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 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스승의 향기를 쫓아 멈춰 선 발걸음
지난 회차에서 우리는 광양의 큰 별, 신재 최산두 선생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돌아보았습니다. 15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결코 붓을 놓지 않았고, 그 인고의 시간은 호남 유학의 찬란한 꽃을 피워내는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이 떠난 뒤, 그 매운 선비 정신은 어디에 머물렀을까요? 오늘 찾아갈 봉양사(鳳陽祠)와 그 뿌리인 신재서원은 후학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마음을 모아 세운 ‘기억의 집’입니다.
광양 선비들의 자부심, 봉양사의 시작
광양읍 우산리에 자리한 봉양사는 최산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이 집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여 년이 지난 1578년(선조 11)의 일입니다.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정숙남이 선생의 높은 학문과 꺾이지 않는 절개를 후세에 전하고자 뜻을 냈고, 지역 유림들이 정성을 보태 사당을 세웠습니다.
‘봉양(鳳陽)’이라는 이름에는 봉황이 아침 해를 향해 날아오르듯, 광양의 인재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밝게 빛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후 이곳은 단순한 사당을 넘어 광양 사림의 구심점이 되었고, 훗날 ‘신재서원’이라 불리며 지역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훼철의 아픔을 딛고 다시 세운 ‘예(禮)의 마당’
서원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시절 대대적인 철폐령을 맞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신재서원 역시 이때 헐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광양 유림들에게는 기둥 하나, 기와 한 장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광양의 정신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광양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건물은 사라졌어도 선생을 기리는 마음은 대를 이어 전해졌고, 1977년 지금의 자리에 봉양사(鳳陽祠)를 다시 복원해 냈습니다.
현재 이곳은 과거 서원의 강학 공간이었던 ‘재(齋)’의 형태를 대신해, 사당을 호위하듯 서 있는 내삼문과 부속 건물들이 그 엄숙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머물던 ‘양사재’나 공부하던 ‘덕성재’의 기능은 이제 인접한 광양유림회관(흥학재)과 사당 앞마당으로 이어져, 여전히 광양의 선비 정신을 길러내는 살아있는 배움터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옛 서원 전체의 규모는 아닐지라도, 정갈하게 정돈된 사당의 기와선과 마당은 옛 선비들의 수양 문화를 고스란히 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니어 기자의 시선, “먼저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
봉양사 경내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글귀들이 있습니다. ‘양사(養士)’는 선비를 기른다는 뜻이고, ‘덕성(德成)’은 덕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학교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를 가르친다면, 이곳 봉양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는 곳입니다.
사당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됩니다. 그것은 평생을 청렴하게 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진심’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니어 세대가 손주들에게 전해줘야 할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지식보다 앞서는 것은 염치(廉恥)를 아는 마음이고, 성공보다 소중한 것은 사람 사이의 도리(道理)를 지키는 일입니다.
마을 속에 흐르는 공부의 흔적, “큰 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복”
봉양사 주변을 걷다 보면 이곳이 단순히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박힌 ‘정신적 기둥’임을 알게 됩니다. 향교와 서원이 이웃해 있어 인근 마을 이름에도 ‘교촌’이나 ‘서원’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동네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그가 그냥 제사만 지내는 디가 아녀. 옛날부턴 이 앞을 지날 때 다 말에서 내리고 큰소리 한 번 안 냈당깨, 저 안에 계신 어른에 대한 도리지, 요즘 애들도 여그서 절하는 법도 배우고 글도 읽고 하믄 참 좋을 텐디…. 사람 사는 동네에 이런 ‘큰 어른’ 한 분 모시고 산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 줄 몰러.“
마치며, 문은 닫혀 있어도 향기는 퍼지니
현재 봉양사는 제례 때가 아니면 문이 굳게 닫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담장 너머로 전해지는 묵직한 적막함 속에는 500년을 이어온 광양의 선비 정신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서원 마당의 소나무가 사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듯, 최산두 선생이 꿈꿨던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이곳 봉양사 기와 끝에 여전히 매달려 있습니다. 서원 문 앞 잔디밭에는 어느새 노란 민들레가 피어나 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다음 제14회 예고
이제 사당을 나와 선비들의 실제 생활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봉강과 옥룡의 산자락에 숨겨진 오래된 집들, 그 공간 속에 담긴 선비들의 철학과 질서를 찾아 ‘광양의 고택들’로 길을 나섭니다.
[참고 정보]
위치: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59-1 봉양사
특징: 최산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광양 사림의 정신적 고향.
주변 볼거리: 유림회관, 광양향교와 인접한 ‘광양 역사 산책로’의 핵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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