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산성 아래 마을 주택가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전경. '마로낙조' 는 마로산성에 지는 해라는 뜻으로, 예로부터 광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대표하는 '광양 10경 8포 12실' 중 하나이다. 이는 마로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자연 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솔 그늘에 저녁 노을 곱게 피니 무너진 돌 비탈이 옛 터를 증명한다 산색은 옛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가는 자취는 밝힐 수 없는고." 사진=문성식

광양의 깊은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가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광양의 유적들은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합니다. ‘광양시니어신문’을 통해 연재될 기록들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잠든 고향의 풍경을 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매일 지나는 이 길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수천 년의 세월을 시민들과 함께 건너온 ‘성소’와도 같은 곳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이정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광양의 시간 여행이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을 더하고, 지역의 소중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마로산성 아래 잠든 고대 광양인들, 그들이 남긴 마지막 인사를 만나다

마로산성의 견고한 성벽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발길은 산자락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분군(古墳群)으로 향합니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산성이 외적을 막아내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면, 그 품에 안긴 고분군은 생의 소임을 다한 이들이 비로소 짐을 내려놓고 잠든 ‘안식의 자리’입니다.

마로산성 능선 아래 완만한 경사지를 지나면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광양읍 일대와 멀리 순천까지 보인다. 광양 일대에는 고대 고분군들이 약 400여개가 분포되어 있다. 삶의 터전(성곽)과 죽음의 안식처(무덤)가 지척에 놓인 이 풍경은 고대 광양인들에게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사진=문성식

400여 기의 고분, 270여 기의 고인돌광양은 거대한 기억의 박물관

광양읍 용강리와 마로산 주변은 물론, 우리 광양 땅 곳곳에는 수많은 고대 무덤이 흩어져 있습니다. 광양에서 확인된 삼국~통일신라시대 고분군만 약 400여 개,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숨결을 간직한 고인돌(지석묘)은 43개소에 걸쳐 약 270여 기에 달합니다.

특히 옥룡면(102기)과 봉강면(71기) 등에 밀집된 고인돌은 광양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얼마나 풍요롭고 ‘으뜸가는 마루’였는지를 증명합니다. 수 톤에서 수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선 수많은 이의 협동이 필요했으니,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 광양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거석기념물인 셈입니다.

여기에 용강리, 석정, 도월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고분들은 5~6세기 백제, 가야, 신라가 교차하던 접경지로서 광양의 독특한 위상을 보여줍니다. 도월리 유적의 대형 봉분(직경 30m)은 당시 이곳을 호령하던 지배층의 위엄을, 용강리의 석실묘는 마로산성을 지키던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예구마을에서 만난 청동기인의 소망

광양읍 덕례리 예구마을에 들어서면 소나무 숲 사이로 낮은 몸체의 돌들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바로 예구마을 고인돌군입니다. 이곳에는 총 11기의 고인돌이 마을을 지키듯 자리 잡고 있으며, 인근 오성아파트 옆 공원에도 13기의 고인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은 죽은 자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산 자들이 소중한 이를 기억하기 위해 쌓아 올린 ‘기억의 저장고’와 같습니다. 수천 년 전 청동기인들은 이 거대한 돌 아래에 슬픔을 묻고, 동시에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을 것입니다. 장비도 없던 시절, 이 무거운 돌을 옮겨와 정교하게 맞춘 힘은 단순히 권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떠나보낸 이를 온전히 지켜내겠다는 ‘사랑의 무게’였을지도 모릅니다.

예구마을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고인돌군.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광양인들의 내세관과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문성식
예구마을은 광양읍 덕례리에 자리하고 있다. LF스퀘어와 광양 운전면허시험장 건너편에 위치한 전통있는 마을이다. ‘예구’라는 지명은 예절을 중시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 분포한 고인돌은 모두 11기로 덕례오성아파트 인근 공원에 분포하여 있다. 사진=문성식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현대인에게 무덤은 두려움이나 슬픔의 대상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고대 광양인들의 무덤은 오히려 ‘삶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용강리 일대에서 발견된 석곽묘(돌덧널무덤)와 석실묘(돌방무덤) 안에서는 생전에 사용하던 토기, 장신구, 그리고 철제 도구들이 함께 발견됩니다.

이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도 이승에서의 삶이 계속되길 바랐던 고대인들의 간절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문 하나를 건너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치 먼 여행을 떠나는 가족의 짐을 챙겨주듯, 남겨진 이들은 정성을 다해 무덤 속에 ‘삶의 흔적’을 채워 넣었습니다.

무덤 곁 산책로에서 만난 주민 D씨(72세)는 “예전엔 여기가 고분군인지도 모르고 뛰어놀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상들 품에서 자란 셈이야. 나이가 드니 이 무덤들이 예사로 안 보여. 무섭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요”라며 미소 지으십니다. 마을과 아파트 단지 뒤편, 주민들의 산책로 옆에 나지막이 엎드린 고분군은 삶과 죽음이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는 광양만의 독특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며 묻는 진정 늙지 않는 삶

광양항 해누리 근린공원에 가면 창덕궁 애련정의 그것을 본떠 조성한 ‘불로문’과 ‘장생문’이 있습니다. 넓은 돌판을 통째로 깎아 만든 이 문은 통과하는 사람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상징물입니다. 창덕궁의 불로문이 왕의 장수를 기원했다면, 광양의 고인돌과 마로산성을 연결하는 이 불로문은 성을 지키던 병사와 민초들의 무사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무덤으로 가는 길목이나 삶의 공간에 ‘늙지 않는다’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것은 비록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그가 남긴 ‘이야기’는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살아남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로산성을 쌓았던 병사의 용기, 흙말을 빚으며 가족을 위해 기도했던 어머니의 정성, 쇠를 녹여 마을을 풍요롭게 했던 장인의 손길…. 그 정신들이 이어지는 한, 그들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광양항 동측배후단지에 2006년 5월~2008년 12월에 조성된 해누리 근린공원이다. 이곳에 “불로문”과 “장생문”이 있다. 또한 두 개의 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고대 궁궐의 모습을 본 따서 ‘불로장생’의 소원을 기원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사진=문성식
해누리 근린공원 장생문 전경. 사진=문성식

비움으로 채우는 역사의 지혜

고분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역사로 채워집니다. 세월의 풍파 속에 주인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 공간이 품었던 ‘사랑’과 ‘예우’의 정신은 돌벽 사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분주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결국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진 ‘따뜻한 기억’뿐일지도 모릅니다.

광양의 고분군은 화려한 유물보다 더 값진 ‘삶을 대하는 경건한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000년 전의 고인돌부터 1,500년 전의 고분군, 그리고 현재의 아파트 숲까지. 광양의 길 위에는 이토록 긴 시간이 겹겹이 쌓여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길로 들어서는 문이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자리를 떠나, 다시 정신의 풍요를 찾는 여정에 오릅니다. 다음 여정은 한때 수많은 승려의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정적만이 감도는 곳,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가 35년간 머물렀던 ‘옥룡사지’를 찾아갑니다.

※ 예구마을 고인돌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500-6
※ 해누리근린공원 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도이동 859

[다음 회 예고] 제5회: 옥룡사지(玉龍寺址) – 절은 사라지고 뜻은 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