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에 몰입하다 보면 끼니를 놓치기 일쑤지만, 사람의 이야기가 끝난 뒤 찾아오는 허기는 늘 정직합니다. 이때 마주하는 한 끼의 밥상은 취재의 마무리가 아닌, 현장의 온기를 체감하는 또 다른 시작입니다. ‘취재하다 만난 광양의 밥상’은 일부러 찾아간 맛집이 아닌, 마을 골목과 삶의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한 음식들을 기록합니다. 화려하진 않아도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과 혼자서도 어색하지 않은 자리, 그 속에서 말없이 오가는 투박한 정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들이 광양의 소박한 풍경을 깨우고,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확인하는 정겨운 이정표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날은 광양향교가 자리한 광양읍 우산리 일대를 취재했다. 향교는 단순히 글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와 예를 가르치던 공간이다. 마루에 앉아 한참을 둘러보다 보니, 예를 배우던 선비들의 자취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가까워졌다. 서둘러 밥집을 찾았다. 오늘은 지난번 눈여겨보았던 예구마을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황토로 지은 옛집 모양의 식당, 이름도 정겨운 ‘구름에 달 가듯이’였다.
문득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가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교실 앞에 붙여놓고 외우게 하던 시였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손바닥을 맞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만은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그 시구는 그 시절의 풍경처럼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식당 안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탓인지 한결 한산했다. 몇몇 시니어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젊은 두 사람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메뉴판을 보니 보리밥 정식은 2인 이상 주문이 가능했다. 혼자라는 사정을 말하자 여주인은 “수제비를 드시면 보리밥을 조금 드릴게요”라며 웃으며 권했다. 그 말 한마디가 정겨웠다.


잠시 후 상 위에 보리밥과 나물이 먼저 놓였다.
봄동 겉절이와 머위대 나물이 함께 올라왔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한 숟가락 입에 넣자, 봄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계절은 이미 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압에서는 매화축제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봄은 그렇게 밥상 위에서 먼저 찾아온다.
식당 한쪽에서는 백발의 시니어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모습도 보인다. 그 모습 속에는 세월을 지나온 사람들만이 가진 여유가 묻어 있다. ‘봄날은 간다’는 말처럼, 시간은 흐르지만 사람들의 온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
잠시 후 큼지막한 그릇에 수제비가 나왔다.
바지락이 들어간 국물은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났다.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을 뜨니, 취재로 지친 몸이 풀리는 듯했다. 수제비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오래된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19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취로사업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면 품삯 대신 밀가루를 받아오던 시절. 그 밀가루로 가장 많이 해 먹던 음식이 바로 수제비였다. 반죽을 묽게 하여 끓는 가마솥에 손으로 떼어 넣던 어머니의 손놀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호롱불 하나 켜진 어두운 부엌에서, 어머니는 손끝 감각만으로 반죽을 떼어 넣었다. 얇고 고르게 퍼지는 수제비는 그 자체로 정성과 기술이었다. 그 시절 수제비는 가난의 음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옆자리의 젊은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간다. 옷차림으로 보아 아마도 일터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이다. 늦은 점심이지만, 한 숟가락 한 숟가락 힘 있게 먹는 모습에서 삶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문득 어린 시절 논을 갈고 돌아온 소가 여물을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힘껏 일하고 나서 먹는 한 끼는 그 자체로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다.
지금의 사회는 바쁘고 치열하다.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키우고, 끝없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시니어의 나이가 되어 돌아보면, 그렇게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꼭 전부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금 천천히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사는 삶, 서로를 기다려주고, 함께 가는 여유. 인디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 멈춰 서서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너무 빨리 가면 마음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제비 국물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어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은 삶. 다른 사람을 기다려주고, 서로를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향교에서 배운 것은 글이 아니라 사람의 도리였다.
예를 알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그것이 오래 이어진 이유일 것이다.
따뜻한 수제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도 취재하다 만난 광양의 밥상은, 그렇게 사람의 온기와 삶의 여유를 조용히 전해주고 있었다.
※ 구름에달가듯이 식당: 전남 광양시 광양읍 옹기길 1 (전화 061-762-9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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