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의 시간을 견뎌온 마로산성 성벽이 산등선이를 따라 굳건하게 뻗어 있다. 굽이진 성곽의 돌들에는 산자락 아래 터전과 공동체의 안녕을 지키고자 했던 고대 광양인들의 간절한 약속이 층층이 쌓여 있다. 사진=문성식

3: 마로산성(馬老山城)…돌로 쌓은 경계와 지키려는 마음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1500년 전 ‘수호’가 오늘날의 ‘평안’에게 말을 걸다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용강리 고인돌을 통해 고대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한 땀 한 땀 돌을 쌓아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광양읍 북쪽, 해발 208.9m의 나지막한 마로산 정상에 자리 잡은 ‘마로산성’입니다.

‘마로(馬老)’라는 이름에 담긴 뜻밖의 비밀

우리 광양의 옛 이름이 ‘마로(馬老)’였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백제 시대에는 마로현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때 ‘희양(晞陽)’을 거쳐 고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광양(光陽)’이라는 이름을 얻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 이름들이 모두 일맥상통한다는 점입니다. ‘마로’는 우리 고어로 ‘마루’ 혹은 ‘높은 곳’을 뜻합니다. 즉, ‘으뜸가는 곳’이라는 의미지요. 희양과 광양 역시 ‘빛이 찬란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을 뜻합니다. 북쪽의 백운산이 찬 바람을 막아주고 남쪽의 따뜻한 해류가 온기를 전하는 우리 고장의 천혜적인 환경을 조상들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름 속에 담아두었던 셈입니다.

백제의 남쪽 끝, 왜 이곳에 성을 쌓았을까?

마로산성은 백제가 가야와 신라의 세력을 견제하고 광양만권을 통치하기 위해 축조한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은 형태) 석성입니다. 성곽 정상에 서면 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장관 너머로 남쪽으로는 광양만과 순천왜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섬진강 하구가 보입니다. 1500년 전 백제 사람들에게 이곳은 최고의 ‘관측소’였습니다.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외적을 감시하고, 육로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산성 길을 걷다 만난 용강리 주민 B씨는 “어릴 때는 저기가 그냥 뱀 나오고 풀만 무성한 산성인 줄 알았지, 이렇게 대단한 곳인 줄 알았겠느냐”며 웃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공원처럼 깨끗해져서 올라가면 기분이 참 좋다. 우리 광양 전체가 발아래 있는데, 옛날 장군들도 여기서 우리처럼 광양만을 보고 있었겠지 싶어 가끔 뭉클하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성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린 백제 특유의 석축 기술이 보입니다. 거친 돌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그 틈새마다, 내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당시 민초들의 땀방울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마로산성 중심 터를 걷다 보면 고대 축성 기술의 정수를 마주하게 된다. 둘레 550m, 폭 5.5m의 성벽은 별도의 기단 없이 암반 위까지 파고 쌓은 협축식(夾築式) 구조다. 특히 외벽을 수직에 가깝게 쌓고 북벽 기저부를 점토로 다져 보강한 흔적에서 1500년 전의 치밀한 수호 의지가 읽힌다. 사진=문성식
산성 터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들. 특히 ‘마로(馬老)’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이곳이 삼국시대 광양의 행정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이자, 잠들어 있던 1500년 전의 시간을 깨우는 역사의 조각들로 보인다. 사진=문성식
마로산성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원형 집수정의 모습. 바닥을 점토로 다지고 돌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이 시설은 백제와 신라를 거치며 개보수된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의 고도화된 수리(水利) 기술과 성곽 관리 체계를 증명한다. 사진=문성식
마로산성에서 출토된 단일 유적 전국 최대 규모의 토제마 군(群). 갈기와 마구가 정교하게 묘사된 이 유물들은 고대 광양의 제사 의식뿐만 아니라, 이곳이 대규모 군사력이 집결했던 남해안의 핵심 요충지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사진=광양시

300여 점의 흙말(土製馬)이 들려주는 간절한 마음

마로산성 발굴 조사에서 세간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300여 점에 달하는 ‘토제마(흙으로 빚은 말)’였습니다. 단일 유적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이지요. 정교하게 갈기와 마구까지 묘사된 이 인형들은 특이하게도 대부분 목과 몸통이 분리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대인들에게 말은 현세와 내세를 잇는 영험한 동물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나 바다 너머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실제 말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흙으로 정성껏 말을 빚어 제사를 지낸 뒤 그 영험함이 성 안에 머물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부러뜨려 묻었습니다. 성을 지키는 것은 군사의 힘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의 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부러진 흙말 이야기를 듣더니 “자식 잘되라고 정성 들이는 부모 마음이나, 나라 지키겠다고 흙말 빚던 옛날 사람 마음이나 다를 게 없다”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이처럼 마로산성은 단순히 돌덩이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간절함이 쌓인 곳입니다.

철(鐵)의 도시 광양, 그 풀무질 소리의 기원

오늘날 광양이 세계적인 철강 도시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로산성 유적지에서는 고대 만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토기류, 기와류, 청동기류, 철기류, 자기 등 다수가 출토되었습니다.

백운산에서 채굴한 사철(砂鐵)을 뜨거운 불길 속에서 녹여내어 도구를 만들고, 이를 해로를 통해 수출하며 부를 축적했던 고대 광양의 역동성. 2000년 전 그 뜨거웠던 풀무질 소리는 오늘날 광양제철소의 거대한 고동 소리로 변주되어 우리 곁에 흐르고 있습니다. 마로산성은 바로 그 소중한 ‘기술’과 ‘풍요’를 지켜낸 든든한 방패였습니다.

발아래로 시원하게 펼쳐진 광양 시가지. 산성 위에서 도심과 멀리 남해 바다까지 한눈에 조망되는 이 탁월한 시야는, 고대 광양인들이 왜 이곳에 성을 쌓고 공동체의 안녕을 살폈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한다. 사진=문성식
마로산성으로 가는 첫 관문인 억만(億萬)마을 입구. ‘억만금의 보화가 모이는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그 이름처럼, 예부터 이곳은 성을 오가는 사람들과 물자가 넘쳐나던 활기찬 삶의 시작 점이었을 것이다. 사진=문성식

“성벽은 단절이 아닌 ‘약속’입니다”

성(城)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가로막는 벽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로산성의 성벽을 가만히 만져보면 이것이 ‘단절’이 아닌 ‘약속’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이곳을 지켜내자”는 약속, “이 안에서는 당신이 안전할 것”이라는 약속 말입니다.

돌 하나하나를 정성껏 쌓아 올린 저 성벽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오늘 누구의 곁을 지켜주고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의 성벽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가장 단단한 성벽은 돌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로산성은 치열한 전쟁터가 아니라 시민들의 아늑한 산책로가 되었습니다. 발아래 펼쳐진 광양 시내와 멀리 보이는 제철소의 불빛을 보며, 과거의 성곽과 현대의 공장이 ‘수호’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가장 단단한 성벽은 돌로 지은 성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켜주겠다는 마음의 약속이다.’

성벽 길 위에서 미래를 보며, 다음 여정은 삶을 지킨 성벽에서 이제는 죽음 너머 영원을 바라보았던 고대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마로산성 주소: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 산 78번지 외 1 (들어가는 길- 억만마을)

[다음 회 예고] 제4회: 불로문(不老門)과 고분군 – 죽음 너머를 꿈꾼 고대 광양인들의 내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