 깊이 있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
- 백운산과 섬진강이 빚은 천혜의 풍토—‘물이 곧 음료’였던 민초의 삶
광양의 식음료 문화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백운산(1,222m)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가 만나는 웅장하고 독특한 지형이다.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장엄하게 솟은 백운산은 거대한 천연 수문(水門)이자 미네랄의 보물창고다. 백운산의 네 자락 계곡(성불, 동곡, 어치, 금천)에서 발원한 청정 옥수는 광양 평야를 적시고 섬진강으로 흘러들며 토양과 삶에 깊은 영양을 공급한다.
전통 사회에서 광양의 민초들에게 최고의 음료는 단연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 그 자체였다. 조선 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광양현 편에는 백운산의 수석(水石)과 수질의 뛰어남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백성들은 이 깨끗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수액 음용 문화와 음다(飮茶) 문화를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
남해안의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백운산의 시원한 산바람이 교차하는 광양은 식물의 당도와 유기산, 미네랄 생성을 극대화하는 천혜의 조건이다. 뼛속까지 땀에 젖는 모내기철과 밭매기철, 그리고 혹한을 견뎌낸 경칩 무렵, 광양의 농부들은 산에서 채취한 자연의 수액으로 몸을 정화하고 목을 축였다. 술이 특별한 날이나 의례에 쓰이던 잔치 음식이었다면, 고로쇠를 비롯한 청정 수액 음료는 민초들의 하루를 지탱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진정한 생명수였다.


- 자연이 준 가장 오랜 생명수—‘백운산 고로쇠 약수’의 인문학과 민속사
광양의 전통 음료 문화에서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원조(元祖)는 백운산이 겨울의 끝자락에 내어주는 천연 약수, 바로 ‘고로쇠 수액’이다. 고로쇠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오랜 세월 광양 민초들의 건강과 기력을 지켜온 독보적인 향토 보양 자산이자 생태 문화의 정수다.
① 골리수(骨利水) 설화와 역사적·문헌적 근거
‘뼈에 이로운 물’이라는 뜻의 골리수(骨利水)는 광양의 역사와 깊게 얽혀 있다. 신라 말, 광양 玉龍寺(옥룡사)에서 35년간 머물며 선풍을 일으키고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설화가 그 출발점이다. 오랫동안 가부좌를 틀고 좌선 수행을 마친 도선국사가 일어서려 했으나 무릎이 펴지지 않자, 곁에 있던 고로쇠나무 줄기에서 떨어지는 수액을 받아 마시고 곧바로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는 전설이다.
이 설화는 단순한 민간 픽션이 아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및 이중환의 《택리지》 계열 문헌, 그리고 조선 후기 지리지 등에서도 산중 주민들이 초봄에 나무 수액을 받아 마시며 겨울철 쌓인 몸의 독소를 배출하고 뼈와 기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백운산 고로쇠는 단순한 수액이 아닌, 백운산의 암반층을 거치며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 미네랄을 풍부하게 머금은 자연이 내린 천연 음료인 것이다.
② 민초들의 ‘약수제’와 독특한 음용 문화
매년 경칩(驚熾) 전후가 되면 광양의 백성들은 온 가족이 모여 백운산 자락에 올랐다. 당대 민초들은 항아리나 대나무 관을 이용해 수액을 받아 마셨는데, 이때 불고기나 포, 동치미, 오징어 같은 짭짤한 음식을 곁들여 마셨다. 염분을 곁들임으로써 수액을 질리지 않고 다량 마실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키며 한 해 농사를 시작하기 전 몸을 정화했다.
이 고유한 관습은 오늘날 전국 최초 산림청 지리적 표시 제16호로 지정된 ‘백운산 고로쇠 약수제’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운산 고로쇠는 광양 민초들이 자연과 호흡하며 삶의 에너지를 얻던 가장 오래된 섭생의 지혜였다.


- 민초의 상비약에서 명품 건강 음료로—광양 매실차의 발자취
백운산 고로쇠가 봄을 알리는 생명수라면, 뒤이어 산자락을 물들이는 매화열매로 만든 ‘광양 매실차’는 여름철 민초들의 배탈과 피로를 치료해 주던 가정 내 ‘천연 상비약’이자 최고의 갈증 해소 음료였다.
① 전통 문헌 속 매실의 약용·음료적 가치
조선시대 대표적 의서인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매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실은 맛이 시고 독이 없으며, 기를 내리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없애주며 갈증을 멈추게 한다. 근육과 맥을 활성화하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
또한 조선 영조 때의 농업보존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매실을 짚불에 그을려 오매(烏梅)로 만들거나, 설탕 및 꿀에 재워 즙을 내어 마시는 ‘오매차(烏梅茶)’와 ‘매실청(梅實淸)’ 제조법이 상세히 나와 있다. 광양의 가정집 장독대마다 기와지붕 아래 매실청 항아리가 놓여 있던 것은 이러한 한의학적·민속학적 지혜가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② 율산 김오천에서 홍쌍리 명인으로 이어진 현대적 결실
광양 매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도약한 것은 근현대사의 땀방울 덕분이다.
1931년: 율산(栗山) 김오천 선생이 다압면 섬진강 자락의 밤나무와 매실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광양 대규모 매실 재배의 효시를 쏘아 올렸다.
현대: 2대 매실지기인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제14호 홍쌍리 대표(청매실농원)가 전통 옹기 항아리 발효 방식을 체계화하며 광양 매실차를 국민 건강 음료 반열에 올렸다.
백운산의 넉넉한 일조량과 섬진강의 새벽안개를 맞고 자란 광양 매실은 타 지역산에 비해 구연산 함량이 높고 과육이 단단하여, 차로 마셨을 때 산뜻한 산미와 깊은 감칠맛을 자랑한다. 이는 산림청 지리적 표시 제36호로 등재되며 그 원조성을 입증받았다.


- 들녘의 농주(農酒)에서 정병옥 가옥의 문학주까지—광양의 술 역사
일상 속에서 고로쇠와 매실 음료로 목을 축이던 광양 사람들은, 기쁜 날이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에 이르러 발효의 미학인 ‘술’을 접했다. 광양의 술 역사는 들녘의 피로를 풀어주던 농주(農酒) 탁주에서 출발하여, 특산물인 매실을 품은 과실주, 그리고 역사적 서사를 담은 프리미엄 증류주로 진화해 왔다.
① 민초들의 삶을 지탱한 탁주와 ‘앉은뱅이밀 누룩’
전통 농경 사회에서 광양의 주막과 들녘을 지배한 것은 막걸리(탁주)였다. 모내기가 한창인 세풍 간척지나 진상면의 들녘에서 농부들이 마시던 탁주는 한 끼 식사이자 고단함을 잊게 하는 에너지원이었다.
광양 탁주의 고유함은 백운산 청정수와 함께 토종 ‘앉은뱅이밀 누룩’을 사용하는 데서 나온다. 인공 감미료에 의존하지 않고, 100% 우리 쌀과 토종 누룩을 사용하여 저온에서 장기간 자연 발효시키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톡 쏘는 천연 탄산과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목넘김은 예나 지금이나 광양 시골 장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다.
② 정병옥 가옥과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문학주 ‘별헤주 1941’
광양의 술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역사의 비극을 보듬고 문학을 지켜낸 숭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심에는 광양 망덕포구에 위치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옥 가옥’(국가등록문화재)이 있다.
일제강점기 암흑기,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친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연희전문 동문인 정병옥 선생에게 맡겼다. 정병옥 선생의 어머니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시집을 명주실로 겹겹이 싸서 마룻바닥 아래 항아리 속에 깊이 숨겨 보존했다. 이 혜안 덕분에 광복 후 윤동주의 시는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오늘날 옥룡면 백운산 자락의 ㈜백운주가 등 지역 장인들은 이 역사적 순간과 시인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헌정 증류주인 ‘별헤주 1941’을 빚어내고 있다. 발효시킨 매실 와인을 전통 옹기 증류기로 정성껏 내려 만든 맑은 증류주는 잔에 담긴 빛깔만으로도 망덕포구의 밤하늘과 시인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인문학적 감흥을 선사한다.

- 현대의 광양 식음료—전통과 혁신이 숨 쉬는 미식의 미래
오늘날 광양의 전통음료와 술 문화는 고전의 보존에 그치지 않고, 현대적 기술과 결합하여 한층 풍성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① 전통주의 현대적 도약과 전국적 평가
광양 생막걸리 골드 ((주)광양주조공사): 세풍 간척지의 햅쌀과 전통 누룩을 활용해 국가 지정 술 품질인증(가-162호)을 획득하고 남도 전통주로 선정되며 지역 대표 막걸리의 명맥을 잇고 있다.
섬진강바람 오크40 ((주)섬진강의 봄): 잘 익은 황매실과 돌배를 발효·증류한 후 오크통에서 1년간 숙성시킨 40도 고급 증류주로, ‘2025 남도 우리술 품평회’에서 종합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형 프리미엄 와인·증류주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별헤주 1941 & 광양매실막걸리 ((주)백운주가): 백운산 수자원과 청매실 과즙을 결합해 ‘2023 남도 우리술 품평회’ 최우수상을 수상한 ‘별헤주 1941’을 비롯해 새콤달콤한 유기산의 풍미를 살린 막걸리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② 융복합 전통 음료의 탄생: 광양 고로쇠-매실 동치미
최근 광양 식문화에서 눈에 띄는 혁신은 자연이 준 두 가지 음료 자원(고로쇠와 매실)의 만남이다. 물 대신 미네랄이 풍부한 백운산 고로쇠 수액으로 국물을 잡고, 광양 매실청으로 은은한 천연 단맛과 산미를 더해 담그는 ‘광양 동치미’가 대표적이다.
이 동치미 국물은 톡 쏘는 천연 탄산미와 감칠맛을 자랑하며, 숯불에 구운 광양불고기를 먹은 후 입안을 깔끔하게 개운하게 해주는 최고의 전통 음료 겸 후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청정한 물길 따라 흐르는 쉼과 위로의 미학
광양불고기가 화로 위의 뜨거운 불기운으로 사람과 사람을 따뜻하게 이어주는 ‘환대의 문화’였다면, 백운산 고로쇠를 필두로 한 광양의 전통음료와 술은 백운산의 맑은 물과 들녘의 결실을 차분히 기다려 완성한 ‘쉼과 위로의 문화’다.
봄의 길목에서 백운산 고로쇠 한 바가지로 몸을 정화하고 땀을 씻어내던 농부의 손길, 여름철 배탈 난 자식에게 살포시 건네던 어머니의 따뜻한 매실차 한 잔, 그리고 망덕포구의 밤바람 아래 윤동주의 시를 읊조리며 기울이던 맑은 ‘별헤주’ 한 잔까지.
이 모든 것 속에는 이 땅을 성실하게 일궈온 광양 민초들의 지혜와, 자연의 혜택에 감사할 줄 알았던 남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투명하게 고여 있다. 맑은 물길이 그치지 않는 한, 백운산 자락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음료와 술은 앞으로도 우리의 지친 삶을 다정하게 적셔줄 것이다.
[다음 회 예고]
[길 위의 광양사(史) — 제6부 광양의 문화] 53회: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골목 안 방앗간의 수려한 김과 쌀가루, 그리고 막걸리 발효의 미학 — ‘광양의 먹거리와 방앗간, 그리고 향토 떡 기정떡(증편) 문화’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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