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노인대학 1호차 22명은 백운산에서 가장 깊고 험한 계곡으로, 섬진강을 건너면 지리산과 연결돼 빨치산의 주요 보급로로 활용됐던 금천북국민학교(현 메아리휴양소) 표지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이경희
서부대 답사팀이 해설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있다. 사진=이경희
어르신들이 몸은 피곤해도 우리고장의 아픈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열심히 해섷사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이경희
단체사진을 한번 더 찍자며 다압 면사무소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이경희

대한노인회 광양지회(지회장 김종규)가 운영하는 서부대학 회원 40여 명은 22일 광양시의 지원과 ‘광양10·19연구회’의 주관으로 여순사건 동부지역 유적지 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광양 시내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참가자들은 백운산을 중심으로 △옥룡면사무소 △봉강북국민학교 △다압북국민학교 △다압지서 △어치 느재마을 △솔티재 등 9개 유적지를 둘러봤다.

유적 해설은 ‘광양10·19연구회’ 회원들이 맡았다. 이들은 다년간 관련 교육을 수강해 자격을 갖춘 해설사로, 희생자와 유족,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일부 장병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진압군에 밀린 일부 병력은 광양을 거쳐 백운산으로 입산해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약 6년간 활동했다. 광양 지역의 희생자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700여 건이 여순사건 특별법에 따라 신고됐다.

광양에서는 1948년 10월 20일 순천 생목동 지원에 나선 경찰서 직원 다수가 희생됐으며, 같은 날 오후 구금 중이던 좌익 혐의자 20여 명이 주령골에서 사살돼 첫 희생 사례로 기록됐다.

봉강북국민학교에서는 1949년 9월 빨치산이 신촌마을에 침입해 가축을 탈취한 뒤 경찰을 사살했고, 경찰은 주민 일부를 초남리로 끌고 가 사살했다. 다압북국민학교(현 금천 메아리휴양소)는 당시 군경 토벌대의 용의자 연행 및 즉결처분 장소로 사용됐다.

매티재에서는 1950년 7월 하동군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등 50~60여 명이 집단 학살됐으며, 이곳에서는 2025년 봄 유해 발굴이 진행됐다. 어치 느재마을에서는 자수한 입산자가 군경의 안내자로 나서 주민 9명이 집단 사살됐고, 옥곡 묵백리에서는 현직 의사가 진압군을 빨치산으로 오인해 사살되는 일도 있었다.

솔티재는 광양과 하동을 잇는 국도 2호선 삼거리로, 1948년 10월 22일 진압 지원에 나선 15연대가 봉기군의 기습을 받아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연대장이 생포된 곳이다. 이후 1949년 빨치산 습격 사건 후 옥곡면 등지에서 연행된 주민 30여 명도 이곳에서 사살됐다.

백운산 인근 마을에서는 1949년과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관공서 습격과 토벌 작전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산에 은신한 빨치산들은 굶주림과 혹한, 총격 속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답사에 참여한 한 어르신은 “여순사건 당시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재가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비참했다”며 “지금도 생모가 100세가 넘었지만 ‘어머니’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백운산 일대에서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 ‘광양10·19연구회’는 전라남도와 광양시의 지원을 받아 올바른 역사 인식 확산을 위해 ‘찾아가는 학교 수업’을 병행하며 여순사건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