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음력 4월 9일(양력 5월 16일)은 광양현감 어영담이 서거한 지 43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화 ‘한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을 소개 받고, 1590년대 남해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 수많은 영웅들을 알게 됐고, 까마득히 먼 옛날 그들의 희로애락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난중일기에서 광양현감 어영담과 수많은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혼신을 다해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삶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그림을 애써 담담한 수채화처럼 꺼내 보고자 합니다.
[싣는 순서]
제1편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①] 과거로부터의 영웅 초대
제2편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②] 영웅들의 만남
제3편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③] 영웅들의 활약
제4편 [난중일기와 광양현감 어영담④] 영웅은 시대를 넘어
번외편 [난중일기를 읽고] 영웅을 기다리며…
1532년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어영담(魚泳潭)을 현대사회 대중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 시킨 것은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다. 광양현감 어영담 역은 국민배우 안성기가 맡았다. 이는 영화에서 어영담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인터넷에 떠도는 영화평론은 대부분 “배우 안성기가 영화 한산에서 묵직한 참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어영담은 모든 이들이 존경하는 스승이자, 나라를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는 우직한 성격의 장수다. 안성기는 어영담을 통해 국민배우의 위엄을 빛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진정한 어른이 어떤 모습인지 깊이 있게 보여주고, 진심 어린 연기를 통해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전투 속에서도 패기 넘치는 모습부터 품격 있는 모습까지 그려내며 ‘한산’의 중심을 제대로 잡았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고 했다. 오래전 사람인 광양현감 어영담은 어떤 매력을 가졌길래 당시대의 이순신 장군에게는 물론 현대인에게까지 칭송받는 것일까.
우선, 이순신 장군 성품에 관한 흥미 있는 자료가 있다. 서예가 김용신 교수와 심리학자 홍기원 교수는 ‘이순신의 서체와 성격분석’이란 논문에서 “이순신은 보수적이며 곧았고, 예민한 감성적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리더십 상황에 대해 “사교적·친화적이라기보다 선호하는 인물들과 원만했던 강직한 성품의 원칙주의자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공격적이던 성격이 자라면서 순화되고, 생애 전반기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성숙해진 성격과 리더십이 후반기의 위대한 성공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데이터에 따르면, 난중일기는 1592년 음력 1월 1일부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서거하기 2일 전인 1598년 음력 11월 17일까지 쓴 친필일기다. 난중일기에서 내용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여부를 따지지 않고 광양이 언급된 기록을 찾았다.
난중일기 전체 기록에서 광양과 관련된 내용은 총 111건이다. 이 가운데 어영담의 후임 광양현감에 대한 기록은 약 4년 6개월간 고작 13건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난중일기를 쓰기 시작한 1592년부터 1594년 음력 4월 9일 광양현감 어영담이 서거하기까지 829일 중에서 78회나 언급됐다. 전투수행을 함께 했어도 일기를 쓰지 못해 수치에 포함되지 못한 날을 감안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은 최소 10.6일에 한번은 어영담 현감과 함께 있었다는 의미다.
국가존망이 목전에 닥친 급박한 국가비상 사태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리더가 시간관리를 어떻게,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가는 일의 성패와 직결된다. 특히 원칙주의자인 이순신 장군에게는 도모하는 일의 성사를 위해서라도 광양현감 어영담과 같은 다재다능한 무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왕명에 의해 지방을 다스리던 수령은 백성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탐관오리가 발호하기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권력남용과 수탈이다.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불똥이 어떻게 튈 줄 모르기 때문에 일단 관청을 멀리하는 건 당연한 처세다. 그럼에도 광양현감 어영담의 인간성이 돋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웅천해전은 1593년 2월 10일부터 1593년 3월 6일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지금의 진해 웅포 해안에 위치했던 왜군을 공격한 해전이다. 광양현감 어영담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웅천해전에 출전했다. 여기서 왜적선 절반과 무수한 왜군을 없앴고, 수군과 양민 6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 때 독운어사(督運御使, 세금, 곡식 및 군량미 등의 수송을 감독하는 어사. ‘조선시대 어사의 구분’, 김치연 상명대 교수) 임발영이 광양현을 감찰했다. 임발영은 창고에 쌓인 600석의 양곡이 장부에 기재된 수량보다 많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조정은 1593년 11월 어영담을 파직시켰다.
임진장초(壬辰狀草,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 문화재청 문화유산데이터)에 따르면, 광양현 백성 김두 등 126명이 어영담 현감의 양곡비축 사건이 잘못됐다는 호소문을 이순신 장군에게 올렸다. 당시 백성들의 이런 행위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광양현감 어영담이 선정을 펼쳤다는 얘기다. 이에 공감한 이순신 장군은 광양현감을 유임시켜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그 결과 난중일기 1593년 음력 5월 28일 광양현감을 유임시킨다는 비변사의 공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어영담 현감은 같은 이유로 좌의정 윤두수에 의해 또 다시 문제가 제기됐다. 이순신 장군은 또 다시 구명을 요구하는 장계를 조정에 올리면서, 어영담 현감을 조방장(助防將, 최고 장수를 돕는 역할, 현재의 참모장. 한국고전용어사전)으로 임명해 주기를 청했다. 이에 어영담은 서거하기 전까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어영담은 전과를 세운 공적이 인정돼 선무공신에 책록됐다.
어쨌든 이 두 사건을 얼핏 보면 어영담 현감은 억울하다. 그러나 역사를 오도하는 간교한 작위가 있었다. 관료인 임발령은 좌우 사정에는 관심 없고 원칙에 어긋나면 무조건 잘못됐다는 한건주의 성과가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다는 신념이 있었다. 좌의정 윤두수는 어떻게든 이순신을 잡아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이 두 신념의 잘못된 만남이 불행의 서막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독운어사 임발영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종묘사령으로 종묘 신주를 두 손으로 모시고 왕을 의주까지 호위했다. 이에 왕이 크게 감복해 손을 잡고 치하하고, 그날 단독으로 무과를 보게 했다. 1593년 운량사(運糧使)로 군량수송에 공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다.
위키백과를 보면, 좌의정 윤두수는 이황 문하에서 동문 유성룡은 동인이 되나 서인을 선택했다. 원균과 친척이다. 임진왜란 중 원균을 옹호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가 ‘원균 띄우기, 이순신 죽이기’에 빠졌다고 평가한다. 동생 윤근수와 함께 원균을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적극 후원했다.
또한, 선조30년 1597년 1월 27일(선조실록 84권), 어전회의에서 윤두수는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파직) 시켜야 할 듯합니다”라고 아뢴다. 이외에도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예전에 이순신이 남원에서 군사를 모집하다가 병방(兵房)을 참(斬)하여 백성들의 곡성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라고 원균 끼워 팔기 언사와 부정적인 발언을 했다.
역사의 긴 호흡에서 보면 이들의 목표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러다 원균의 대참변으로 부랴부랴 이순신 장군을 복귀시켰다. 예비역 육군대위 황서진이 유튜브 ‘러셀TV’에서 이순신 장군의 계급을 정리한 내용이다. 모함으로 세 차례나 강등을 당했다. 광양현감 어영담 또한 억울하다고 볼 수 있는 강등이 두 차례다. 마지막은 서거 한 달도 안 된 시점이라는 데 눈길이 걸린다.
그 당시 원균은 ‘명장 중에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이순신은 ‘조정을 경멸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치지 않은 건 나라를 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챈 죄’ 등으로 파직되고 체포된 후 한양으로 압송돼 문초를 겪었다. 극과 극이다.
세월이 흘러 2014년과 2019년 한국갤럽연구소의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이순신 장군이 계속해서 1위를 했다. 반면, 원균은 황현필의 한국사 강의에서 ‘우리 역사상 최악의 인물 5인’ 중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 역시 극과 극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있을 때는 왜적을 서해바다로 진출 못하게 막아 전쟁을 멈추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공중분해 시켜버렸다. 국가 시스템을 망치고 일본이 서해로 가는 계기가 돼 정유재란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 이때 일본군은 예전과 달리 잔혹한 살육전을 전개해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일본에 있는 코무덤이 이때 생긴 것이다. 이게 다 원균 덕분(?)이라는 것이다.
일반인은 고비를 한 번만 당해도 기력이 다하지만, 영웅들은 당할수록 무심해지는 모양이다. 일반인은 사적으로 경천동지하고, 영웅은 공적으로 경천동지한다. 현대인에게 영웅들이 어필되는 것은 어쩌면 능력과 성품을 갖추고 우직하게 목표를 향하는 모습에서 이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찾기 때문은 아닐까.
[난중일기, 1592년 : ‘광양현감 어영담’ 관련 기록]
▶1592년 1월22일. 맑다 [양력3월5일] 아침에 광양현감(魚泳潭)이 와서 인사했다.
▶1592년 1월27일. 맑다 [양력3월10일] 오후에 광양현감이 왔다.
▶1592년 4월9일. 아침 흐리고 저녁 맑다 [양력5월19일] 광양현감이 수색에 대한 일로 배를 타고 왔다가 저물어서 돌아갔다.
▶1592년 4월29일. [양력6월8일] (장계에서) …중부장(中部將)에 광양현감 어영담… (*장계 : 조선시대 지방에 있는 관리가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1592년 5월3일.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양력6월12일] 경상 우수사의 회답편지가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과 흥양현감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던 중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1592년 5월4일. 맑다 [양력6월13일] 먼동이 틀 때 출항했다. 미조항 앞바다에 이르러 우척후 김인영, 우부장 김득광,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정운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로 들어가서 수색하여 토벌케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평산포, 곡포, 상주포를 아울러 미조항에 가도록 하였다.
▶1592년 7월8일. [양력8월14일] (장계에서)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 현자, 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2~3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여 물러났습니다.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웠습니다.
광양현감 어영담도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1척을 쳐부수고 왜장을 쏘아 맞혀 내 배로 묶어 왔습니다. 문초하기 전 화살을 맞아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아 수급을 베었습니다. 다른 왜적 수급 12급을 베고, 백성 1명을 구출했습니다.
▶1592년 9월11일. [양력10월15일] (장계에서) …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권준, 이순신(李純信), 어영담(魚泳潭), 배흥립, 정운 등과는 함께 같이 죽을 것을 기약하고,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고 계획을 세워 추진했습니다.
▶1592년 9월25일. [양력10월29일] (장계에서) … 순천부사, 낙안군수, 광양현감 어영담, 흥양현감 등도 수군 위부장으로서 본영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사변에 대비하면서… 별도로 쌓아 둔 군량과 군기 등 물품을 그들의 배에 싣고 각 고을에서 자원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맡겨 보냈습니다. (*의병들에게 군량미 등을 보냈다는 의미)
【참고자료】
▷난중일기, 다빈치 지식지도, www.davincimap.co.kr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012
▷임진장초, 충무공 이순신, 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sillok.history.go.kr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참신한 정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