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산성 연혁 리플릿, 자료=광양시
24년 늦가을 마로산성 파노라마. 저 멀리 백운산 정상에 첫 눈이 쌓였다.  사진=한재만
24년 9월 하순 마로산성, 외벽을 파노라마로 표현했다. 사진=한재만
24년 9월하순 마로산성, 성 안에서 성벽을 파노라마로 표현했다. 사진=한재만
24년 9월하순 마로산성 왼쪽편의 내벽·외벽을 표현한 파노라마 전경 . 사진=한재만
25년 5월중순 마로산성내 곳곳에 ‘건물지’ 가 보이는 파노라마 전경. 사진=한재만
24년 9월 하순에 촬영한 성내 집수정, 파노라마. 중앙에 움푹 파이고 물이 고인 곳이 집수정이다. 사진=한재만
성내 남문지 옆 건물지 부근에 잔해들이 보인다, 오른편 끝 부분이 마로산성 벽이다. 사진=한재만

광양시는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넘어,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백운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이 땅에는 삼국시대 성곽부터 통일신라 사찰, 장인의 숨결이 깃든 무형유산, 천연기념물 숲까지 다채로운 문화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광양 곳곳에 남아 있는 국가지정유산을 살펴보고, 우리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6편의 연재를 마련했습니다. 각 편에서는 역사적 의미와 아름다움을 담은 문화유산을 돌아보며, 광양의 새로운 매력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싣는 순서]

1편 : 광양마로산성

2편 : 광양옥룡사지

3편 : 천연기념물 광양 옥룡사 동백나무 숲

4편 : 국가무형유산 장도장(粧刀匠)·보유자 박종군

5편 : 광양읍수와 이팝나무, 유서깊은 마을 숲

6편 : 국가지정유산·중흥산성 삼층석탑

광양시내에는 마로산성, 불암산성, 봉암산성(백제시대 석성)과 중흥산성(고려시대 석성)등 4개의 주요 산성이 있다. 이 산성들은 백제와 고려시대의 역사적 유적이다.

광양마로산성(光陽馬老山城)은 광양읍 마로산 정상부에 위치한 “테뫼식 석성”이다. 백제시대(약 600년경)에 축성된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 꾸준히 이용됐다. 산성안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토기 및 “마로(馬老)·관(官)·군역관(軍易官)” 등의 글자가 있는 기와가 발견됐다. 광양의 옛 이름이 마로현으로 이 성은 마로현의 중요 행전관청이 있던 곳이었을 가능성과 행정관청을 방어하던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국가유산청은 설명하고 있다.

테뫼식’은 산의 정상부나 능선을 따라 띠를 두르듯이 산성(山城)을 쌓은 형식을 뜻한다. ‘뫼’는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테’는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산꼭대기 둘레에 쌓은 성곽이라 뜻한다.

마로산성(馬老山城)”은 국가사적 제 492호로 2007년 12.31일 지정됐다. 위치는 광양읍 용강리 산78번지 외, 산성(山城)은 해발 208.9mh의 마로산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머리띠식) 석성이다. 형태는 남·북측이 길쭉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6세기 중엽을 전후한 백제시대에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되어 왔다. 임진왜란때는 관군과 의병이 보수하여 광양만 전투에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성의 형태는 자연 지형을 이용한 남-북 측이 길쭉한 사각형이며, 규모는 둘레 550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 1~2m, 면적 18,945㎡로서 성벽, 망루, 건물지, 우물터 등이 조사됐다.

또한 광양의 백제시대 지명인 마로현의 치소(治所)였거나 치소의 방어시설로 추정된다. 산성내에서는 마로(馬老), 관(官), 군역관(軍易官) 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치소(治所)는 어떤 지역에서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이 있는 곳이다.

1998년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정밀지표 조사와 이후 5차례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다량의 기와류와 토기류를 비롯하여 흙으로 빚은 수통, 석환(전투용 주먹 돌)이 출토됐고, [馬老·官·軍官]등의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도 여러점 출토됐다. 또한 산성의 남쪽과 북쪽 모서리에 주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건물지 2곳과 다양한 형태의 건물지·우물지 등이 확인됐다.

산성의 문지’는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물자를 운반하는 곳이다. 한편으론 방어상의 취약점이 노출되어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문의 위치는 통행에 편리한 곳 만을 선택하지 않고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입지를 선택한다.

마로산성 문지의 입지는 주로 능선을 택하되 능선 정상부에서 약간 비켜선 방향에 성문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위치는 출입이 편리한 곳에 성문을 만드는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 등과는 크게 다른 것으로, 삼국시대 산성의 경우 출입보다는 방어에 유리한 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

동문지(東門址)”는 사곡 억만마을에서 산성의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노출된 문지의 규모는 안쪽 너비 420cm, 바깥쪽 너비 560cm이고, 문의 길이는 590cm, 폐쇄석의 높이는 110cm이다. 문지의 북쪽 개구부의 외벽 상부는 후대에 한번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하부에는 3단의 석축열이 성벽과 나란히 쌓여지다가 폐쇄석과 북쪽 개구부가 접히는 지점에서 만나고 있어 폐쇄석이 축조된 후 덧붙인 것으로 파악된다.

남문지(南門址)”는 능성의 정상부에서 계곡 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출입의 용이함 보다는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지의 규모는 안쪽 너비 350cm 바깥쪽 너비 500cm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보다 약간 긴 680cm이다. 문지의 서측벽 최고 잔존높이는 10단 170cm이고, 면석은 앞면이 편평한 장방형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

동측벽의 길이는 570cm이고 문지의 개보수에 의해 상부가 유실되었다. 개구부에는 동·서 측벽 바닥부에 주공이 약 100cm 간격으로 정연하게 노출되었고, 주공의 지름은 30~46cm이며, 깊이는 24~50cm이다. 문지 외부에는 560×670cm 규모의 장방형 석축열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이 석축시설을 제거한 부분에서는 많은 수의 주공열을 확인하였다.

마로산성의 제사유구는 공반 유물상으로 보면 마로산성이 성곽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이후의 고려말에서 조선 초(14~15세기)에 해당된다. 제사유구의 입지가 광양의 중심적인 광양읍이 내려다 보이는 산성의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서 고려 말~조선 초에 고을의 안녕과 관련된 제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제사유구(祭社遺構)”는 Ⅲ-1 건물지의 북서쪽으로 640(동-서)×400(남-북)cm 범위 내에서는 토제마 204점, 청동마 7점이 출토되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무질서하게 흩어진 상태인데 대부분 다리·머리·몸통이 분리된 채로 출토되었다. 공반 유물에 있어서는 청자와 분청사기편이 공반되고 있어 시기적으로 산성내에서 가장 늦은 시기 유구로 판단된다.

마로산성(馬老山城)”성벽(城壁)둘레는 550m 정도로 이 가운데 외벽 약 65m, 내벽 약135m 구간을 노출시켜 조사하였다. 성벽은 내·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았으며, 체성의 너비는 550cm 정도이다. 성벽에 사용된 석제는 상·하의 크기에 차이가 없으며 석재 사이의 공간은 쐐기돌로 사용하여 메꿨다. 또 석재의 고른면을 밖으로 하여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성벽이 진행하는 방향의 경사가 심할경우 수평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깎아 수평을 유지하여 성벽이 낮은 쪽으로 휩쓸리지 않도록 고려했다. 이러한 축조 상태를 보면 성벽은 백제시대 산성 축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부분적인 보수 흔적이 있다.

건물지(建物址)”는 Ⅰ-1·2, Ⅱ-1~4, Ⅲ-1 등 6개소이다. 아래설명 글은 (1-1·2)건물지 글이다. 건물지Ⅰ-1은 성내 가장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 600cm, 남-북 680cm 규모의 기단부만 남아있다. 북쪽의 기단부는 2중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모서리에 각을 둔 것이었으나 덧 이으면서 각을 죽여 둥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처리하였다.

건물지Ⅰ-1은 동-서 940cm, 남-북 13.5m 규모의 기단부를 중심으로 그 내부에 2차례에 걸쳐 건물지가 중복되었다. 기단부는 최고 4단까지 남아 있고 높이는 86cm이다. 1차 건물지는 현재 초석4매가 노축되어 있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소형 건물지로 추정된다.

초석의 크기는 80X70X20cm 정도이고, 초석 간의 간격은 230~250cm로 일정하지는 않다. 건물지 내에서 방형 동경, 남석재 소호(小壺)가 출토되었다. 2차 건물지는 적심이 8개소가 확인되고 있어 정면 4칸(주칸거리 190cm), 측면 3칸(주칸거리 230cm)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적심의 직경은 90~110cm이다. 건물지 내에서는 2점의 동경을 비롯하여 철재솥, 철부, 청동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기록되어 있다.

집수정 사진. 식수용 우물1호 와 집수정 1~5호. 자료=광양시

원형집수정(圓形集水井)” 성(城)에서 식수 및 용수의 확보를 위해 꼭 필요한 시설이다. 원형집수정은 2호·3호·4호와 우물1호로 총 4기가 있다.

집수정 2호’는 마로산성의 축성과 동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규모는 상부 직경 610cm, 바닥직경 440cm, 깊이 300cm이다. 축조방법은 암반층까지 굴광을 한 후 성벽 축조에 사용된 석재와 동일한 할석을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하였고, 석축과 굴광의 사이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이용하여 다짐하였다. 출토 유물은 백제토기와 기와이다.

집수정3호·4호’는 계단식 원형으로 축조되었다. 3호의 경우 규모는 상부직경 810cm, 바닥직경 400cm, 깊이 370cm이고, 축조방법은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하여 4단으로 수평쌓기 하였다. 3호는 내부에서 두시기에 걸친 목재 구조물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출토유물은 통일신라시대 인화문 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축조시기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물1호’는 소형으로 집수정 2호 내부에 축조되었다. 규모는 직경 140cm, 깊이 320cm이고, 축조방법은 할석과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수평쌓기 하였다. 출토유물은 통일신라시대 토기와 기와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9세기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우물 1호는 바닥에서 물이 새어 나고 있어 9세기대에 주 식수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