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억불봉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금호그라운드골프회 여순유적지 답사팀. 사진=이경희
섬진강 옆 전망 좋은 카페 앞에 선 금호그라운드골프 회원들. 사진=이경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금호 그라운드골프 회원들. 사진=이경희
포스코 동우회 금호그라운드골프회(회장 이만용) 회원 22명이 15일 여순사건 광양 유적지 동부권 8개소를 답사했다. 백운산 4대 계곡 중 가장 깊고 험한 금천계곡의 다압북국민학교 터 유적지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이경희
포스코 동우회 금호그라운드골프회(회장 이만용) 회원 22명이 15일 여순사건 광양 유적지 동부권 8개소를 답사했다. 참가자들이 어치 느재마을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이경희

포스코 동우회 금호그라운드골프회(회장 이만용) 회원 22명이 15일 여순사건 광양 유적지 동부권 8개소를 답사했다.

동우회원은 1940년대에서 50년대 출생자들로 ‘여순반란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특히 2021년 국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이 의결 시행돼 올해 8월 말까지 희생자와 피해 유족들의 신고를 받아 심사 결과에 따라 명예회복과 보상이 진행 중인 사건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 일부 장병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파병 명령을 거부하면서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 그러나 진압군에 밀려 일부는 지리산으로 일부는 광양을 거쳐 백운산에 은닉하면서 1955년 4월 1일까지 6년여에 걸쳐 많은 인근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더구나 6.25사변이 겹치면서 사건은 더 확대돼 희생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광양에서는 1948년 10월 20일 순천에 파견된 경찰 여러 명이 희생되고, 광양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20여 명의 좌익혐의자를 반송재로 끌고 가 사살한 것이 시작이었다. 10월 22일에 마산에 주둔하던 15연대가 광양으로 출동하던 중 솔티재에서 연대장이 체포될 정도로 군인들의 희생이 컸고, 1949년 9월 빨치산들의 관공서 1차 습격 때, 군청에서는 경찰과 군인들의 희생도 많았던 사건이다.

이날 답사는 광양의 유적지 18개 중 동부권 8개소로 오전 9시부터 신구리 구동마을, 옥룡지서와 어치 느재마을과 매티재를 거쳐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일행과 동행 했던 정신화 목사님이 경치 좋은 카페에서 모두에게 커피를 대접해 더욱 의미가 컸다.

오후에는 다압지서, 다압 북초등학교 터와 봉강 북초등학교 터를 지나 솔티재를 거쳐 귀가했는데 해설사는 “오늘 뜻깊은 답사였고 앞으로 ‘여순 반란 사건’이라는 말보다는 ‘여순사건’이라고 쓰자”는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답사 중 한 참여자는 “여순사건으로 광양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해설사는 여순사건의 시작은 여수지만 진압군에 밀려 순천을 거쳐 일부는 지리산으로 일부는 광양을 거쳐 백운산에 은닉하면서 추운 날씨에 먹고 입을 것을 조달하는 과정에 인근 마을의 피해가 컷다고 했다. 또 1949년 9월과 1951년 1월 두 차례에 걸친 빨치산의 관공서 습격 사건으로 관공서가 불타고 서류도 많이 소실되었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많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만용 회장은 “오늘의 답사는 지금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여순사건의 진실도 알게 돼 매우 뜻깊고 유익한 답사였다”고 했다.

한편 여순사건 광양 연구회는 광양시와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아 유적지 답사와 함께 학교 교육과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 교육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